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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명작의 공간 게재 일자 : 2017년 01월 06일(金)
짝사랑을 잃고 詩를 얻었네… 천재시인의 높고 쓸쓸한 바다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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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뛰어난 예술가들을 낳은 남해안의 항구도시 통영. 이곳은 북방의 시인 백석이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열렬했으나 이루지 못한 사랑 박경련을 만나기 위해 세 번이나 찾았던 슬픔의 공간이기도 하다. 박경일 기자 parking@

(61) 백석의 詩 ‘통영’의 배경… 경남 통영

시인 유치환과 김춘수, 소설가 박경리, 음악가 윤이상, 화가 전혁림 등 뛰어난 예술가들을 낳은 남해안 항구도시 통영, 이곳은 북방의 시인 백석의 애틋한 사랑과 슬픔이 서린 공간이기도 하다.

백석은 1936년 새해가 밝은 지 1주일여 만에 남행길에 오른다. 잘생기고 말수가 적고 분위기 있는, 그러면서 영어와 러시아어에 능한 데다 시까지 잘 쓰는 관서 출신 모던보이 백석, 그의 통영 방문은 그 전해 여름에 이어 두 번째이다. 남해안 취재 여행을 핑계로 같은 신문사 동료이자 통영 출신인 신현중과 동행한 이 남행길은 훗날 문학사에 큰 획을 긋게 되는 그의 유일한 시집 ‘사슴’의 발간을 열흘 남짓 앞둔 때이기도 하다.

교통여건이 지금과는 크게 달랐을 당시 통영에 가기 위해서는 경성역에서 경부선 열차를 타고 부산에 못 미쳐서 밀양의 삼랑진역에서 내려 마산선으로 갈아타야 했다. 삼랑진에서 낙동강, 유림정, 진영, 덕산, 창원을 거쳐 마산에 이르는 100여 리를 달려온 다음 구마산 포구 근처에서 하룻밤을 묵고 나서 다시 반나절 정도 배를 타야 도착할 수 있는 통영. 그 먼 남행길에 오른 그의 마음은 마냥 들떠 있다.

봄날 같은 햇살이 비쳐드는 마산행 열차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창원 도로는 따뜻하고 여유로 가득하다. 시 ‘창원도’는 엎드려서 따스하니 손 녹이고 싶은 길이라고 말한다. 봄의 초입에 있는 듯한 이 길은 개를 데리고 휘파람 불며 시름 놓고 가고 싶고, 나그네는 괴나리봇짐을 벗어놓고 땅불을 놓고 앉아서 담배 한 대 피우며 잠시 쉬어 가고 싶은 곳이다. 심지어 성질 사나운 승냥이마저 줄레줄레 달고 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정겹고 화해롭기 그지없는 길이다. 시인은 이 길에서 자신을 떠꺼머리총각에 투사시켜 “정든 님 업고 오고 싶”은, 그래서 새 삶을 시작하고 싶은 희망의 여정임을 감추지 않는다.

이 같은 설렘은 북쪽 관서 출신의 시인 앞에 잇따라 펼쳐지는 낯설고 신기한 남쪽의 따사로운 풍경과 때 이르게 느끼는 봄기운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다. 그가 가장 사랑한, 그래서 ‘난(蘭)’이라 불렀던 여인 박경련을 만나기 위해 통영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백석은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열렬했으나 일방적이었고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뜻밖의 반전까지 있는 박경련과의 사랑을 위해 통영을 세 번 찾는다. 그리고 ‘통영’이라는 제목의 시를 3편이나 남겼다. 이 작품을 제외하고는 같은 제목의 작품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통영은 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임이 분명하다. 어쩌면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의 삶을 살다간 그의 삶의 단초를 담고 있는 곳이 통영일는지도 모른다.

