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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2017 신춘문예 게재 일자 : 2017년 01월 02일(月)
나선의 숲에서 부유하는 시어들 - 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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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당선작


1. 나선형과 시차



고대 예술가들은 대체로 자연에서 영감을 얻어 실물과 거의 흡사한 모방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예술과 실재의 관계에 대해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예술가는 자연에서 여러 요소들을 선별함으로써 자연에 존재하는 것보다 더 완벽한 전체를 제작해낸”다고 보았다. 고대 그리스의 건축 또한 자연의 영감을 통해 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중 하나인 이오니아 양식은 본체 꼭대기를 덮는 석판이 나선형으로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이는 “앵무조개의 소용돌이 모양을 본”떠 적용한 것으로서, 동시대의 다른 양식에 비해 정교하고 섬세한 미적 감각을 선보인다. 요컨대 이오니아식 기둥은 “우아함과 다양함을 추구하며, 동(動)과 정(靜), 개인과 공동체, 원심과 구심처럼 삶에 대해 대립하는 두 가지 관념을 매우 순수한 형태로 재현”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신전(神殿)의 기둥머리에 발현된 나선형 패턴은 아래에서 위를 바라볼 때는 마치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에는 지상의 것을 양손으로 둥글게 말아 그 안에 담아두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그것이 신의 자리를 탐한 인간에게 내린 저주라면, 그 속에 갇힌 인간은 끝이 보이지 않는 곡선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형벌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시점에 따라 자연의 패턴이 상이하게 풀이되듯, 이처럼 시차(時差/視差)에 따라서도 하나의 현상 혹은 이미지가 판이하게 보일 것은 명백한 일이다. 이제니의 시가 지닌 스펙트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개개 시편 안에 보일 듯 보이지 않는 틈 사이로 자리 잡고 있는 그녀만의 고유한 시세계에 대해 말이다. 먼저, 위에서 강조한 시점의 차이를 이제니 식으로 발화한다면 아마 이런 표현을 얻을 것이다. “나는 그쪽을 보지 않으려 했”지만 “그래서 그쪽을 보고 말았”듯이, “너” 또한 “이쪽을 보려고 했”지만 “그래서 이쪽을 볼 수 없었”(‘창문 사람’)다. 이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틈 속으로 한 발을 들이밀면 더 이상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요롱이는 말한다’)과 같다. ‘나는 보지 않으려 애썼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쪽을 보고 말았고, 너는 이쪽을 보려 노력했으나 그래서 이쪽을 볼 수 없었다.’라는 시적 주체의 담담한 고백은 흡사 미지의 언어 혹은 복원 불가능한 세계에 대한 은유를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확정될 수 없는 발화의 의미는 이제니 시 안에서 기표의 소용돌이 혹은 곡선으로 빙빙 도는 비틀림의 이미지로 발현되어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가 흔쾌하게 동의하듯이, 시에서 특정 시어나 이미지가 반복된다는 것은 독자로 하여금 그것에 집중을 요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시에서 ‘반복’이란 시인이 의도적으로 생성해낸 규칙들의 체계를 통해 차이를 드러내는 물리적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인의 의도는 자신의 머릿속 계획으로 그칠 때도 있다. 시인이 반복을 통해 의도적 언술을 보여준다고 해서 그것이 모든 독자에게 동일한 울림을 전달해줄 것이란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반복하는 무엇과 마주한다는 것은 때로는-시인의 의도와는 다르게-우리에게 시인의 의식이나 무의식에 접근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주기도 한다. 지금까지 이제니가 펴낸 두 권의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나선’의 이미지를 유심히 관찰해본다면, 우리는 시인이 이야기하고자 했던 혹은 역으로 감추어질 수밖에 없었던 진실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나선형 이미지를 통해 발현되는 그녀만의 ‘반복’에 대해 말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이제니 시를 이해하는 출발점이자 동시에 반성과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지점-지금 우리가 이제니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와 가지런히 맞닿는 일이기도 하다. 도대체 왜, 시인은 이리도 집요하게 ‘나선’의 형상으로 자신만의 사유의 흔적을 남기려 했던 것일까.



2. 원환의 숲에 갇힌 고아의 말



주체의 균열과 단절은 자아와 세계가 합일될 수 있다는 동일성의 환상에 일종의 균열을 초래했다. 이로 인해 소박한 환상에 젖어 있던 충만한 자아는 발가벗겨진 채 실재의 폭력 앞에 설 수밖에 없었다. 이 원초적 폭력성은 근본적 차원에서의 유기적 통합성을 파열시킨다. “이미 죽은 채로 하염없이 미끄러지는”(‘페루’) 것이 실재였음이 확인되자, 최근 젊은 시인들은 균질적이고 몰개성적인 근대적 개인으로서의 자아를 폐기하고, 기존의 질서 체계를 교란시키는 표상으로써 자신들만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냈다. 주체는 이제 불가해하고 부조리한 현실의 치명적 혼돈 앞에서 “입을 다”(‘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물고 말 뿐이다. 어떠한 의미도 닿지 못하는 불확정성의 세계에 직면한 채 “우기의 복화술사”(‘우비를 입은 지구 소녀’)가 되어 상처에 대해 말해야 했던 것이다.

