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와 시각>보수 재결집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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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권 정치부 부장

보수의 ‘메시아’라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떠난 자리를 놓고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옥동자’로 떠오르고 있다. 개인적으론 충북 충주의 고향 대선배가 떠난 자리에 학교 선배가 오는 셈이지만, 야당으로 기운 대선판을 생각하면 누구든 보수 정권 재창출이 불가능한 ‘씨 없는 수박’이긴 마찬가지다. 보수에선 누가 출마해도 안 되는 지금의 형국을 만든 가장 큰 책임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초래한 박근혜 대통령이다. 그렇지만 최 씨의 국정농단 사태 파문이 본격화한 지 3개월이 됐고, 박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한 지 2개월가량이 지나도록 보수가 복원력을 상실한 채 궤멸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은 보수 정치 대변자를 자처해온 새누리당의 책임이다. 대선에 희망이 없다며 보수층이 대규모로 투표를 포기하고, 극단적 대결을 선택하는 파국이 벌어지기 전에 새누리당은 스스로 새로운 보수 탄생을 막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지난 1일 대선 불출마 선언을 발표하기에 앞서 반 전 총장은 인명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만나 마음을 크게 다쳤다. 비공개 면담에 들어가자마자 인 위원장은 의례적인 인사말도 없이 “근데 총장님은 진봅니까, 보숩니까”라는 편 가르기 말로 불출마 성명서를 안주머니에 넣고 있던 반 전 총장의 가슴에 구멍을 냈다. 오락가락 행보와 어설픈 처신으로 지지율이 떨어졌다 하더라도 반 전 총장은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맞설 유력 보수 후보였다. 그런 그를 ‘내 것이 안 되면 남의 것도 안 된다’고 박대한 것은 기득권 유지와 다름없다. 약한 자를 구원하는 기독교 윤리에도 어긋나 보인다.

인 위원장이 “예쁜 늦둥이 후보를 낼 것”이라며 황 권한대행 띄우기에 나서는 듯한 행위도 국정을 책임지는 집권 보수여당의 자세는 아니다. 단지‘불임 정당’의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한 꼼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새누리당이 보수를 재건하려 할수록 새로운 보수가 설 수 있는 공간은 좁아진다. 황 권한대행을 보수 대통령 후보로 만들고 싶다면 국민이 황 권한대행에게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국정 운영을 적극 지원하는 것이 먼저다. 헌법재판소에서 박 대통령의 탄핵이 결정되고 난 후에도 마땅한 보수 후보가 없다면 그때 ‘황교안 카드’를 꺼내는 것이 도리다. 인 위원장이 “내가 지키겠다”며 박 대통령에게 징계 면죄부를 주면서 새누리당 쇄신은 명분을 잃었다.

신약성서에는 ‘케노시스’(kenosis·自己卑虛)를 강조하는 구절(빌립보서 2장 5∼8절)이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지 않고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내려오시고, 심지어는 보통 인간들보다 더 낮고 비천한 삶을 사셨다.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는 ‘비움’이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다. 단두대와 박 대통령의 상여가 행진하는 탄핵 추진 촛불집회에 맞서 서울시청 앞 태극기 집회에선 “문재인을 죽여라”라는 저주의 함성이 울려 퍼지고 있다. 저주의 행진과 함성이 멈추고 탄핵 심판 결정 이후 극단적 대립과 충돌을 막기 위해서는 건전한 보수층이 하루빨리 정치적 힘을 복원해야 한다. 새누리당의 케노시스가 절실한 때다. yb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