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공간>열 여섯 살 소녀가 부르짖던 自由… 그 외침, 여전히 유효하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태극기가 물결치고 있는 충남 천안시 병천면 시내. 옛 지명이 아우내인 이곳에서 3·1만세운동의 외침이 시작됐다. 뉴시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서울 중구 정동길에 있는 이화여고 내 유관순 동상. 신창섭 기자 bluesky@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화여고 안에 세워진 문정희 시인의 ‘아우내의 새’ 중 ‘서시’ 시비. 신창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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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문정희 詩 ‘아우내의 새’의 배경

신념을 입으로 부르짖고 죽어간 한 소녀의 자유혼을 주제로 장시 ‘아우내의 새’를 쓴 것은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다.

나는 그때 20대의 시인이었고, 시대는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이었다. 나는 시인으로서 겁이 많고 비겁한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그래서 당대의 정치 현실과 시대의 불의를 직접 노래하고 비판하기보다는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을 통해 더욱 깊게 표현해 보려고 했다.

열여섯 살 소녀 유관순이라는 인물을 떠올렸다. 그때 야간 여자고등학교 교사였던 나는 밤마다 흐린 불빛 아래서 열여섯 또래 소녀들의 눈빛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유관순이라는 이름 위에 씌워진 열사나 누나라는 무거운 언어가 어리고 순열한 소녀의 자유혼을 가리고 있는 것이 안타깝게 생각됐다.

나는 그녀를 통해 진정한 생명의 비밀을 노래해 보고 싶었다. 애국지사에 대한 찬양시가 결코 아닌, 한 소녀의 자유혼을 캐내어 보고 싶은 것이었다.

사실 나의 뇌리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유관순이라는 소녀가 각인돼 있었다. 열두 살 때 혼자 고향을 떠나 광주로 전학을 가서 본 영화 ‘유관순’의 감동을 지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국 여배우로서는 보기 드물게 열사와 팜파탈과 토속의 감성을 함께 지닌 도금봉이라는 오묘한 여배우의 이미지가 내가 생각하는 유관순의 이미지와 상당 부분 중첩됐다.

전남여중 1학년 봄에 맞은 4·19의 경이로움, 그리고 이듬해 아버지의 죽음에 즈음해 서울로 전학 와서 겪은 5·16의 아침, 탱크를 밀고 나온 군복에 어리던 햇살의 두려움이 나의 감성 속에 이미 깊게 새겨져 있는 것이었다.

자유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원시적인 형태의 남도 땅 보성과 뜨거운 광주의 자긍심과, 거대하고 불안한 서울… 말하자면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환되는 시기의 역사와 정치가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나에게 물결치며 밀려 들어왔던 것이다.

그로부터 10년 후, 스물두 살 여름, 대학 4학년의 학생으로 나는 등단 시인이 됐다. 진명여고 시절 ‘꽃숨’이라는 시집을 내서 화제를 모았지만 기실 나는 그런 화제의 시인이나 전통적 의미에서 부드럽고 소극적이고 감상적인 애송시류의 시인이 되고 싶지 않은 당돌함을 지니고 있었다.

자유가 유린당하는 폭력의 시대를 견디기 위해 시인으로서 나는 꼭 뭔가를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16세의 죽음! 사인(死因)은 자궁 파열!/ 나는 곧 끓어오르는 나의 핏발 위에 ‘죽음과 소녀’의 바늘을 올려놓고 울었다./ 근세에 보기 드문 완벽한 자유주의자. 그러나 그의 이름 뒤에는 언제나 열사라든가 누나라는 말이 따라다녀서 우리는 그의 순수하고도 더운 피를 만나 볼 수 없었고, 그의 살아 있는 목청을 들어 볼 수 없었다. 관념적이고 우상화된 역사 속의 대상이 되어 하나의 하얀 결과로만이 우리 앞에 서 있는 소녀! 그것은 그의 뜨거운 죽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역사로서의 의미를 상실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나는 신념을 몸으로 태워버린 용기의 불꽃에다 앵글을 맞추고… 신문사 자료실과 도서관을 뒤지고 아우내 장터와 지령리 생가와 매봉의 피를 나눈 사람들을 만났다./ 1974년 봄, 20대였던 젊은 나는… 인간의 존엄과 시대의 가치가 마구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을 보며 갈증처럼 ‘관순’을 붙들고 밤마다 열병을 치르었다.”

위의 글은 1986년에 출판된 아우내의 새(일월서각)의 첫 장에 실린 작가의 말이다.

진실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이 땅의 지성의 삶에 대하여 끝없는 의문 부호를 던지며 괴로워하던 20대 중반의 나는 결코 부드럽고 우아한 시인이 될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나의 살과 뼈에는 자유와 정의와 역사에 대한 질문이 용수철처럼 솟아나 있었다. 하지만 얼떨결에 결혼까지 해치운 내 앞에는 농경사회가 남긴 가부장제가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를 출산한 후에 3주도 안 돼 퉁퉁 부은 다리로 야간학교에 근무하며 늙은 어머니의 등에서 우는 아이 울음을 들으며 이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끝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1969년 등단 이후 첫 번째 청탁을 받은 곳이 월간지 ‘사상계’였다. 그러나 밤새워 쓴 나의 시는 마침 1970년 5월호 사상계에 김지하의 ‘오적’과 함께 실림으로써 서점에 깔리기도 전에 회수되는 운명을 겪었다.