이는 이제니 시에서 부모를 상실한 ‘고아’의 이미지로 등장한다. ‘고아’가 되어 발화되는 주체의 말은 “어미 없이 혼자 서 있는 말”이다. 그들은 진정한 부모를 찾기 위해 “울면서 혼자 달”리지만 오히려 그들의 언어는 공중으로 산개될 뿐이다(‘고아의 말’). 이제 시인의 목소리는 “더 이상 어두울 수 없을 만치 어두워 숲으로 감추고 바람으로 속이고 숲에서 바람까지 나무에서 구름까지 감추고 삼키고 속이고 숙이고 죽이고 묻히고 말리고 밀”려 버린 “죽은 목소리”(‘나선의 바람’)가 된다. 존재의 원형으로서의 고향을 잃어버린 주체는 “나선의 숲”(‘나선의 바람’)에 스스로를 유폐할 뿐이다. 그리하여 자기 안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에만 집중한 시인의 언어는 뱀이 자기 꼬리를 물 듯 자기 폐쇄적 프레임에 갇혀 뱅뱅 돌고만 있다.



블랭크 하치. 내 불면의 밤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면 너도 네 얼굴을 보여줄까. 나는 너에 대해 모든 것을 썼다 모든 것을. 그러나 여전히 아직도 이미 벌써. 너는 공백으로만 기록된다. 너에 대한 문장들이 내 손아귀를 벗어날 때 너는 또다시 한 줌의 모래알을 흩날리며 떠나는 흰빛의 히치하이커. 소리와 형태가 사라지는 소실점 너머 네 시원을 찾아 끝없이 나아가는 블랭크 하치. 언제쯤 너에게 가닿을까. 언제쯤 목마름 없이 너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공백 여백 고백 방백. (…) 어쩌다 우리는 소멸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지상에 집을 짓지 못하고 허공에 매달린 채로 이곳과 저곳 사이에서만 몸을 누이는. 블랭크 블랭크. 너의 야윈 등이 보이고 마른 뼈들과 뼈마디의 적막과 그 적막이 내뱉는 힘줄보다 질긴 고백. 블랭크 하치. 실패한 곡선에도 밤은 올까. 너는 단 한 번도 똑같은 표정을 지은 적이 없고 나는 너에 대해 말하는 일에 또다시 실패할 것이다. 내가 기록하는 건 이미 사라진 너의 온기. 체온이라는 말에는 어떤 슬픈 온도가 만져진다.-‘블랭크 하치’ 부분



우선, 시의 제목을 보자. “블랭크 하치”는 영단어 ‘blank hatch(빈 출입구)’를 한글로 표기해 놓은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왜 같은 모음 ‘a’를 앞에서는 우리말 모음 ‘ㅐ’로, 뒤에서는 ‘ㅏ’로 다르게 표기해 놓았는가 하는 질문에 적절한 대답을 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시의 제목을 이해하는 두 번째 방법은 제목 “블랭크 하치”를 해석할 수 있는 것은 해석하고, 해석하지 못하는 것은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다. 이제니 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해하지 않기로”(‘음지와 양지의 판다’) 하자는 것이다. ‘하치’를 수식하는 자리에 놓인 ‘블랭크’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 본다면, 하치는 비어 있는 곧 여백의 “하치”가 된다. 이 시편에서 ‘하치’를 수식하는 또 다른 시어로는 “공백/히치하이커/영원히 가닿지 못하고/언제나 목이 마른” 등이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하치’를 미지의 대상이거나 순간적으로 지나치는-곁에 머무르지 않는 대상으로 본다.

“블랭크”는 비어 있는 것이기에 어떤 말로도 대체 가능하다. ‘하치’는 온전히 기의가 확정될 수 없기에 화자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못한다. 따라서 ‘하치’에 대한 “모든 것”의 기록은 “공백으로만” 쓰인다. 그리고 ‘하치’에 대한 문장들은 언제나 “한 줌의 모래알”처럼 “손아귀”를 벗어나 “흩날리며 떠”날 수밖에 없다. 난분분하게 이동하는 ‘하치’는 그 점에서 자신의 ‘시원(始原)’을 찾아 끝없이 나아간다. 그곳은 화자가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소리와 형태가 사라지는 소실점 너머”의 공간이다. 기의가 불명확하다는 것은 어떠한 외피를 가져다 놓아도 충만해진다는 것을, 또한 언제든지 그 의미가 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의 언어가 “지상에 집을 짓지 못하고 허공에 매달린 채로 이곳과 저곳 사이에서만 몸을 누이”고 있듯이, 우리 또한 “소멸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증명”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하치’는 언제나 “똑같은 표정”을 짓지 못하고, 화자인 ‘나’는 하치에 대해 말하는 것에 “또다시 실패”하게 될 것이다. 화자가 기록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사라져버린 ‘하치’의 ‘온기’뿐이다. 이 근원적인 불안과 부재 앞에서 시인은 그 슬픈 ‘온도’를 공감하며 ‘너’에 대해 기록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블랭크 블랭크”를 반복하듯 말이다.

