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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Her Story 게재 일자 : 2017년 01월 25일(水)
“이만하면 됐어, 이만하면 과분해… 그러고 보면 행복 참 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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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흔이 넘어서야 일상의 새로움을 다시 느낀다는 여성학자 박혜란 이사장은 난생처음 살아보는 내일은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기대된다고 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가수 이적 어머니… 여성학자 박혜란

‘가수 이적의 엄마’로 유명한 여성학자 박혜란(71) 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 이사장이 최근 에세이 ‘오늘, 난생처음 살아 보는 날’(나무를 심는 사람들)을 냈다. 그는 책을 ‘70 먹은 할머니의 다짐’이라고 했다. “말만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난생처음 살아본 날처럼 귀하게 살자, 미워하지 말고, 나쁜 마음 갖지 말고,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그런 인생을 살아보자는 70 먹은 할머니의 다짐”이라는 것이다. 그는 60대까지는 억지로 ‘신중년’에 끼어 넣을 수 있지만 70은 명실공히 ‘노인 인증서’라며 죽음에 가까워진 것을 모르지 않지만 그런 만큼 생애 처음 살아보는 오늘에 대한 기대로 매일 설렌다고 했다.

지난 17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만난 그는 ‘노인 인증서’ 수령자 같지 않았다. 목소리는 카랑카랑했고 에너지는 넘쳤다. 오랫동안 여성 멘토로 활동한 덕분인지 어떤 질문에도 숨김없이 솔직하게, 자신의 단점까지도 웃음과 함께 털어놓으며 쉽게 접근을 허락하는 친근함과 자신감을 보였다. 먼저 여성학자 박혜란보다 이적 엄마로 불리는 것이 어떤지 물었다.

“아들이 박혜란 아들이라면 기분 나쁘겠지만 엄마 입장에서는 ‘누구 엄마’는 좋다. 나쁜 일을 한 이의 엄마가 아니다. 재능있는 가수, 괜찮은 음악을 하는 아들의 엄마라니 좋다. 나는 아들이라는 사실을 떠나 이적 팬이다. 가사를 보면 얘가 내 마음을 썼네라고 생각될 때가 있다. ‘달팽이’나 ‘거위의 꿈’ 같은 건 누구나 느끼는 마음 아닌가. 표현력이 참 좋다. 음악은 잘 모르지만 (이적의) 노래에서 위로받아 울컥할 때도 많다.”

둘째 아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과외 없이 아들 셋을 서울대에 보낸’ 이야기로 이어졌다.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6년간 기자 생활을 하던 그는 둘째가 태어나자 일을 그만두고 10년간 세 아들을 키웠다. 그러다 39세, 셋째가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아들 목엔 집 열쇠를 걸어주고 남편에겐 ‘나 공부하러 간다’는 통보만 전하고 대학원에 여성학 공부를 하러 갔다. 아들이 고3일 때 1년간 중국에 교환 교수로 간 일, 공부하라는 말 한마디 안 하고 내버려 뒀더니 세 아들이 서울대에 갔다는 이야기는 전설이 됐다. 그 막내아들이 자라 두 아이의 아빠가 됐지만 여전히 전설이 통하는 것을 보면 한국 사회는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여전히 그 시대에 머물고 있다.

―세 아들이 서울대에 들어간 뒤 여성들의 멘토가 된 여성학자, 아이러니 아닌지.

“그렇다. 여성 운동을 하면서 여성들을 만나보니 다들 너무 똑똑한데 엄마만 되면 공부, 공부 했다. 그래서 부모 교육운동에 뛰어들었다. 애들에게 너무 공부, 공부하지 말고 시민으로 옳지 않은 일을 엄마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지 말자고 했다. 그때마다 당신 말은 옳은데 한국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다, 그러다간 당신 아들들 대학도 못 간다고 했다. 그때마다 나는 애가 바로 자라고 자기 적성을 찾으면 됐지, 좀 안 좋은 대학에 가면 어때라고 했다. 그런데 아들 셋이 서울대에 들어가니 다들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참 아이러니다. 사실 아이들이 어릴 땐 공부를 잘 못해 서울대에 갈지 몰랐다. 오히려 애들이 차례로 서울대에 들어가자 걱정이 됐다. 공부, 공부 하지 말라고 해 놓고, 자기 애들은 서울대에 보내? 이건 아니지 않나. 막내는 나까지 서울대에 가면 어머니가 곤란하지 않으냐며 가지 말까요라고도 했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그러지 말라고 했다.”

