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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카페 게재 일자 : 2017년 02월 08일(水)
儒賢대우 박탈 경고에도 숙종의 부당한 人事 당당히 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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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 = 전승훈 기자 jeon@

최연식의 역사 이야기 - (22) 예송·환국 시대 ‘탕평론자’ 박세채

“좌의정 박세채는 한 시대의 중망(重望)을 짊어진 사림의 영수였다. 평생의 언행은 반드시 예법을 따랐고, 재상의 지위에 오르자정색을 하고 입조(立朝)했다. 그가 경연(經筵)이나 장주(章奏)를 통해 간절히 아뢴 것은 모두 속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당론이 생기자 세상의 학자들 중에는 편당하지 않는 자가 드물었는데, 박세채만 홀로 의리를 주장하며 편을 가르지 않았다. 송시열과 윤증 두 가문이 다투자 선비들도 분열됐지만, 박세채는 은혜와 의리를 헤아려 정론을 드러냈다.”

첫 번째 글은 박세채의 부음을 듣고 숙종이 내린 전교의 일부로 ‘숙종실록’ 박세채 졸기(卒記)에 수록돼 있다. 두 번째 글은 ‘숙종실록보궐정오’에 실린 박세채 졸기의 일부다. ‘숙종실록’과 ‘숙종실록보궐정오’는 각각 노론과 소론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지만, 두 기록 모두 소론에 속했던 박세채에 대해서만은 호의적이다. 두 기록에서 극명하게 엇갈린 평가를 받았던 송시열의 경우와 비교하면 그 차이가 확연하다. 예송(禮訟)과 환국(換局)으로 점철된 시대에 탕평론을 선도했던 그의 삶을 존중한 결과였다.

박세채는 인조 9년(1631) 서울 창동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의정부 우참찬(정2품)을 지낸 박동량이었고, 외할아버지는 영의정(정1품)을 지낸 신흠이었으니 시쳇말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셈이다. 그러나 그의 유년기는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그는 태어나자 곧바로 할아버지의 명에 따라 21세에 요절한 숙부 박유(1606∼1626)의 양자로 입적됐고, 그 때문에 집을 떠나 홀로 된 숙모 조 씨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5세 때는 할아버지와 생모를 연달아 잃었고, 14세 때는 생부 박의를 또다시 여의고 말았다. 게다가 이때는 형 박세래마저 이미 요절한 상태라 그는 다시 본가로 돌아와 생부의 대를 이어야 했다.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양부와 생부 사이를 오가는 동안 박세채는 주로 가학(家學)에 의존해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9세 때는 양외할아버지 조위한의 집에 드나들며 수업했고, 11세 때는 생부로부터 이이의 ‘격몽요결’ ‘성학집요’ ‘율곡집’ 등을 배우며 학문의 방향을 잡아 나갔다. 12세 때부터는 한당(漢唐)의 시·사·전기 등을 두루 읽었고, 15세 때부터는 원로 학자들도 애를 먹는 어려운 글들을 막힘없이 해석할 수 있게 됐다.

특별한 스승을 두지 않고 공부하던 박세채는 17세 때 처음으로 생원·진사 초시에 합격했고, 18세 때 진사 회시에 합격했다. 19세 때는 때마침 상경한 예학의 거두 김집을 찾아가 토론을 벌였고, 20세 때는 김상헌에게 편지를 보내 만나기를 청하기도 했다. 이때 김상헌은 박세채의 편지를 읽고 손자들에게 “너희들이 따라잡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라며 극찬했다. 박세채가 김집과 김상헌을 찾았던 것은 가학으로만 익혔던 이이의 학풍을 당대의 대학자들로부터 직접 전수받으려는 의지의 발로였다.

