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와 시각>민원(民願)과 민원(民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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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일 문화부 부장

민원(民願)의 사전적인 의미는 ‘주민이 행정기관에 대하여 원하는 바를 요구하는 일’을 말한다. 민원은 아래에서 위를 향한다. 공직자가 공직자에게,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에게 하는 건 민원이 아니라 ‘청탁’이나 ‘압력’이다. 백주에 벌어진 비선 실세의 국정농단은 이런 압력과 청탁으로 이뤄졌다. 공직사회에서는 ‘민원’의 탈을 쓰고 청탁과 압력이 난무한다. 높은 자리로 올라갈수록 그렇다. 누구의 인사를 챙기고, 어떤 업체를 잘 봐주고…. 위에서 내려오는 주문은 끝이 없다.

취임 1년 만인 지난해 4월 급작스럽게 사표를 제출했던 변추석 전 한국관광공사 사장은 퇴임 후 사석에서 이렇게 토로했다. “오전 간부회의를 마치고 나오면 전화가 40∼50통이 와 있었다. 그중 80%, 아니 90% 정도가 민원 전화였다. 공직생활 경험이 없어 그때는 그걸 다 들어줘야 하는 건지 미처 몰랐다.” 돌연한 사표 제출의 속내를 묻는 말에 나온 후회 섞인 답이었다. 변 전 사장은 재임 중 청탁을 잘 들어주지 않았다. 투철한 소신 때문은 아니었고, 자신의 말대로 ‘그걸 꼭 들어줘야 하는 건지 잘 몰라서’ 그랬다.

변 전 사장이 막 부임한 2014년 6월쯤의 일이다. 한국관광공사에 광고 회사 직원 6명이 찾아왔다. 국정농단의 주역인 차은택 전 창조경제추진단장이 운영하던 아프리카 픽처스의 자회사 ‘아시아 인 아프리카’의 직원이었다. 관광공사의 담당 업무 팀장은 변 전 사장으로부터 ‘센 팀이 오니까, 잘 들어보라’는 언질을 받은 터였다.

광고회사 직원은 비빔밥을 소재로 한 한식 홍보 가상현실 미디어월에 대해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관광공사의 전 세계 31개 지사에 이걸 설치하겠다며 수억 원대의 금액을 요구했다. 그러나 관광공사 담당 팀장이 “내가 전결로 처리할 수 있는 수의계약 상한액이 2000만 원”이라고 하자 이들은 실망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한 달쯤 뒤에 다시 찾아온 직원들은 “사무실 리뉴얼이 진행 중인 홍콩지사에 미디어월을 설치해달라”는 관광공사 측의 요청에 반색했으나 발주 금액이 2000만 원이란 얘기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돌아갔다. 변 사장이 더 이상 힘을 보태지 않았고, 차은택 쪽에서는 연락을 끊었다. 그리고 변 전 사장은 부임 1년 만에 사표를 썼다. 국정농단 무대가 된 문화체육관광부의 문화, 체육 분야와 달리 관광 분야가 무사했던 게 ‘먹을 게 없었기’ 때문일까, 아니면‘민원의 불성실한 이행’ 때문이었을까.

박근혜정부 내내 공직사회에서는 압력과 청탁이 ‘민원’으로 이름을 바꿔 붙인 채 횡행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민원을 들어주지 않으면 가차없는 보복이 이뤄졌다. 사상 초유의 국정농단이 드러났음에도 박 대통령이 ‘순수한 의도’ 운운하며 변명하는 것도 위로부터의 압력이나 청탁을 밑으로부터의 민원과 구분하지 못하는 시각 때문이다. 심지어 자리에서 물러난 공기업 사장마저 압력과 청탁을 민원으로 이해하고 이의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던 걸 반성하는 지경이니 말 다했다. 이런 압력과 청탁이야말로 민원(民願)이 아니라 ‘백성들의 원망’을 뜻하는 민원(民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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