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 전경. 앞의 건물이 퇴계가 생전에 제자를 가르치던 도산서당이다. 서원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도산서당은 퇴계가 직접 설계했으며 단칸방을 ‘완락재(玩樂齋)’, 마루를 ‘암서헌(巖栖軒)’이라고 이름 붙였다. 완락재란 ‘완상하며 즐기니 평생토록 지내도 싫지 않겠다’는 뜻이고, 암서헌이란 이름은 ‘학문에 대한 자신을 오래도록 가지지 못해 바위에 깃들어 효험을 바란다’는 겸손의 뜻이 담겨있다. 도산서원 제공
64 김병일 원장이 본 퇴계 이황의 ‘도산서원’
조정에서 붙들어도 벼슬을 마다하고 늘 물러나려 했던 조선의 선비! 우리는 먼저 퇴계 이황(1501∼1570)을 떠올린다. 그는 왜 그토록 벼슬에서 물러나려 했을까? 자리에 연연하는 데 익숙한 요즈음의 시각으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당시에 예던길을 몇 해를 버려두고
어디가 다니다가 이제야 돌아온고
이제라도 돌아오나니 딴 데 마음 말리라
퇴계가 만년(65세, 1565년)에 우리말로 지은 ‘도산십이곡’의 열 번째 시조이다. 부귀가 보장된 벼슬자리를 ‘딴 데 마음’이라 여기고 오래 버려두었던 고향 예안(경북 안동시 도산면)으로 내려온 소회를 노래하고 있다.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에 머물려 애쓰다 = 퇴계는 좀 늦은 나이인 34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아갔다. 그런데 10년쯤 지나서부터 벼슬에서 물러날 생각을 하였다. 평생 140차례나 벼슬이 내려졌지만 사직상소를 올리고 나아가지 않은 것이 79차례이고, 나머지 61차례마저 나아가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 벼슬길 36년 중 실제로 관직에 있은 것은 10년 남짓이고, 그보다 훨씬 긴 세월을 고향에서 지낸 셈이다.
◇퇴계의 벼슬살이와 임금의 아낌 = 퇴계는 본시 벼슬에 그다지 뜻이 없었으나 홀어머니와 형님 등 주위의 권유를 받아들여 뒤늦게 벼슬에 나아갔다. 그러나 매사에 성심껏 임하는 성품 덕에 차츰 공적을 인정받고 신뢰를 얻었다. 젊은 관료 시절에는 중종 임금을 모신 자리에서도 직언하였고, 암행어사로 나아가서는 탐관오리를 적발하고 시정하였다. 청렴한 공직생활은 물론이고, 능력도 탁월하여 국가의 중요 문서와 궁궐의 기록이나 글씨도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노년에는 병든 몸으로도 일단 조정에 나오면 임금을 인도하고 정치를 바르게 하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이러니 임금으로서는 퇴계 같은 인물이 얼마나 필요하였겠는가?
퇴계가 거듭 벼슬을 고사하자 명종은 “현인을 대우하는 나의 정성이 모자랄 뿐, 그대의 뜻이 깊고 간절하니 소청을 따르겠다”고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아쉬움을 달래고자 화공에게 퇴계의 고향 도산을 그려오게 하고 대신으로 하여금 그림 위에 퇴계가 지은 ‘도산기(陶山記)’와 ‘도산잡영(陶山雜詠)’을 담아 병풍으로 만들게 하여 늘 가까이 두었다. 얼마나 그리움이 간절하였으면 그랬을까? 명종을 이은 나이어린 왕 선조도 5개월 동안 일곱 번이나 벼슬을 내려 자신의 어리석고 못난 자질을 돕도록 하라고 간곡하게 재촉하였다. 이렇듯 임금의 부름이 잇따르자 퇴계도 결국 서울로 올라오지 않을 수 없었다.