이제니 시에서 화자는, 마치 ‘앵무’처럼, “누군가의 목소리를 흉내 내듯” 한없이 똑같은 말을 반복한다(‘눈 위의 앵무’). “알갱이 알갱이 알갱이 옥수수 알갱이는 노란색 둥글고 따뜻한 알갱이 알갱이 알갱이”(‘옥수수 수프를 먹는 아침’), “흰돌 검은돌 흰돌 검은돌/ 흰돌 흰돌 흰돌 검은돌 검은돌 검은돌 (…) 명백함에 대한 명백함은 명백함의 명백함을 넘어서지 않는다”(‘사몽의 숲으로’), “들판은 들판 너머에 있었다/ 언제나 거의 언제나 처음처럼/ 들판 너머 들판 들판 너머 들판”(‘처음의 들판’), “완두는 싫다 싫어요/ 완두는 완두 완두하고 울기 때문에”(‘완고한 완두콩’), “피로와 파도와 피로와 파도와/ 물결과 물결과 물결과 물결과” 등의 방식으로 말이다. 이것은 흡사 “소리 내 말하지 못한 문장을 공책에 백 번 적”(‘피로와 파도와’)는 것 혹은 “차마 소리 내 말하지 못하고 노트에 적었던 문장”(‘녹색 정원 금발령’)을 반복하는 것이기도 하다.

확장되지도 축소되지도 않는 영원한 원환의 세계에 갇힌 언어는 그 속에서 절단되고 흩어지며 한없이 분산된다. 시인의 말은 “끊임없이 끊임없이 계속해서 계속해서” 발화되지만 그럼에도 “튕길 듯한 용수철의 탄성”으로 “떠나온 자리를 매 순간 들여다”(‘요롱이는 말한다’)본다. 하늘 위로 올라가지 못한 채 신전의 기둥머리에 갇힌 시인의 언어는 머리 위 하늘을 바라보며 끝없이 뱅뱅 돌고 있을 뿐이다. 그 기저(基底)에서 시인은 사라지는 찰나의 순간을 기록해 간다. 마치 나라가 어지러웠던 시대의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했던 한 시인처럼 말이다.



3. 헤매는 것들의 세계



“꽃이 있던 자리에는 무성한 녹색의 잎”이 돋아나고, “녹색의 잎이 사라지면” 그 자리에 “녹색의 빈 가지가” 남게 된다(‘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혹독한 겨울을 지내고 봄이 오면 또다시 “빈 가지”에는 초록의 새순이 돋아나기 시작할 것이다. 이처럼 자연은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지시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순환한다. 이제니 시에서 발현되는 의미 없는(혹은 있다고 가정되는) 기표의 반복 또한 마찬가지이다. 기표는 반복적으로 순환하는 가운데 그 내부에서 나름의 체계를 만들어 낸다. 표면적으로 이것은 질서 정연한 자연의 순환 운동을 떠올리게 하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카오스의 상태로 돌아가 최초의 질서를 무화시키려는 시도를 품고 있다. 즉 이제니 시에 드러나는 기표의 순환 혹은 반복은, 자연의 규칙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는 그녀만의 형식-의지인 셈이다.