▲  통영에 있는 백석의 시비 ‘통영2’
백석의 첫 통영 방문은 1935년 6월경이다. 가늘게 실비가 내리는 6월 어느 날, 백석은 가장 친한 친구인 소설가 허준의 결혼식 피로연이 열린 낙원동 여관에서 이화고녀에 다니는 통영 출신 18세의 박경련을 보고 한눈에 반한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갸름한 얼굴에 키가 호리낭창한, 그리고 가끔 수줍게 웃음을 비치는 박경련에게 반한 백석은 결혼식 직후 허준의 통영행 신행길에 허준의 손위 처남이자 신문사 동료인 신현중과 함께 따라나선 것이다.

가장 먼저 발표한 ‘통영’(조광·1935년 12월)은 스산하고 우수 어린 정조에 비극적 사랑이 예감되는 한 여인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담고 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수군통제사 병영을 두었던 낡은 항구 통영에는 그 모습처럼 예스러운 천희(千姬)라는 이름을 가진 처녀들이 많은데 그녀들은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헌신적인 사랑의 소유자들이다. 백석은 그런 처녀인 천희 하나를 어느 오랜 객줏집의 생선 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는데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고 우수와 비애의 정조로 술회함으로써 이 운명적인 사랑의 비극적 결말을 예감하는 듯하다.

1936년 1월 초 두 번째 통영 방문 길에 오른 백석은 목전에 둔 첫 시집 상재와 함께 자신의 사랑 또한 무언가 열매를 맺고 싶었는지 모른다. 두 번째 ‘통영’(조선일보·1936년 1월 23일)은 이국적인 남쪽 바닷가의 문물을 접하는 신기함과 설렘 위에 한 여인에 대한 연정을 겹쳐놓고 있다. 구마산 선창에서 물길로 반나절 걸려 통영에 도착한 그는 이 갓(冠) 나는 고장은 갓의 모양 같이 보이기도 하고 전복, 해삼, 도미 등 특산물이 좋은 곳이며 새벽녘의 거리는 북이 ‘쾅쾅’ 울고 바다에서는 밤새 배가 ‘뿡뿡’ 우는, 그래서 자다가도 바다로 달려가고 싶은 흥성하고 역동적인 항구라고 기록한다. 풍요롭고 여유가 흐르는 이곳은 집집마다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고, 잡화 파는 황화장수 영감 같은 이도 곧잘 일본말을 하며, 처녀들은 하나같이 어장주에게 시집을 가고 싶어 한다. 북방 출신 시인의 눈에 비친 남쪽 항구의 흥겹고 넉넉한 모습은 가슴에 품은 여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기에 더욱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통영 풍경에 이어서 시인은 슬그머니 ‘난’에 대한 연정을 드러낸다. “난이라는 이는 명정골에 산다든데/ 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라면서 한편으로는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라고 불길한 느낌을 내비친다. 그러고는 느닷없이 자신을 대신하는 듯한 ‘평안도에서 오신 여인’을 등장시키며 “동백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라며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백석은 ‘난’이, 즉 박경련을 만나지 못한다. 그 대신 명정골에서 가까운 ‘옛 장수 모신 낡은 사당’ 충렬사 돌계단에 쭈그리고 앉아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여가며/ 영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하며 실망감을 달래야 했던 것이다. 신기하고 풍성한 풍경이 빚어내는 희망과 들뜬 마음으로 시작해 연정이 비켜가는 쓸쓸하고 안타까운 정서로 맺어지면서 통영은 백석에게 애틋하고 특별한 공간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 ‘통영’(조선일보·1936년 3월 3일)은 흥겨운 어조로 빠르고 경쾌하고 간결하게 그려진다. 4편의 남행시초 연작 중 두 번째에 놓인 이 시의 말미에는 ‘서병직 씨에게’라고 부기되어 있는데 이는 만나고자 했던 박경련은 만나지 못하고 그녀를 대신한 외사촌 서병직으로부터 후한 대접만 받고 돌아온 데 대한 헌사로 보인다. 이 시는 아무런 설명 없이 화자가 통영장에 내달아 들어간 것으로 시작한다. 물산이 풍성한 통영장에서 거침없이 특산물인 갓 한 닢, 별미인 건시 한 접, 홍공단 한 감을 사고 술도 한 병 받아들고 화륜선을 보려 선창으로 내닫는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주막 앞에서 문둥이의 품바타령을 듣다가 날이 어두워져 가는 저녁을 맞는다. 어두움 위로는 막 보름을 지나서 아직은 밝고 정취가 있는 “열이레 달이 올라서/ 나룻배 타고 판데목 지나간다 간다”고 한다. 끝내 만나지 못한 박경련에 대한 그리움을 나룻배에 올라 통영과 미륵도 사이의 수로 판데목을 지나가는 정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으로 대신하는 것이다.