올라온 뒤에도 계속 사직을 청했으나 고향으로 물러나 있어도 좋다는 허락만 받았을 뿐이고, 고향에 머물면서도 사직상소를 거듭 올렸으나 끝내 수락받지 못했다. 퇴계는 어리석고 병든 몸으로 나라에 도움이 되지 못하면서 벼슬에 머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겼음에 반하여, 조정은 그래도 필요하니 병 낫는 대로 복귀하라며 벼슬을 유지시킨 것이다. 사양하는 관료(신하)와 이를 붙들려는 조정(왕)의 관계가 이처럼 곡진하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퇴계가 물러난 고향, 계상과 도산 = 벼슬에서 물러나려는 퇴계의 결심이 비로소 구체화된 것은 50세 때다. 그때 물러난 곳이 계상(溪上)인데, 500년이 지난 지금도 퇴계종택만이 홀로 자리하고 있을 만큼 한적한 곳이다. 지금의 1000원권 뒷면에 있는 겸재 정선(1676∼1759)의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에 등장하는 초가집이 바로 이곳이다. 퇴계는 당시 자신의 호를 ‘시내로 물러난다’는 뜻을 담아 ‘퇴계(退溪)’로 정하고, 시내의 원래 이름인 토계(兎溪)도 같은 이름으로 바꾸었다. 이처럼 궁벽한 장소에 퇴계는 살림집(한서암)과 서당(계상서당)을 터 잡고 그 감회를 한 편의 한시(‘寒棲’)로 남겼다.
띠풀 얽어 숲속에 초막집 세우니
집 아래 차가운 샘 솟네
여기 깃들여 사니 이 마음 즐거워라
알아주는 이 없어도 한스러울 것 없네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개의치 않고 즐겁게 머물다가 조정의 부름을 받으면 다시 나아가기를 반복하는 몇 해 동안 많은 제자와 후학들이 계상으로 찾아들었다. 35년 나이 차이를 잊고 서로 예우하면서 이틀 밤 사흘 낮을 보낸 율곡 이이(1536∼1584)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샘과 돌이 그윽하고 소나무와 대나무가 아름다웠으나 이렇듯 모여드는 이들을 받아들이기에 계상은 너무 협소하였다. 그리하여 퇴계는 제자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산 너머 도산에 새로운 서당터를 잡는다. 처음 도산서당 자리를 잡았을 때의 기쁜 심정을 이렇게 한시로 읊었다.
계상서당에 비바람 치니 책상조차 가려주지 못해
좋은 곳에 옮겨보려 숲속 두루 찾았네
어찌 알았으랴 백년토록 학문할 땅이
나물 캐고 고기 낚던 그 옆에 있을 줄을
꽃은 사람 보고 웃으니 정이 옅지 않고
벗 찾는 새소리는 그 뜻이 더욱 깊도다
세 갈래 오솔길을 옮겨와서 깃들기를 다짐하니
즐거운 곳에서 뉘와 함께 향기를 맡으리
61세 되던 해 가을, 5년의 공사 끝에 도산서당이 완성되었다. 너무나 기뻤다. 서당의 아름다운 경관과 건물배치 등을 정겹고 자세하게 설명하는 글 ‘도산기’와 한시 ‘도산잡영’ 44수를 지어 그 기쁨을 담았다. 서당이 지어지자 퇴계는 마음껏 독서하고 마음이 일면 낙동강 언덕을 거닐며 사색하였다. 함께할 제자와 후학들도 원근 각지에서 몰려들었다. 얼마나 그리던 즐거운 삶인가. 간간이 내려지는 벼슬을 사양해야 하는 부담이 있기는 했지만.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매화는 한평생을 춥게 살지만 그 향기를 팔진 않는다.’ 퇴계는 선비 정신을 상징하는 매화를 특별히 사랑했다. 세상을 떠나는 날 아침에도 매화 화분에 물을 주라고 당부했을 정도였다. 사진은 지난해 3월 도산서원에 핀 매화.