박세채는 20세 때 조야(朝野)를 들썩였던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도 했다. 사태는 효종 즉위년(1649) 11월에 서인 유생들이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청원하면서 시작됐다. 효종 1년 2월에는 이에 반발한 유직 등 남인 유생 900명이 반대 상소를 올리면서 사건은 증폭됐다. 그러자 서인들은 문묘 종사 반대를 주도한 유직에게 삭적과 부황 처벌을 내렸다. 삭적은 유생 명부에서 이름을 삭제하는 것이고, 부황은 탄핵할 사람의 이름을 노란 종이에 써서 북에 붙인 뒤 그 북을 치고 시가를 돌며 죄상을 알리던 처벌이었다. 유생의 명예가 걸린 중벌에 남인 유생들이 성균관을 비우며 반발하자, 효종은 유직에게 내린 부황 처벌을 사면했다. 이때 20세의 성균관 유생 박세채가 상소를 올려 이이 및 성혼의 문묘 종사 청원과 함께 유직에게 내린 부황 처벌의 당위성을 거론했다. 그러나 결국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박세채는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박세채가 학문에 전념하던 기간에도 효종과 현종은 그를 세자익위사 세마(정9품·29세), 종부시 주부(종6품·35세), 공조 좌랑(정6품·36세), 세자익위사 사어(종5품·36세), 충청도사(종5품·37세), 세자시강원 진선(정4품·38세), 사헌부 장령(정4품·39세, 43세) 등으로 불렀다. 그러나 그는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그의 나이 29세 때 발생한 기해예송(己亥禮訟)으로 서인이 집권했지만, 그는 서인 정권에 가담하지 않고 학문에 침잠하며 정국을 관망했다.

그러나 결국 그도 정쟁의 칼날을 비껴가지 못했다. 그가 정쟁에 휘말리게 된 계기는 그의 나이 41세 때 발생한 민신 대복(代服)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현종 12년(1671) 민신이 할아버지 민업의 상에 아버지 민세익을 대신해 참최 3년 복을 입으면서 불거졌다. 원래는 민세익이 참최 3년 복을 입어야 했지만, 민세익에게 정신질환이 있어 손자인 민신이 아버지를 대신해 참최 3년 복을 입었던 것이다. 이때 박세채는 송시열과 상의해 민신의 대복을 정당한 것으로 판정했다. 그런데 현종 14년(1673) 송시열과 대립각을 세웠던 현종의 장인 김우명이 박세채와 송시열을 공격했고, 다음 해 발생한 갑인예송(甲寅禮訟)으로 남인이 집권하면서 박세채에게도 사판 삭제의 처분이 내려졌다. 사판은 벼슬아치의 명부였으니 사판 삭제는 일종의 정치적 단죄였던 셈이다.

박세채의 정치적 복권 기회는 숙종 6년(1680)에 찾아왔다. 남인의 비호 아래 14세의 나이로 즉위한 숙종이 성년을 맞아 경신환국을 단행하던 때였다. 환국은 특정 정치세력의 독주를 제어하기 위해 국왕 주도로 집권 세력을 교체해 정국을 전환하던 방식이었다. 이때 숙종은 남인 세력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서인을 대거 등용하기 시작했다. 이 해에 숙종은 50세가 된 박세채를 성균관 사업(정4품), 제용감 정(정3품), 사헌부 집의(정3품)로 불러들였지만, 모두 응하지 않았다. 숙종은 다음 해에도 그에게 성균관 사업과 사헌부 집의를 다시 제안했지만,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국의 변화에 경솔히 대응하지 않고 사태의 추이를 조심스럽게 살피려 했던 것이다.

박세채의 심경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숙종 8년(1682)이었다. 이때 숙종이 박세채에게 승정원 동부승지(정3품)와 이조 참의(정3품) 등 당상관 직을 제수하자, 그는 다음 해에 이조 참의 직을 수락하고 취임했다. 송시열과 윤증 가문의 불화로 시작된 회니시비(懷尼是非)가 결국 집권 서인을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시키자, 두 사람과 두루 가까운 박세채는 갈등 조정의 적격자였고, 박세채도 그 역할을 자임하고자 했던 것이다.