인간은 유한한 삶이 주는 근원적 불안감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삶을 꿈꾼다. 그러나 주체의 의지에 따라 선택된 삶이 아니라 신(神)에 의해 주어진 질서를 견디며 감당해내는 삶의 논리도 있다. 여기서 내세에서의 삶이 현재의 삶을 넘어설 수 있다는 희망이 깜박이는 섬광처럼 파생된다. 하지만 그것이 섬광인 까닭은, 삶에 대한 희원이 잡힐 듯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불가에서도 윤회 개념을 통해 전생의 업으로 인한 고통을 현세에서 인고하며 살아야 내세를 기약할 수 있다는 논리를 들려준다. 고통이야말로 해탈의 동인(動因)이자 깨달음을 향한 여정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무언가와 닿을 듯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함으로써 생성되는-그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간극은 이제니 시 전반에 걸쳐 발견된다. 그러나 이러한 반복-카오스의 세계는 코스모스로 나아갈 수 있다는 주체의 인식론적 오인(誤認)을 내포하고 있기에 끝내 패배할 수밖에 없고 필연적으로 잔여를 발생시킬 수밖에 없다. 이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에 나오는 ‘남근 은유’에 관한 두 가지 독해 사이에서 발생하는 변증법적 역설과 궤를 같이한다. 이에 대해 지제크는 수정하는 기관과 방뇨하는 기관이라는 두 가지 의미 중에서 진정한 의미를 직접적으로 선택할 수 없기에 우리는 언제나 틀린 선택으로 시작해야만 한다고 언급한다. 요컨대 오직 반복되는 독해에 의해서만, 처음의 틀린 독해는 여파(또는 부산물)로서 진정한 사변적 의미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곳은 멀지 않았다. 한낮인데도 별자리의 그림자가 수풀 여기저기를 검게 물들였다. 나무그늘은 그저 움직일 뿐이었다. 바람을 따라 흐르듯이, 구름을 따라 번지듯이.// 굴러가는 것, 기어가는 것,/ 엎드려 있는 것, 절룩이는 것,/ 헤매는 것들의 세계가 돌연 보였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심장의 흑점 한켠에.// 고요 속에서 작은 것들이 말하고 있었습니다. // 너의 시간과 나의 시간은 다르다./ 너의 색깔과 나의 색깔은 다르다.// 환청과 색맹의 날들이 소리 없이 흐를 때// 녹색의 입구/ 끝없는 녹색의 입구// 녹색의 내부의 내부의 내부가 / 녹색의 내부의 내부의 내부의 외부가/ 내부의 외부의 내부의 외부의 내부가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머리카락이 자라나듯이, 너의 암흑이, 너의 검정이, 너의 하양이, 흑백의 밝고도 어두운 광선이. 흑백은 깨어 있지 않았다. 흑백은 누구도 깨우지 않는다. 흑백은 그저 간신히 그 자신만을 깨울 수 있을 뿐이다.// 물결은 어디에서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물결은 무한증식하는 액체의 메아리. 땅끝으로 밀려와서 하얗게 토해진 백지의 울음.// 아무것도 조직하지 않을 것이며 아무것도 통제하지 않으리라. 매 순간 모양을 바꾸는 구름이 말했습니다. 바람은 조언하거나 참견하지 않는다. 바람은 아무것도 돕지 않는다. 의지 없이, 의식 없이, 그 모든 것들을 돕는다. 여기에서 저기로 꽃가루들이 날린다. 검은 비닐봉지가 날아간다.(…)-‘나무 구름 바람’ 부분



“별자리의 그림자”처럼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던 이제니 시의 언어는 “바람을 따라 흐르”고 “구름을 따라 번”지며 “굴러가”고 “기어가”며 “엎드”렸다가 “절룩”이기도 한다. 반복되는 말의 유영은 “헤매는 것들의 세계”를 이루게 되는데, “그곳”은-아마도 화자가 있는 곳으로부터-“멀지 않”으며, “한낮”임에도 “별자리의 그림자가 수풀을 검게 물들”이는 곳이다. 또한 “고요 속에서 작은 것들이 말하는” 세계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너와 나의 시간”은 다르게 흐르고, “색깔” 또한 같지 않다. 서로 다른 “시간”과 “색깔”을 가진 존재는 만나지 못하고 주위를 맴돌 뿐이다. 여기에 “환청과 색맹의 날들이 소리 없이” 흐르고 있어 붉은색과 구별될 수 없는 “녹색”은 끝없이 펼쳐지며 “헤매는 것들의 세계”에서 나갈 수 있는 “녹색의 입구”를 은폐해버린다.

각기 다른 “머리카락”의 길이처럼, 서로 다르게 지니고 있는-네가 ‘흑’이면 나는 ‘백’이 되듯-우리의 “색깔”은 “누구도 깨우지 않”는다. 그저 “자신만을 깨울 수 있을 뿐”이다. 주체와 타자 서로 다른 존재들이 헤매며 만들어 내는 파동은 “물결”이 되어 시작지점도 도착지점도 알지 못한 채 흐를 뿐이다. 이 “물결”은 “무한증식하는 액체의 메아리”이며 “땅끝으로 밀려와서 하얗게 토해진 백지의 울음”과도 같은 것이다. “아무것도 조직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통제하지 않”는 세계 안에서 바람은 “조언하거나 참견하지” 않는 대신 무의식적으로 헤매는 “그 모든 것들”을 돕는다. 이때 “물결”은 “춤추는 자에게는 흔들리고, 분노하는 자에게는 흩어”지면서 “감정”을 “들끓”지 않게 만든다. 마치 “구름의 바람은 나무가 되는 것”이며 “나무의 바람은 구름이 되”듯 그저 세계 안에서 빙빙 돌며 부유할 뿐이다.