◇퇴계가 계상과 도산에서 추구한 가치는? = 퇴계가 이곳에서 조정의 부름을 한사코 사양하면서 추구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유학이 지향하는 하늘의 이치(天理)와 삶의 도리(人道)에 대한 관심이다. 그래서 몸과 마음을 바르게 간직하고(居敬) 성현이 남긴 이치를 깊이 있게 궁구하였다(窮理). 아름답고 한적하였기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으리라. 이때의 즐거움은 수없이 많은 시와 편지글에 남아있다. 이를 통해 제자와 후학들 또한 삶의 도리를 실천하는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고 이끌었다. 훗날 더 좋은 세상을 만들게 하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이렇게 읊었다.
높은 곳에 머무는 것은 내 할 일 아니네
高蹈非吾事
고향마을에 기거하면서
居然在鄕里
착한 사람이 많아지길 소원하네
所願善人多
이것이 천지가 제자리를 잡는 것이기에
是乃天地紀
‘착한 사람’이 많은 사회에서는 나쁜 일이 생길 리가 없고 반목과 갈등도 사라질 것이다. 이를 위해 퇴계는 50대에는 계상서당에서, 60대에는 도산서당에서 선인을 길러내기 위해 스스로 솔선수범하며 가르쳤다. 착한 사람을 길러내려면 단순한 지식 전달로만은 안 된다. 스승이 먼저 실천하고 제자가 이를 본받을 때 가능하다. 오늘까지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퇴계가 존경받는 근본 이유다.
◇일반백성도 사람답게 살도록 우리말 시조 ‘도산십이곡’을 만들다 = 퇴계는 애민정신 또한 남달랐다. 당시 천민인 대장장이 배순이 배우고 싶어 하자 제자로 받아들인 일화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는 스승의 가르침을 잘 실천하여 사후에는 나라로부터 정려비각까지 받았다. 이처럼 퇴계는 공자의 가르침대로 ‘유교무류(有敎無類)’, 즉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가르쳤다.
그런데 퇴계가 공부하고 제자들과 강론한 문자는 모두가 한문이다. 그의 많은 저술과 편지글 그리고 2000수가 넘는 한시 모두가 그랬다. 글을 모르는 대부분의 일반 백성에게 어떻게 이 어려운 한문을 가르쳐 사람의 도리를 지키며 살아가도록 교화시킨다는 말인가? 더구나 한시는 우리 음률에 맞지 않아 노래와 춤으로 따라할 수도 없다.
그래서 퇴계는 한문을 모르는 백성들도 익힐 수 있도록 교훈적인 내용을 담은 우리말 시조를 지었다. 바로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이다. 아이들에게까지 가르쳐 노래하고 춤추며 따라 배우는 가운데 인간답게 살아가도록 의도한 것이다. 이것은 뜻을 세워 배움에 나서게 하는 교훈적 내용을 담은 12곡으로 구성된 연시조인데, 맨 마지막 열두 번째 시에 그 정수가 담겨 있다.
우부(愚夫)도 알며 할 거니 그것이 아니 쉬운가
성인(聖人)도 못다 아시니 그것이 아니 어려운가
쉽거나 어렵거나 중에 늙는 줄을 몰라라
진리와 인간의 도리가 담긴 학문은 지극히 어려우니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평생토록 공부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모든 사람이 뜻만 있으면 배울 수가 있다’고 격려, 감발시키는 내용에 가슴이 울려온다. 가히 모든 이의 참 스승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하기에 퇴계의 염원은 시간 속에서 부식되지 않고 면면히 전해졌다. 21세기의 시작인 2001년, 평생을 교육계에 몸담다 은퇴한 퇴계의 16대 종손(이근필, 86세)은 선조의 뜻을 이어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을 설립했다. 퇴계가 소원하던 ‘착한 사람’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 절실히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출범 이듬해(2002년) 224명으로 시작된 선비 수련생이 작년(2016년)에는 10만4707명에 이르렀다.
필자는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과 도산서원 원장으로 10년째 이곳에 머물며 지내고 있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혼자서 또는 동료나 수련생들과 함께 계상의 시내와 도산의 언덕을 노닌다. 여기서 느끼는 소회를 적어 내려가다 보니 어느새 퇴계선생이 남긴 맑은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듯 행복감에 젖어든다.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 전 기획예산처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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