―다들 주변 환경 때문에 어렵다고 한다.

“엄마들이 자기들도 아는데 세상이 가만두지 않는다고 한다. 거짓말이고 핑계다. 세상이 뭔데.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때도 그랬다. 고도 성장기에 상승 욕구가 맞물리면서 사교육 열풍이 엄청났다. 그때 우리 아이들은 한글도 못 떼고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시험 못 봤다고 야단치지 않았고 올 백을 맞았다고 칭찬하지도 않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재미있었니라고 묻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내버려 둔 건 공부가 적성에 맞으면 할 거고, 아니면 다른 길을 찾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사랑한다면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한다.”

―굉장히 긍정적이고 낙관적이시다.

“부모님에게 물려받았다. 실향민이었던 아버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말단 공무원이었지만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가난하고 배운 것 없지만 최선을 다해 노력했고 거짓말 안 하고 산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우리도 부모님께 세뇌가 돼서 중학생이 돼서야 우리가 가난하다는 것을 알았다. 학력 콤플렉스가 있을 만한데 오히려 공부 많이 한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이 많다며 공부보다는 인성이 더 중요하다고 하셨다. 6남매 중 내가 유일하게 공부를 좀 했는데 내가 밤늦게 공부하면 몸도 약한데 빨리 불 끄고 자라고 했다.”

―그래도 아이를 잘 키운 양육법이 있을 듯한데.

“그냥 어렸을 때부터 어른에게 이야기하듯 말했다. 뭐 사달라고 하면 아빠가 열심히 일하지만 많이 버는 게 아니어서 사 줄 수 없다, 우리는 돈이 없어서 못 해준다고 했다. 요즘엔 그런 이야기를 하면 기를 죽인다고 생각한다. 돈 없다고 기가 죽는 애가 바보다. 언제나 편안하게 의논하고 이야기했다. 지금도 그렇다.”

―며느리와도 그러신지. 굉장히 사이가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들에게 잔소리 못하듯 며느리에게도 잔소리 못한다. 주변에서 아들이나 며느리에게 섭섭하다고 하는데 뭐가 섭섭한가. 며느리가 안 들어왔으면 저 아들을 데리고 살아야 한다. 얼마나 귀찮은가. 그러니 고마운 은인이다. 나는 살림을 잘 못했다. 아이들 키울 때도 아무것도 안 했지만 며느리들은 열심히 키우고 살림도 깔끔하다. 나보다 훨씬 낫다. 애도 키워야 하고 자기 일도 하고 싶으니 힘들어한다. 안쓰럽다. 며느리들이 의논을 많이 해오는데 인생은 기니 언제 시작해도 된다고 조언해준다.”

그는 “젊은이들이 노인을 싫어하는 이유를 정직하게 되짚어 봐야 한다”고 했다. 그는 “젊은이들은 태어나서 한 번도 노인이 되어 보지 못했지만 우리는 젊어 본 경험이 있지 않은가. 그러니 기억을 되살려 우리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지금 젊은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어떤 할머니인가.

“5세부터 12세까지 손자·손녀가 여섯 명이다. 미니카도 같이 타고 실없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아이들이 할머니가 착하다고 한다.”

―이런 열린 자세에 여성학도 영향을 미쳤는가.

“나는 여성학을 하면서 세상을 다시 보게 됐다. 그 이전에도 비교적 다른 친구에 비하면 자유롭게 열려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여성학을 접하면서 내가 좁은 눈으로 세상을 봤다는 걸 알게 됐다. 나 스스로가 자유로워졌고 나 자신을 남하고 비교하지 않게 된다. 여성학을 하면 사람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니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사람들 모두 여성학을 공부할 순 없지만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고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최근 여성 혐오가 사회적 문제가 되고, 페미니즘 운동이 거세다.