이 작고 넓은 “헤매는 것들의 세계”는 이제니 시에서 되풀이되어 등장하는 움직임과 연결된다. 그것은 닿을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파편적 움직임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나선의 숲”에서 떠도는 언어는 미숙한 운동성으로 인해 만남의 실패를 거듭하며 상처받는다. 따라서 주체는 끝내 분열된 위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불확정성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불안과 그로 인한 슬픔을 따라가 보면 우리는 “고아의 해변”(‘고아의 말’)에 다다르게 된다. 그리고 시인은 ‘고아의 말’에서 그 불투명성을 소거한 채 한층 더 투명해진 말로 내면세계를 전달하려 한다. 부조리한 현실 앞에 놓인, 실재와 조우하게 된 주체는 고향을 잃어버린 “고아”나 다름없다. “고아”는 자신의 곁을 지나치는 수많은 “손” 중에서 진짜 “어미의 손이 내게로 다가오기를” 기대하지만 그것은 “소용없는 말”이 되어버린다. “고아”가 달리는 “고아의 해변”은 “혼자 태어나서 혼자 죽어가는 말이 다시 죽어가는” 바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독자는 시인을 따라, 시인이 발화한 ‘기표/기의’를 따라 “슬픔의 끝”으로 함께 달려가지만,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한층 “더 깊은 슬픔”을 내재한 실패의 세계뿐이다.



이 슬픔을 따라가면 고아의 해변// 늙고 병들고 지친 마음이 내 얼굴을 오히려 더 젊어 보이게 합니다// (…) 결국 어미 없이 혼자 서 있는 말/ 고아의 해변에서 고아의 말을 내뱉으며/ 혼자 울면서, 울면서 혼자 달려가는 말// 나에게 나를 보여주지 마세요/ 거울과 거울과 거울 속에서/ 무엇을 바라봐야 할지 몰라 나는 달렸습니다// (…) 그 많은 손 중에서 어미의 손이 내게로 다가오기를/ 내 손이 어미의 손에게로 가닿기를/ 소용없는 말이 고아의 해변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 이곳은 혼자 태어나서 혼자 죽어가는 말이 다시 죽어가는 바다/ 밀려갔다 밀려오는// 다시 태어나는 말이 달립니다/ 빛나고 아름답게, 빛나고 아름답고 쓸쓸하게/ 당신은 고아의 말의 그 단단한 등에 앉아 당신의 몸 위에 덧난 것들이 출렁출렁 흔들리는 진동을 듣고 있습니다// (…) 슬픔을 따라가면 슬픔의 끝이 나옵니다/ 슬픔의 끝을 따라가면 더 깊은 슬픔의 끝으로// 달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바다의 물결이 더 큰 진폭으로 울고 있습니다/ 텅 빈 조개껍데기에서 소리 없는 말들이 흘러나옵니다// 이 말들을 따라가면 다시 고아의 해변으로-‘고아의 말’ 부분



‘고아’는 “헤매는 것들의 세계”를 구성하는 핵심적 일부이다. 더불어 ‘고아의 말’은 목적을 알 수는 없으나 계속해서 그 목적을 진전시켜 나간다. “혼자 울면서, 울면서” “고아의 해변”을 달려가는 불안한 주체는 “거울과 거울과 거울 속에서 무엇을 바라봐야 할지 몰라” 무작정 달리기만 한다. 이러한 자기 소외와 균열의 단계를 거쳐서 주체는 “늙고 병들고 지”친 상태로 “깊은 고독”에 잠긴다. ‘고아의 말’은 혼자 태어나서 죽어가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흡사 “텅 빈 조개껍데기에서 소리 없는 말들이 흘러나”오고 “이 말들을 따라가면 다시 고아의 해변으로” 도착하듯이 말이다. 말의 운동성 또한 사뭇 맹목적이고 강박적이다. 끝없이 요동치는 언어의 운동성은 이제 “소리 없는 구슬”의 “추락”으로 변모되어 “점점 더 빠른 속도로” 흐르기 시작한다. “소리 없는 구슬 속에 도사린 어둠”은 “수천수만으로 분열되어 빛의 분수처럼 터져나가며 다시 최초의 어둠으로 태어난”다. 마치 무한자의 목적을 발현하는 것-“잿빛을 향해 나아가는 잿빛”처럼 “최초의 어둠”의 밀도는 깊어져 간다.

이러한 상황은 ‘나선의 감각- 물의 호흡을 향해’에서도 비슷하게 진행된다. 이 시에서 주체는 “심해의 어원을 찾아 깊이 떠”돌며 “~라고 하자”(“다가가는 만큼 멀어지는 물결이 있다라고 하자 멀어진 만큼 멸절된 시간이 있다라고 하자 멸절된 시간만큼 돌이킬 수 없는 간절함이 있다라고 하자”)는 청유형 종결을 통해 대상에게 복원될 수 없는 혹은 돌이킬 수 없는 무엇인가를 요청하고 있다. 하지만 이 헤매는 것들의 세계에서 “물결”은 “다가가는 만큼 멀어지”고, “시간”은 “멀어진 만큼 멸절”되며, “간절함”은 “멸절된 시간만큼 돌이킬 수 없”다. 이는 언어의 불협화음 안에 내재된 최초의 목적과 현상의 불일치를 확인하는 것으로, 자기 분열의 시작이기도 하다. 바로 “그곳”에서 “너의 얼굴이 지워져”가기 때문이다.