회니시비란 송시열이 살던 회덕과 윤증이 살던 이산의 첫 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시비는 윤선거 사망 후에 그의 아들 윤증이 송시열에게 아버지의 묘갈문을 부탁하면서 불거지기 시작했다. 당시 송시열은 윤선거에 대한 특별한 평가를 덧붙이지 않은 채 박세채가 먼저 지은 행장을 기초로 성의 없이 묘갈문을 지어 보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윤증이 여러 차례 수정을 요구하자, 송시열은 매번 자구만 손질해 돌려보냈다. 송시열의 무성의는 윤선거가 사문난적(斯文亂賊)인 윤휴와 절교하지 않았다는 의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반면 윤증의 불만은 송시열과 아버지 윤선거 사이에 정치적 견해 차이가 있다면 그 점을 분명히 밝혀 달라는 요구에서 나온 것이었다.

박세채는 숙종 9년(1683) 2월에 이조 참의를 맡은 직후 5월에 송시열과 윤증의 갈등 중재를 위해 두 사람을 함께 조정에 불러들이자고 건의했다. 그가 탕평책이 담긴 ‘시무만언소(時務萬言疏)’를 지은 것도 그때였다. 그러나 윤증은 박세채의 중재안에 반대했다. 자신이 조정에 나간다고 해서 송시열의 세력을 제어하기는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결국 박세채는 중재자 역할에 한계를 느끼고 그해 자신에게 내려진 공조 참판(종2품), 사헌부 대사헌(종2품), 호조 참판 등의 직책을 모두 사양했다. 대신에 그는 그해 12월 호조 참판 직을 사양하면서 궁궐을 멋대로 출입한 무녀 막례를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박세채의 보고에 따르면, 막례는 임금의 수두를 치료한다는 핑계로 궁궐에 출입하며 술법을 시행해 막대한 재물을 취했다는 것이다. 이에 숙종은 박세채가 아는 것은 반드시 말하지 않는 것이 없다며 그의 충정을 가상히 여겼다.

박세채가 숙종 9년에 지었던 시무만언소를 실제로 제출한 것은 숙종 14년(1688) 6월이었다. 그해 5월에 숙종이 내린 이조 판서(정2품) 직을 사양하며 전에 지어 뒀던 것을 다시 올린 것이다. 이 상소문에는 국정 전반의 개혁 방안이 논의돼 있지만, 그 핵심은 ‘황극탕평론(皇極蕩平論)’이었다. 황극탕평이란 임금(皇)이 표준(極)이 돼 붕당(朋黨)을 억제(蕩平)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임금이 표준이 되기 위해서는 임금 스스로 공명정대한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래서 박세채는 이 해 7월에 희빈 장씨 측과 가까운 동평군 이항을 혜민서 제조로 임명한 숙종의 부당한 처사를 지적했다. 그러나 이 일로 박세채는 숙종으로부터 “유현(儒賢)으로 대우하지 않을 것이니, 그의 소차(疏箚)도 받아들이지 말라”는 경고를 받고 말았다. 그리고 이 해 10월에 희빈 장씨가 왕자 윤(경종)을 출산하고 다음 해 기사환국이 발생해 서인들이 대거 숙청되면서 박세채도 한동안 침묵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숙종 20년(1694) 갑술환국으로 다시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박세채도 의정부 우참찬과 좌의정(정1품)에 제수됐다. 무수리 출신 숙원 최씨가 왕자 금(영조)을 출산해 숙종의 총애를 받던 시절이었다. 이때도 박세채는 상소를 올려 임금이 중심이 되는 황극탕평론을 건의했다. 숙종도 박세채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로 하여금 붕당을 경계하는 교서를 짓게 했다. 그리고 이듬해 사망한 박세채는 탕평 군주 영조에 의해 그의 재위 40년(1764)에 노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린 특별 명령으로 문묘에 종사됐다. 그러나 임금의 권력은 변덕스러운 것이다. 박세채도 그것을 경험했다. 게다가 왕권에 의한 인위적 탕평은 당파 간의 정책 경쟁을 봉쇄할 수 있다. 왕권이 주도하는 탕평과 당파 간의 경쟁이 모두 실종된 정치 공간에서는 집권당의 독재만 남는다. 탕평의 아이콘 정조가 사망한 후 등장한 세도정치가 그것을 입증한다. (문화일보 1월 4일자 24면 21회 참조)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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