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진 교수의 드라마 세상>사임당, 빛의 일기…현모양처에서 예술가로의 자리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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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에서 ‘어머니’는 삶의 모든 것이 농축된 단어 가운데 하나다. 어머니는 삶의 뿌리이자 가지이며 줄기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을 진리에 가깝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언제나 희생과 헌신의 이미지가 덧붙여져 있다. 천재적 재능의 화가였음에도 불구하고 ‘현모양처’로 각인된 신사임당도 예외는 아니었다.

SBS 드라마스페셜 ‘사임당, 빛의 일기’는 역사적 인물 신사임당을 현재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기획 의도에서 현모양처의 틀을 깨고 봉건시대의 억압에 맞서 예술가로서의 신사임당의 삶을 현대적 감각으로 그려내겠다는 목적을 분명히 밝힌다. 이를 위해 조선시대의 신사임당(이영애)과 현대의 서지윤(이영애) 이야기가 맞물려 돌아가는 방식으로 시간을 변주시킨다. 하지만 시간강사 서지윤이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충만한 신사임당과 접목되는 지점이 매끄럽지 못해 아쉽다.

서지윤은 전임교수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미술사학계의 실력자인 지도교수 민정학(최종환) 밑에서 온갖 궂은일을 다 하면서 집안일까지 책임진다. 봉건시대 여성과 별로 다르지 않은 삶이다. 대학에서는 박사학위를 취득한 신진 학자임에도 지도교수에게 예속돼 있고, 가정에서는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며느리로서 가족의 일상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진보적 이상주의자였던 아버지 덕분에 화가로서의 재능을 포기하지 않아도 됐던 조선시대 신사임당만도 못한 것이 서지윤의 처지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는 안견의 ‘금강산도’와 관련한 공개 학술발표회장에서 진품을 의심하는 후배 강사 한상현(양세종)의 기습 질문에 동조하는 듯한 답변으로 지도교수의 눈 밖에 나면서 역사의 물결에 휩싸인다. 이탈리아에서 열린 학회 세미나에 참석했다가 지도교수에게 모멸을 당하고 밤거리를 배회하던 그녀에게 누군가 신사임당의 것으로 추정되는 비망록을 건네준 일이 계기가 됐다. 그런데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서지윤이 조선시대로 돌아가 신사임당이 되는 과정의 개연성이 부족해 공감대 형성이 쉽지 않다.

과거의 신사임당과 현재의 서지윤을 연결시켜 주는 고리는 ‘미술’이다. 하지만 한국미술사를 전공한 서지윤의 신진 학자로서의 면모가 신사임당의 현모양처 이미지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다. 오히려 신사임당의 현모양처 이미지가 서지윤의 신진 학자로서의 면모를 압도하는 부작용이 발생한다. 조선시대 신사임당이 돼 역적으로 몰려 죽은 구성군의 손자 이겸(송승헌)과의 사랑이 애틋할수록 천재 화가로서 그녀의 재능이 두드러지지 않는 모양새가 연출되는 것이다. 자신이 발견했다는 ‘금강산도’를 매개로 문화계 권력을 장악하려는 지도교수와 맞서 싸우면서 그것이 위작임을 밝혀야 하는 서지윤의 결기가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왜 지금 신사임당인가’이다. 역사적 인물을 현대적 상상력으로 재해석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경우 지금 신사임당을 호출한 이유가 명료하지 않다. 신사임당이 그림을 통해 꿈꾸었던 세상,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꿈을 꿀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 주소서”라는 바람이 현대 여성들에게 얼마나 호소력이 있을지 궁금하다. 5만 원권 초상화 속에 무표정하게 박제된 현모양처 신사임당의 틀을 깨고 천재 화가 ‘신씨’로 당당하게 칭송됐던 사실을 일깨우겠다는 의도를 얼마나 제대로 살리는지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충남대 교수·드라마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