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최순실 늪에 빠진 노동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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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평 논설위원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지난주 기자회견에서 “박근혜 탄핵은 노동개악에 대한 탄핵과 같다”고 주장했다. ‘노동개악’, 곧 박 정부가 추진해온 노동개혁이 국정농단과 불법 정경유착의 핵심 사안이라는 것이다. 지난달 국회가 통과시킨 ‘최순실 국정농단 특검법’도 수사 대상 14가지 중 3번 항목에 ‘노동개혁법안 통과…등을 대가로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을 받았다는 의혹사건’을 적시했다. 마치 노동개혁이 기업의 부탁을 받고 최순실이 손을 쓴 결과물처럼 묘사하고 있다. 양대 노총과 야당의 반대 속에 곡절을 겪으며 힘겹게 연명해온 노동개혁법안이지만, 이렇듯 최순실 게이트의 늪에 빠지면서 회생의 기력마저 잃은 형국이다.

대한민국을 삼류국가로 전락시킨 국정농단은 특검 수사로 실상을 밝혀 단죄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노동개혁까지 최순실을 배후로 지목하는 것은 아무래도 비약이다. 노동개혁은 박 정부만이 아니고 김영삼정부 이래 역대 정권이 예외 없이 추진해온 국정 의제다. 노무현정부만 해도 이 문제로 임기 내내 민노총과 사사건건 대립했다. 정권마다 뒤에 최순실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혹여 기업들이 노동개혁법안 통과를 위해 최순실에게 로비를 했다면 번지수가 틀렸다. 법안 통과의 칼자루를 쥔 쪽은 정부가 아니라 야당이었기 때문이다. 노동계 표심을 의식한 야당은 번번이 제동을 걸었다. 청탁할 생각이었다면 야당으로 갔어야 할 일이다.

노동개혁은 최순실 일파와 함께 도매금으로 매도될 사안이 결코 아니다. 박 정부 초기 노동개혁 의제가 당위성을 얻은 것은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폐해가 도를 넘은 탓이다. 지난해 중소기업 평균임금은 대기업의 62%다. 1980년대에는 90%를 넘었고, 1990년대에도 70%대를 유지했다. 2차 하청업체 임금은 원청업체의 3분의 1, 3차 하청은 4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같은 직장에서 비정규직은 정규직의 55%만 받는다. 노조 위세를 업은 대기업 정규직이 90%의 노동시장 약자에게 돌아갈 몫까지 챙겨온 결과다. 한노총이 노사정 테이블에 앉았던 것도 세간의 문제의식을 외면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노총은 노사정 타협을 이루고도 끝내 기득권의 벽을 깨지 못했다.

탄핵 정국에서 양 노총이 우위에 올라선 형세지만, 그들의 주장이 곧 촛불 민심이라고 보긴 어렵다. 광화문에서 시민들은 ‘노동개악’ 주장에 시큰둥했고, 한상균 민노총 위원장 석방 구호엔 고개를 돌렸다. 그들을 광장으로 이끈 힘은 나라 같지 않은 나라에 대한 수치심이었다. 그러나 거대한 촛불을 지속시킨 동력은 미래를 꿈꿀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분노였다. 최근 발표된 여러 통계는 한국사회에서 계층 사다리가 실종돼가는 현실을 고발한다. 계층 사다리의 양 축이 교육과 일자리다. 그러나 정유라 사례에서 보듯 대학 가는 데도 능력·노력보다 정실이 득세하는 세상이다. 광장에서 유난히 청소년과 많이 마주쳤던 이유다.

일자리는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된다. 청년들은 장기 실업에 절망하고, 30·40대는 박봉과 감원에 움츠리고, 50대 이상은 막막한 노후 걱정에 기약 없는 구직에 나선다. 일자리 난제를 풀면서 저성장 덫에 걸린 한국경제를 되살릴 최선책이 바로 편중되고 왜곡된 노동시장을 교정하는 것이다. 지난달 방한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랜들 존스 한국담당관도 한국경제의 최대 위험 요인으로 ‘노동시장의 양극화’를 꼽았다. 과도한 정규직 보호가 비정규직의 열악한 처우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귀족노조의 철밥통을 깨야 한다는 뜻인데 탄핵 정국에서 그들이 오히려 더 큰 목소리를 내고 있는 상황이다.

근래 한 단계 높은 발전과 성숙을 경험한 나라는 거의 예외 없이 노동개혁을 성공시켰거나 이행단계에 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독일·영국·일본 등이 실례다. 재정위기를 겪었던 스페인·이탈리아 등은 강도 높은 노동개혁으로 재기에 성공했고, 중국·인도·브라질 등 신흥국들에도 확산되는 기류다. 4차 산업혁명이 본격화하면 노동시장은 또 다른 차원의 격랑에 휩싸일 것이다.

글로벌 흐름과 달리 국내에서만 노동개혁이 정치 이슈에 가려 빈사 상태에 빠진 것은 딱한 일이다. 이르면 내년 상반기엔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수 있다. 어느 정파가 집권하든 피해갈 수 없는 의제다. 노동개혁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허송할 시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