4. 세계의 끝에서 마주하는 깨달음



그 꿈에서 나는 작고 검은 것이었다. 희고 소리 나는 것이었다. 작고 검은 소음. 혹은 희고 둥근 침묵. 꿈속에서의 내 얼굴은 분명하지 않았다. 꿈 밖에서와 마찬가지로. 너는 자꾸만 돌아오고 있었다. 너는 내게로 자꾸만 돌아오고 있었다.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지만 나는 너를 피부처럼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숲 속에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 우리는 숲길을 걸어간다. 청색과 홍색. 혹은 흑색과 자색 실이 드리워진 나무들을 스쳐 지나가면서. 흩날리며 흔들리는 것은 슬프군요. 세계의 끝이 넘실거리고 있군요. (…) 하지만 무의식이 꿈의 단면에 끌칼로 새겨 넣은 그 깊은 자상을 해독하기엔 나의 문장은 어눌하기 그지없었고. 우리는 걸어간다. 나란히 걸어간다. (…) 숲은 끝없이 멀어지고. 끝없이 이어지고. 나는 이 소실점의 거리를 너무나도 오래도록 보아왔으며. 앞으로도. 내내. 영원토록. 이 길을 걸어가리라는 예감에 사로잡혔고. 그것은 슬픔과도 유사한 감정이었고. (…) 역양. 생의 비밀이란 보란 듯이 활짝 펼쳐져 있는 책처럼 단순하고도 선명하게 이미 드러나 있었음을.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그 믿음들 사이의 균열을. 그 틈새들 속에서 흘러넘치는 물방울의 표면을 읽어 내려가는 것. (…) 꿈속에서 꿈 밖으로 걸어 나왔고. 깨어나 책상으로 가 앉았고. (…) 꿈속에서처럼 페이지는 비어 있었고.-‘나선의 감각-역양’ 부분



꿈속에서 “나”는 “작고 검은 것”으로 등장한다. 중요한 것은 “내 얼굴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희고 소리 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작고 검은 소음. 혹은 희고 둥근 침묵”이 될 수도 있다. 이는 최초의 언어 즉 “단순해지고 조직적이 되기 이전의 최초의 목소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작고 검은 것”의 얼굴은 부정확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언어가 무질서한 미지의 세계였을 때 그것은 몸짓이나 손짓, 표정, 시선, 자세나 사물 혹은 음악 그 자체였을 것이다. 또한 꿈속에서 “나”는 마치 한 몸인 듯 “피부처럼 느”낄 수 있는 “너”를 만나 “우리”가 된다. 이를 이 시의 부제인 ‘역양’의 의미를 통해 파악해 본다면, 한 사람이 한꺼번에 두 가지 역할을 맡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여기서 두 가지 역할이란 “나”가 “나”뿐만 아니라 “너”의 역할까지 맡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의 역할이란 단순히 “나”와 대립되는 존재로서의 “너”일 수도 있지만, “은과 놋으로 예물을 드리는 자들”을 기다리는 자-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중개자-일 수도 있다.

이는 성경 출애굽기 35장 24절(“무릇 은과 놋으로 예물을 삼는 자는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며 무릇 섬기는 일에 소용되는 조각목이 있는 자는 가져왔으며”)을 통해 그 의미가 이해될 수 있다. 출애굽기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는 서사가 담긴 책이다. 특별히 35장에는 “엿새 동안은 일하고 제 칠일은 성일이며 여호와의 안식일이니 이날에 일하는 자를 죽”인다는 안식일 규례를 알리는 모세의 말과 이스라엘 민족이 안식일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 여호와께 예물을 준비하여 드리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위의 시편에서 “우리” 또한 “은과 놋으로 예물을 드리는 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숲을 걸어가며 “말을 주고 받”으며 숲을 관찰한다. 이때 “너”는 “나”에게 숲의 “무한함 속에서” 나뭇가지가 “무질서하게 뻗어 나가”는 가운데 “더할 수 없는 자연의 경이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 예언처럼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우연이 만들어 내는 무분별한 아름다움”을 꿈꾸며 숲길의 끝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나뭇가지 사이로 젖은 책들이 널려 있는 단단한 집”이자 “세계의 끝”이다. 그곳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격자의 세계”이자 “오래된 새로운 세계”이다. 그러나 “나의 문장”은 “무의식이 꿈의 단면에 끌칼로 새겨 넣은 그 깊은 자상을 해독하기에”는 너무 “어눌하기” 때문에 그저 앞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계속해서 아직 오지 않은 “은과 놋으로 예물을 드리러 오는 자들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예물을 드리러 온다는 자들”이 오지 않은 채로 “나”는 꿈에서 깨어 “그 작고 검은 것에 대해 말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생각조차도 꿈속의 일부였을 뿐이다. “나”는 계속해서 “꿈속의 꿈속에 놓여 있”다. 이처럼 이제니 시의 언어는 “입구도 출구도 없는 공간 속에서 회전”하고 “끝없이 모양을 바꾸”거나(‘나선의 감각-목소리의 여행’), “길 끝에 서 있”는 주체가 “자신의 가장 밑바닥에 도착하”기 위해 “환각을 따라 망각하듯이 망각을 하듯 환각을 따라” 꿈속 꿈으로 들어가는 형식을 취한다(‘수풀로 이파리로’). 끝없이 “순백의 눈밭 위를 검은 열차가” 같은 자리를 빙빙 도는 것처럼 주체는 “세계의 끝에 다다라서야” 계속해서 자신이 “소멸 직전의 거리를 걷”게 되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고양이는 고양이를 따른다’). “저기 저 소실점 너머로 사라지는 나무들처럼” 말이다.