두 번째 남행은 1주일 동안 마산과 통영, 고성과 삼천포를 둘러보고 진주에서 하룻밤 묵은 뒤 상경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창원도’ ‘통영’ ‘고성가도’ ‘삼천포’ 등 4편의 남행시초 연작에는 운명적인 사랑이 있는 공간을 찾아가는 여정 속에서 만난 사람과 자연과 동물들이 화해롭고 풍요롭게 그리고 따스하고 즐겁게 공존하고 있다.

두 번째 통영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백석은 1월 20일 첫 시집 ‘사슴’을 경성의 성광인쇄주식회사에서 100부 한정판(정가 2원)으로 낸다. 그리고 백석은 ‘여성’ 4월호를 창간호로 낸 뒤 조선일보사를 사직하고 북관 함흥의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부임한다.

그리고 1936년이 저물어가는 어느 날 백석은 친구 허준과 함께 경부선 열차에 몸을 싣고 세 번째 통영 방문길에 나선다. 박경련의 어머니를 찾아 정식 청혼을 하기 위한 이 방문은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끝내 혼인 승낙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만다. 그리고 몇 달 후 백석은 박경련의 결혼 소식을 듣고 크게 낙담한다. 결혼 상대가 다름 아닌 통영에 동행했던 친한 친구이고 당시 약혼자가 있었던 신현중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백석에게 통영은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의 장소로 기억되어 나타난다. 2년이 지난 1938년 10월 ‘조광’에 발표한 ‘물닭의 소리’ 연작 중 ‘남향’에는 “이 길이다/ 얼마 가서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마을 하이얀 회담벽에 옛적본의 장반시계를 걸어놓은 집 홀어미와 사는 물새 같은 외딸의 혼삿말이 아즈랑이같이 낀 곳은”으로 남아있다. 북방 유랑 중에 쓰고 1941년 4월 ‘문장’에 발표한 ‘흰 바람벽이 있어’에는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고 쓸쓸하고 애처로운 영상으로 투영되어 있다.

여러 해 전 필자는 통영을 방문했을 때 ‘난’이 살았다는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물 맑은 샘이 있다는 명정골을 어림하며 내내 지워지지 않는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살다간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닮은 시인과 그가 사랑한 여인을 생각했다. 그리고 동명의 ‘통영’이라는 시를 썼다. “비에 젖은 포구가 보이는/ 수루 앞 계단에 앉아/ 한 여인이 그리워/ 낡은 항구를 세 번 다녀간/ 자작나무를 닮은 사내를 떠올린다/ 가난했으나 어질고/ 외로웠으나 높고/ 쓸쓸했으나 다정했을 그가/ 사면이 바다인/ 섬을 닮은 남쪽 항구에서/ 그리워한 여인//(…)/ 그가 끝내 만나지 못한 천희를/ 오늘 내가 그리워하며/ 붉은 갈색 열매 드리운 이깔나무 아래/ 물 맑은 샘이 있다는 마을을 어름하며/ 지워지지 않는 젖은 얼굴을 닦는다//갈매나무를 닮은 그 사람”

곽효환

대산문화재단 상무·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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