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반기문이 버릴 것과 채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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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민 정치부장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 12일 귀국과 동시에 대선 레이스에 뛰어든 이후 12일째를 맞았다. 정상적 대선 상황이라면 대단히 짧은 기간이지만, 10년 공백을 단기간에 메워야 하는 반 전 총장에게는 하루가 아쉬운 상황이다. 그런데 돌풍은커녕 지지율은 답보 상태고 소소한 돌부리에 걸려 뒤뚱거리고 있다. 장외에 머무를 때도 지지율 1위를 기록하던 반 전 총장의 이 같은 부진은 그가 시대정신과 자신의 정체성, 그리고 자신의 정치적 한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 전 총장은 귀국 일성으로 ‘국민대통합’과 ‘정치교체’를 주장했다. 이어 보수와 진보, 호남과 영남, 여와 야, 청년과 중장년을 오가는 광폭 행보를 시작했다. 이번 대선의 시대정신이 지역주의에 뿌리 박은 거대 양당의 적대적 의존 체제, 비전이나 정책 경쟁이 필요 없는 정치 독과점 체제, 특정 정치인이나 진영에 매몰된 패권정치 등을 심판하는 것임을 감안하면 자연스러운 일정이다. 그러나 반 전 총장의 행보를 지켜보는 국민의 반응은 냉담에 가까웠다. 심지어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가 있는 봉하마을 등 일부 지역에서는 반 전 총장을 비판하는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국민은 반 전 총장을 여야 기득권 정당을 대체할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간주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18대 대선 당시 정치신인 ‘안철수’는 정치공학적으로 야권 성향의 후보였지만 보수와 진보, 여야를 넘나드는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안철수 현상’이 ‘후보 안철수’로 현실화되면서 ‘새로운 정치의 대안’으로서 한계를 드러냈다. 그 학습효과는 반 전 총장에게 적용됐다. 더구나 반 전 총장은 처음부터 몰락의 길로 들어서 변변한 후보가 없는 ‘보수 여권 진영의 대안’ 이미지가 짙었다. 반 전 총장은 본인의 기대와 달리 보수와 진보, 여와 야를 초월해 국민대통합과 정치교체를 이룰 기대주라기보다는 문재인의 유일한 대항마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반 전 총장이 이번 대선 후보로서 갖는 정체성이다.

둘째, 유엔 사무총장으로 재직한 10년간의 공백이다. 반 전 총장은 구태정치에 대한 책임도 없지만 동시에 구태정치에 대한 고민도 상대적으로 작을 수밖에 없다. 정치는 정치인 혼자가 아니라 다수의 대중과 함께 하는 것이다. 정치개혁을 위해서는 자신의 구상과 실행계획을 대중에게 제시하고 피드백을 받는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반 전 총장은 유엔 사무총장이란 경륜과 ‘브랜드 파워’가 자신의 이 같은 정치적 약점을 보완해줄 것으로 기대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화려한 프로필은 존경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어도 공감과 소통의 기대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것이 반 전 총장이 정치세력 부재, 지역 기반 부재와 함께 감내해야 할 제3 후보의 한계다.

그러나 이제 시작이다. 그가 이번 주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하려는 제3 지대 빅텐트 구상이 그것이다. 대선을 앞두고 보수와 중도 진영은 대대적인 개혁과 개편이 절실한 실정이다. 특히 친박(친박근혜)·친문(친문재인) 패권주의에 대한 비판과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으로 차기 정권은 특정 정파나 세력이 독식하는 구조에서 탈피해 다양한 세력이 공동으로 구성·운영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다. 보수·중도 진영에서 압도적 지지율을 보이는 동시에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뛰어난 조정 역할을 해온 반 전 총장이 ‘빅텐트’ 구상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가능성이 크다. 이해관계가 사사건건 부딪치는 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이사국(P5) 사이에서 합의를 이뤄낸 경험이 큰 자산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 반 전 총장은 우선, 지지율 선두라는 기득권을 포기하고 권력을 합리적으로 분배하고 효율적으로 협력하는 룰을 만드는 데 앞장서야 한다. 이원집정부제든 연립정부든 상관없이 외교, 정치, 경제, 사회 등의 주요 분야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국정을 이끌어간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둘째, 과거의 패러다임을 뛰어넘어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국민은 과거를 심판하기보다 미래를 이끌 지도자를 선택하기를 원한다. 셋째, 정치권의 특권을 과감하게 내려놓고 새로운 정치를 제도화할 수 있는 광범위하고도 철저한 정치개혁 프로그램을 제시해야 한다. 조기 대선으로 마음이 급하겠지만 미래를 지향하는 혁신하는 보수의 후보가 되기에 아직 충분한 시간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