여기서 “우리”였던 “나”와 “너”는 분리되기 시작한다. “너”는 “거리의 저 끝에서 눈물처럼 번지듯 은빛으로 서서히 사라”지고, “나”는 “작고 검은 글씨처럼 혹은 희고 둥근 음표처럼” 시원의 모습에서 조금씩 나아간다. “그때. 나뭇가지 위의 무수한 책들 중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펼쳐진 페이지에서 “어떤 낱말 하나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역양”이라는 “익숙하고도 낯선 낱말”이다. 그리고 주체는 자신에게 본래 두 가지 임무가 주어졌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깨달음의 순간, “우리”가 기다리던 “은과 놋을 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우리”가 “나”와 “너”로 분리되자마자 그토록 기다리던-신에게 제사를 드릴 예물을 준비하는-그들이 온 것이다. 끝없이 돌고 돌아 도착한 숲에서 주체가 깨달은 것은 “생”이란 “보란 듯이 활짝 펼쳐져 있는 책처럼 단순하고도 선명하게 이미 드러나 있”다는 믿음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그 믿음들 사이의 균열”과 “틈새들 속에서 흘러넘치는 물방울의 표면을 읽어 내려가는 것”이야말로 시인이 쓰고자 하는 “단 한 줄의 문장”이었을 것이다. 결국 이 시는 ‘생의 비밀’이자 ‘최초의 언어’에 관한 서사인 것이다.

이제니의 ‘나선의 감각’ 연작 중 두 편(‘공작의 빛’ ‘역양’)에서 연달아 등장하는 소재는 ‘꿈’이다. 아리스토텔레스(‘꿈에 관하여’)에서 프로이트(‘꿈의 해석’)까지 인간은 꿈을 단순히 수면 중 일어나는 현상의 하나로 치부하지 않고 어떤 일의 “기미와 전조”(‘나선의 감각-공작의 빛’)로 기록하거나 분석해왔다. 중세 이전까지만 해도 꿈은 인간의 앞날을 알려주는 신적 계시 정도로 기능했다. 근대에 이르러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이론을 실증적으로 제시하자 꿈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프로이트는 이전까지는 눈여겨보지 않았던 인간이 꿈을 꾸고 있을 때 나타나는 영상들-정신 현상이 그 나름의 질서 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그것이 반복적이고 규칙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에 주목하여 그 의미를 파악하고자 했다.

무의식이 어떻게 의식화되어 드러나는가가 프로이트가 제기했던 문제의 핵심이자 본질이었다면, 라캉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계승하면서 그가 제기했던 ‘원초적 억압’을 받아들인다. 라캉에 따르면 ‘원초적 억압’-언어야말로 인류 ‘최초의 억압’이자 ‘사회화, 상징화’가 되는 밑바탕이다. 이것은 부모와의 접촉을 통해 주로 이루어지는데, 이때 인간은 사회화 이전의 낙원의 세계에 남아 있을 것인지 낙원을 떠나 부모의 강제된 선택을 받아들일 것인지를 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된다. 여기서 후자를 받아들이게끔 억압하는 것이 바로 ‘강요된 선택’인데, 라캉은 이때 억압된 것이 돌아와 우리의 무의식을 형성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무의식은 꿈속에서 검열자를 피하기 위해 ‘은유와 환유’(이는 앞서 프로이트에서 ‘압축과 치환’으로 설명된다)로 이미지를 변형시키며 의식계로의 진입을 시도하는 것이다.

