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評>반기문 ‘세계의 조력자’ 10년의 功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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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 前 외교부 차관

흔히 유엔 사무총장을 ‘세계의 대통령(global president)’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강대국 정치가 국제관계를 좌우하는 현실에 비춰볼 때 유엔 사무총장은 ‘세계의 조력자(global facilitator)’에 가깝다. 유능한 사무총장은 자신이 강대국 역할을 대신하려고 하기보다는 강대국 관계를 잘 조정(調整)하면서 이들이 미처 신경 쓰지 못하는 지역 및 분야에서 유엔의 정신을 구현한다.

이렇게 볼 때 이달 말 퇴임을 앞둔 반기문 사무총장은 지난 10년 동안 세계의 조력자(助力者)로서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다. 취임 초기에는 영·미권 언론으로부터 혹독한 비판에 직면했으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소임을 다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임기를 마친 세계 주요국 지도자들에 대한 평가를 보면 임기 중에 제대로 된 성과를 단 하나 꼽기도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공평하게’ 반 총장의 공과(功過)를 한 가지씩만 꼽는다면, 파리기후변화협약을 업적으로, 유엔 개혁 부진을 과오로 지적할 수 있다.

유엔의 개혁 필요성은 반 총장이 사무총장으로 취임하기 전부터 제기된 문제였다. 하지만 반 총장이 퇴임을 목전에 둔 지금에도 유엔의 고질적인 관료주의와 비효율성이 개선됐다는 평가는 거의 없다. 30년간 유엔에서 근무하다가 지난 2월에 퇴직한 앤서니 밴버리 전 사무차장보는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유엔 체제는 많은 돈과 인간의 열망을 모두 흡수해서 한순간에 사라지게 하는 ‘블랙홀’이다”라고 비판했다. 유엔 직원 한 사람을 채용하는 데 평균 213일이 걸리고, 수십억 달러를 사용하는 유엔 평화유지군 대표가 무능한 사람들로 넘쳐난다. 비효율과 무능 속에서 유엔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기는 힘들다. 물론 유엔의 인사 시스템은 사무총장도 손대기 힘든 적폐(積弊)라는 게 중론이다. 유엔 개혁 부진을 반 총장만의 과오로 돌릴 수는 없겠지만, 유엔의 수장으로서 비판을 피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반면 파리협약은 반 총장의 역작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 같다. 전 세계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미국과 중국을 포함해 총 195개 국가가 지난해 12월 12일 파리에서 서명했다. 산업화 이전 시기 대비 지구 평균기온 상승 폭을 2도보다 상당히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게 목표다. 1997년 교토(京都)의정서는 선진국만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갖도록 했으나, 2015년 파리협약은 195개 당사국 모두가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갖게 했다.

반 총장은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40%를 차지하는 미국과 중국을 설득했다. 그는 “기후변화는 (사회경제적 문제이기 이전에) 안보 문제”라는 점을 강조해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의 협력을 얻어냈고,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정부에는 “녹색 저탄소 발전으로의 전환이 중국의 발전을 지속 가능케 할 것”이라고 설득해 적극적인 동참을 이끌어냈다. 시리아 사태나 남중국해 문제처럼 강대국 간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충돌하는 이슈보다 기후변화라는 ‘소프트’한 주제를 택해 강대국 간 공감대를 끌어내고, 결국 선진국과 후진국 간 대타협을 도출했다는 점에서 반 총장은 ‘세계의 조력자’로서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반 총장은 파리협약 서명 직후에 협약 발효를 위한 최소 충족 요건인 ‘55개국 이상의 비준’ 및 ‘전 세계 배출량의 55% 이상 비준’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전 세계를 누볐다. 그 결과 미국과 중국이 협정을 비준한 데 이어 브라질과 인도와 유럽연합(EU)까지도 동참하면서 파리협약은 지난 11월 4일 정식 발효됐다. 기후변화 회의론자인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미국 대선이 치러지기 나흘 전의 일이다. 교토의정서가 법적 구속력을 갖기까지 8년의 시간이 걸린 반면, 파리협약은 1년도 안 돼 공식 발효에 성공한 것이다.

반 총장은 지난 12일 고별사에서 “마음은 유엔과 함께 머물러 있을 것”이라면서도 “한국 정부와 국민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표하고 싶다”고 했다. 그가 ‘세계의 조력자’로서 임무를 완수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조용히 사라질지, 아니면 정치적 위기에 처한 조국을 위해 마지막 봉사를 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파리협약을 이끌어낸 그의 엄청난 추진력을 우리 국민이 원하고, 유엔 못지않은 난제(難題)를 안고 있는 한국에 대한 총체적 개혁 청사진을 보여줄 수 있다고 확신할 때, 그는 새로운 여정을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