<뉴스 & 분석>權力의 ‘기업 돈뜯기 적폐’ 근절장치 만들어야

- 28년前과 ‘판박이 유착’

준조세청탁금지법 도입 검토
재계서도 입법 요구 한목소리

1988년 국회 5공 비리 특별위원회가 진행한 5공 청문회 당시 증인으로 출석한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일해재단 모금과 관련, “기부금을 내라고 하니 내는 게 편하게 사는 길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도 “분위기상 내지 않으면 안 될 강제성이 있었다”고 밝혔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호를 딴 일해재단은 버마(현 미얀마) 아웅산테러 희생자 유가족을 지원한다며 1984∼1987년 기업들로부터 600억 원에 이르는 기금을 모았다. 시계추를 28년 뒤로 돌린 6일 또다시 대기업 총수 9명이 국회 청문회에 섰다. 박근혜 대통령과 독대한 뒤 미르·K스포츠재단에 기금 774억 원을 출연한 배경을 묻는 자리였다. 답은 예나 지금이나 같았다.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장은 “정부 요청이 있으면 기업은 거절하기 어려운 게 한국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28년 전과 비교하면 한국 경제 규모는 10배 커졌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국내 대표 기업은 해외에서 주시하는 글로벌 기업이 됐다. 그럼에도 이른바 권력이 기업을 ‘삥 뜯는’ 낯뜨거운 관행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대기업 총수들은 이날 하나같이 정경유착 고리를 끊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집중포화를 맞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어떤 압력에도 앞으로는 정경유착이 있다면 다 끊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업이 권력의 요청을 거부할 경우 먼지떨기식 수사, 세무조사 등 전방위적 보복이 쏟아지는 풍토가 바뀌지 않는 한 정경유착은 지속되고 기업인들의 청문회 출석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제도적으로 근절할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공감대를 넓히고 있다. 구본무 LG그룹 회장도 청문회에서 “정부가 (돈을) 내라고 하면 낼 거냐”는 질문에 직접적으로 “국회에서 입법해 막아달라”고 요청했다.

이날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기업 준조세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 세미나에서 학계 전문가들은 정치권 요구를 막기 위해 ‘준조세청탁금지법’(가칭)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김남석 기자 namdol@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