요컨대 이제니 시세계에서 주체의 억압된 무의식은 의미 없는 기표들의 놀이 혹은 무의미한 나선형의 파동으로 집중 발현된다. 이것은 형식적 포섭 이후의 일어날 의미화의 예비라 볼 수 있다. 왜냐하면-기표들의 소용돌이를 이미지로 보여준다거나 ‘나선의 감각’ 연작의 후반부에서처럼-꿈이 등장하는 형식을 통해 주체의 무의식을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의미한 반복처럼 보이는 이러한 형식은 후에 주체로 하여금 “생의 비밀”과 소망-욕망을 발견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우리”는 헤매는 것들의 세계를 거쳐 “세상의 끝”이라는 이름 모를 숲에서 세상의 진리에 접근했음에도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일 뿐이다. 꿈속에서 깨어났지만 “꿈속에서처럼” 현실의 “페이지”는 항상 “비어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대상의 의미는 찰나의 순간 속에서 사라진다. 이것은 꿈속의 “빈 페이지”처럼 ‘없음(無)’을 가리키는 표지(標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것은 비극적 결말이 아닌가. 단순히 세계가 결국 파국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시인의 언어는 돌고 돌았던 것일까. 사태의 비극성을 말하기 위해 기표의 의미 없는 공회전-형식적 빈껍데기를 빌려왔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만물은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세계의 끝-진리이며, 불가해한 것은 불가해한 채로 남겨두어야 한다는 결론은 지나치게 무책임해 보인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잿빛” 세상이 “우리의 끝”(‘이것이 우리의 끝은 아니야’)이 될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그 비관론을 훌쩍 뛰어넘는다. 우리의 “마음은 원래 비어 있는 것”이며, “끝”이란 “곧 시작”이기 때문이다(‘모르는 사람 모르게’).



5. 이것이 우리의 끝은 아니야



이제니에 의하면 “중요한 것은 절대적인 하나의 진리가 아니라 서로 모순되는 수많은 상대적인 진리”(‘모르는 사람 모르게’)이다. 같은 대상이라 하더라도 시차에 따라 그 모습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진리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한편으로는 공허한 실체를 드러내지만 한편으로는 의미 있는 지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한 이치를 해묵은 것으로 단정하는 이들에게 이제니는 비어 있는 형식적 진리로 다가간다. 하지만 보편적 진리일수록 그 묘체에 다가가기 위해 숨을 골라야 한다. 현상계에서 고정 불변하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 자신까지도 말이다.

우리가 잘 알 듯이, 산업화와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속도’의 개념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속도가 어느새 우리의 삶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동의 없이 우리를 그 속도에 동참시켰다. 이제 문명의 속도는 절대적 기준이 되어 그것에서 도태된 사람은 열등한 존재로 분류되기 시작하였다. 사회에서 열등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쓸모없는 인간-삶이라는 뜻으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속도의 시류에 맞추어 승리한 이들조차 지금은, “우리”가 꿈꾸던 세계에 다다른 것일까. 흐름에 동참하지 못한 자들이 이루는 세계는 정말 “실패한 세계”였던 것일까. 이제니 시의 문제의식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세기말이 지나고 새로운 시대가 펼쳐진 이후, ‘미래파’ ‘새로운 서정’ ‘뉴웨이브’ 등으로 다양하게 호명되던 젊은 시들은 날것의 언어로 자신들이 살아 있음을 증명했다. 1인칭 시점의 고백시가 주를 이루었던 서정시의 위기 이후 한국 시의 빈자리에는 절단되고 분해되어버린 환영의 주체와 기묘한 미적 감각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요컨대 21세기 젊은 시인들이 보여주었던 자기만의 퇴행이나 탈주 방식은 그야말로 ‘자기 안으로의 철회’를 통해 서정의 위기를 돌파하려 했던 것이라 이해될 수 있다. 그렇게 그들의 시가 파괴된 질서 위에서 새롭게 기묘한 형식과 나르시시즘적 감각을 만들어 갔다면, 이제니는 그 안에서 헤매는 것들의 세계를 그리면서 자신만의 시적 사유를 형성해 왔다. 특히 등단 시점이었던 2008년은 새로운 흐름과 정치적 담론이 맞물리던 시기였기에, 더욱 다양한 목소리들이 혼재되어 등장한 때이기도 한데, 이때부터 이제니의 몫은 더 커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살아있는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다 완전하고 아름답”(‘모르는 사람 모르게’)다는 시인의 말은 결코 가볍지 않다. 어떤 이에게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겠지만, 어떤 이에게는 ‘아무에게도 듣지 못한 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시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헤매는 것들의 세계는 희망보다 절망에 가까운 슬픔의 정서를 드러낸다. 그러나 이 비극과도 같은 ‘잿빛’의 세계를 조금 다른 방향에서 바라본다면 어떨까. 어쩌면 우리는 이 무기력한 세계에서 ‘최후’가 아닌 ‘최초’를 감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면, 그것을 동인 삼아 계속 걸어가면 된다. 비록 “헤매다가 죽게 될지라도” 우리는 “어둠 속에서 어둠을 향해”(‘모르는 사람 모르게’) 나아가야 한다. 어둠이 걷히고 나면 새벽어둠이, 새벽어둠이 지나면 새날이 밝아올 테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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