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와 시각>세밑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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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주엽 문화부 선임기자

정유년(丁酉年) 설을 앞둔 세밑이다. 국립국어원에서 예전에 주로 쓰던 세모(歲暮)를 일본식 한자라 하여 세밑으로 순화해 쓰도록 권장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 ‘歲暮’가 수십 차례 등장하는 걸 보면 일본식 조어는 아닌 듯하다. 실록의 세조 13년 12월 29일 기록에 “궐내(闕內)의 여러 관사(官司)가 모여 세모를 숙직하여 지키니, 임금이 주효(酒肴)와 내탕(內帑)을 내려주었다”고 나온다. 임금이 세밑에 숙직을 서는 관리들에게 술·안주와, 나라 예산이 아니라 자신의 사금고에서 금일봉을 내렸다는 것이다. 관리들의 봉록이야 국고에서 나가지만, 임금이 손수 챙겨주는 ‘촌지’는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어 주었다는 게 훈훈하다. 왕조실록에는 세밑과 섣달그믐에 호위병들이 아닌 일반 관리들이 숙직을 섰다는 기록이 자주 등장하는데, 궐내의 관행이 아니었나 싶다. 새해를 맞기 전 세밑의 시간을 ‘깨어서’ 왕실을 지키며 각별하게 보낸 것이다.

민간에서도 세밑은 여유가 있었다. 보릿고개가 한참 남았으니 먹을 것이 풍족했을 터이고, 설 준비로 분주했다. “섣달그믐 날 개밥 퍼 주듯”이라든지, “섣달그믐 날은 부지깽이도 꿈틀거린다”는 속담은 이런 풍족하고 분주한 세밑 풍경을 짐작하게 한다. 어릴 적 섣달그믐에 어른들이 ‘잠들면 눈썹이 센다’고 겁을 줘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며 버티다 잠이 든 경험이 대개 있다. 섣달 중 경신일(庚申日)에 밤을 새우는 중국 도교(道敎) 장생법에서 유래했다고 하지만, 온 식구가 깨어 새해를 맞고자 하는 바람에서 이런 풍속이 이어졌을 것이다. 그믐밤에 방과 마루, 부엌, 다락, 뒷간, 외양간까지 불을 환히 밝히기도 했다. 어둠이 상징하는 낡은 것을 물리치고 밝고 희망찬 아침을 ‘깨어서’ 맞으려 했던 것은 궁궐이나 민간이나 비슷했다.

제야(除夜)도 그런 의미다. 글자 그대로, 새해를 맞기 마지막 밤에 ‘낡은 것을 버린다(除)’는 뜻이다. 왕조실록에 ‘제야’ 역시 자주 나오는데, 이날 밤 궁중에서 불꽃놀이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화희(火戱)라 불렀는데, 이 역시 어둠을 물리치고 새해를 맞으려는 뜻이었다. 실록의 영조 39년 기록에 “세모에 임금이 ‘자성록(自醒錄)을 지어 내렸다”고 나온다. 일반적인 자성록(自省錄)과 달리 ‘깰 성(醒)’을 쓴 게 이런 전통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일본에선 섣달그믐을 오미소카(大晦日)라 부르는데, ‘晦(회)’에는 그믐, 어둠, 어리석음, 시듦 등의 의미가 있다. 이날을 가장 어둠이 크게 드리우는 날로 보았고 ‘종(鐘)’을 울려 이를 물리치는 관습이 있었다. 우리의 ‘제야의 종’도 일제식민지 때 관습이 이어진 것이다. 양력보다는 음력 섣달그믐을 넘겨 설을 맞아야 새해가 온 듯하다. 올 병신년(丙申年)처럼 최고 정치권력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어두운 그림자가 온통 드리웠던 한 해가 있었을까. 그래서인지 올 세밑의 시간은 훈훈함보다는 어느 때보다 썰렁한 느낌이 든다. 병신년 한 해 견디기 힘든 혼돈을 지켜봐야 했던 국민은 정유년에도 쉽지 않은 풍랑을 맞게 될 것이다. 깨어 있다는 것은 단순히 잠을 자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정신을 번쩍 차린다는 의미이다. 올 한 해도 정신을 번쩍 차리고 지켜봐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다. ejye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