“남자들이 변해야 하는데 변할 기회가 없었다. 최근의 여성 혐오는 경쟁에 뒤진 남성들이 분노를 여성에게 쏟으면서 벌어진 일이다. 약자가 더 약자인 여성을 강자로 잘못 본 것이다. 남녀가 사회 구조적 틀을 깨는 데 힘을 모아야 하는데 서로 적대시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페미니즘은 인간이 계급, 인종, 성별에 의한 차별을 겪지 않는 세상을 원한다. 성차별적인 세상에서는 남성도 억압을 받는다. 그래도 괜찮은 후배가 많다. 처음 여성운동 할 때는 깜깜했는데 미래가 밝아 보인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

“지금이 좋다. 부자는 아니지만 먹고 살 걱정 없고 아이들도 잘살고 있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몸에 온갖 탈이 났지만 그런대로 살 만한 데다 뚜렷하게 내세울 거 없는데 이 나이에 이곳저곳에서 불러줘 일이 많다. 바쁘지만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그는 요즘 한 달에 5~10번 강연한다. 자녀 교육과 여성 멘토링이다. 일하는 여성들에겐 죄책감 갖지 말고 자신감 갖고 살라고, 전업주부에게는 자녀 교육뿐 아니라 당신 자신을 키우라고 말한다. 공동육아 이사회 이사장, 여성 신문 편집위원장, 교육청 자문위원, 여성문화 네트워크 대표로도 활동한다. 하지만 그는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좋은 때는 아니라고 했다. 돌아보면 어느 때도 그 나름대로 다 좋은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일이 힘들지 않나.

“즐겁게 한다. 이기적으로 즐겁지 않으면 안 한다. 내 한계를 잘 알기에 할 수 있는 일만 하고 할 수 없는 일은 깨끗이 포기한다. 외국 여행을 갔을 때 친구들이 마사지한다기에 대수롭지 않게 나는 싫다고 빠졌더니 굉장히 충격을 받더라. 원래 잘 휩쓸리지 않는다.”

―50대에 ‘나이듦에 대하여’, 60대에 ‘다시 나이듦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70대에 쓴 이 책은 어떤 의미인가.

“젊었을 때도 오늘에 충실해야지, 내일은 안 겪어 본 날이니 오늘이 진짜 사는 날이라고 말은 했지만 미래가 불안했다. 그런데 70이 되니까 불안이 사라졌다. 내 앞이 확실하다. 앞으로 5년일지, 10년일지 모르지만 끝이 있음을 알게 되니 오늘이 참 고맙다. 알차고 재미있고 의미 있게 보내고 싶다.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착해지는 느낌이다. 누굴 미워하는 건 없을 것 같다.”

박 이사장은 칠순이 되던 새해 아침 자신에게 약속했다고 한다. 올 한 해 동안만이라도 정말 괜찮게 살아보겠다고.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욕심을 덜어내고 조금씩 더 사랑하고 베풀며 살겠다고. 하지만 작심삼일. 어느새 새로운 이벤트가 없으면 사는 게 재미없고 의미도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30년 가까이 그는 난생처음 강의를 하고, 난생처음 책을 내고, 난생처음 텔레비전에 출연하고, 난생처음 사회운동 단체 대표를 맡으며 숱한 다이내믹한 ‘난생처음’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일상의 작은 새로운 일엔 무감각했다.

그러던 지난여름, 난생처음 너무 더운 어느 날, “이런 더위가 난생처음”이라는 자각이 많은 것을 돌려놨다고 한다. 난생 처음 더운날 마을버스에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와서 너무 좋았고, 육중한 빌딩 출입문을 열고 들어갈 때 기다려 주는 낯선 젊은이의 친절에 울컥해졌다고 한다. 일흔이 넘어서야 일상의 새로움을 다시 느끼게 됐다는 그는 요즘은 난생처음 살아있는 내일은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기대된다고, 세상의 하루하루가 이만하면 족하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만하면 됐어, 이만하면 과분해. 그러고 보면 행복 참 쉽다.”

인터뷰 = 최현미 부장 (문화부) chm@munhwa.com
e-mail 최현미 기자 / 문화부 / 부장 최현미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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