그런 배경 탓인지 아우내의 새는 처음에 원고지 1000장이 넘는 장시가 됐다. 말하자면 지나치게 흥분한 나머지 언어의 남용이 심하고 심지어 수다스럽기까지 하다는 것을 느꼈다. 스스로 실망했지만 일단 그 원고를 서랍 속 깊이 숨겨두기로 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와 묘한 인연으로 미국 뉴욕대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2년 동안 뉴욕에서 표류했다. 그 시절의 뉴욕은 자유가 많아 당혹스러운 도시였다. 마틴 스코세이지, 밀로스 포먼,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과 세계적인 거장들의 작품을 보며 사유와 표현의 영역을 맘껏 확장했다. 조금 과장하면 어떤 의미에서 개안(開眼)을 한 시기였다.

객관적으로 코리아를 다시 바라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최근 노벨상을 받은 밥 딜런이나 시인 앨런 긴즈버그 등으로 대변되는 당시의 반전(反戰)과 인권을 노래한 예술가들의 자유와 정신을 배우고 즐기고 숨 쉬었다. 적대적이고 분노 일변도였던 페미니즘에 대한 이론적인 체계를 대략이나마 정리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시절이었다.

2년 후 1984년 초가을, 가난과 외로움에 지치고 지쳐 귀국한 나는 8년 만에 시집을 출판했다. 이어서 깊이 숨겨 두었던 장시 아우내의 새를 다시 과감하게 개작하기 시작했다.

마침 전두환 정권의 부도덕과 인권 탄압은 극에 달했고 특히 1986년 부천서에 연행된 서울대 여학생 성고문 사건으로 나의 표현에 대한 충동과 날카로움은 절정을 이뤘다.

유관순의 사인(死因)이 자궁파열이다.

나는 이렇게 다시 장시 아우내의 새를 전면 개작했다. 막을 여는 노래와 서시, 막을 닫는 노래를 앞뒤에 배치하고 총 42장의 시편을 하나의 극적인 장면처럼 배열했다. 상징성뿐만 아니라 나름으로 표현 미학을 추구했고, 극시의 형태를 취하며 장면을 영화처럼 전환시켰다.

드디어 아우내의 새가 세상에 나왔다. 1970년 사상계 5월호에 김지하의 오적을 실어 투옥됐던 김승균 편집장이 출옥해 운영하는 출판사 일월서각에서였다. 황주리 화백의 그림도 사이사이 곁들였다. 신경림 시인의 발문과 이상호 한양대 교수의 해설도 들어갔다.

이 시집은 그 후 여러 매체에서 특집극으로, 드라마로, 낭송으로 소개됐다.

2006년 유관순의 모교인 이화여고 이화동산에 개교 120주년 기념으로 유관순 동상이 건립될 때 조각가 강은엽 선생은 유관순의 이미지를 찾느라 고심한 끝에 장시 아우내의 새를 읽고 동상 뒤편에다 아우내의 새 중 ‘서시’를 대리석 벽에 새겨 넣었다.

아우내의 새는 다시 2007년 랜덤하우스에서 복간됐다.

첫 장에 이화동산에 세워진 시비가 흑백사진으로 실렸고 이숭원 평론가의 “자유를 꿈꾸는 상징의 새”라는 유려한 해설이 새로 들어갔다.

평론은 아우내의 새 중 열여섯에 끌려 들어가 열일곱에 감옥에서 세상을 떠난 유관순의 죽음을 묘사한 사인의 대목을 인용했다.

“꿈속에서조차 말하기 떨리지만, 열일곱 살 그녀의 사인은 // 살아있는 이 지상의 모든 핏속에 // 새겨둬야 하리라/ ‘자 궁 파 열’”

젊은 동정녀가 자궁파열을 당한 것은 민족 생명의 근원을 유린한 일이요, 자궁파열을 살아있는 자들의 핏속에 새겨 둬야 하는 것은 새로운 지평을 모색한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생명의 상징이요, 죽음의 환유인 피를 흘리고 죽어간 아우내의 새의 복간본 시집 뒤 표지에는 오적을 쓴 김지하 시인의 깊고 뜨거운 글이 실려 더욱 의미를 깊게 했다.

“아우내의 새는 역사와 신화의 결혼이다… 서른다섯 해 동안 해가 뜨지 않은 나라의 기록이며 그 기록은 검은 개가 달을 삼키듯이 동남아시아에 개기 일식이 시작된 암흑의 사초(史草)다. 시는 바로 이 암흑 속에서 떠오르는 별의 신화를 노래한다. 어두운 사실들의 시적 승화 과정으로서 아우내의 새는 그대로 관순의 역사적 비극이 초월적 신성(神聖)으로, 캄캄한 밤 푸른 별로 승화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금 역사의 불빛으로 하강하는 과정이다. 단 한마디 말 이외에 무슨 말을 더할 것인가 ‘숭고하다’.”

그리고 김지하 시인은 시 중에서 재판정 부분을 인용했다.

“새: 나는 조선의 딸이다/ 이 재판을 거부한다.

뱀: 신성한 법정에 대한 모독죄를 추가하여/ 실형 7년을 추가한다.

새: 내 나라에서 도적놈을 쫓아내는 것이 문제일 뿐 3년이건 7년이건 70년이건 그건 내게 의미가 없다. 새는 앉았던 의자를 단 위에 집어 던졌다….”

이 부분을 이숭원 평론가는 이렇게 해설했다.

“현실의 측면에서 솔직히 자인하자면 유관순은 나무 의자에 몸이 묶인 채 꽁지가 빠져 뒤뚱거리는 연약하고 가련한 존재다. 그러나 그는 어떤 순간에도 푸른 하늘 한 조각을 입에서 놓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자연이요, 생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의 자연이고 생리임을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쳤다. 그 깨우침, 그리고 그 깨우침을 담은 상징은 형편없이 자유가 유린된 1970년대에도 또 1980년대에도 그리고 지금까지 21세기 글로벌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래서 문정희의 아우내의 새는 삼천리 강토 위에 다시 날아오를 권리가 충분히 있다.”

문정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