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와 시각>팬덤셀러와 독서의 새 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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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미 문화부 부장

SF 판타지 작가 어슐러 르 귄의 단편집 ‘바람의 열두 방향’이 지난주 서점에서 일시 품절됐다. 요즘 가장 핫한 그룹 방탄소년단의 신작 뮤비 ‘봄날’이 이 단편집에 수록된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서 콘셉트와 철학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10일 ‘봄날’ 뮤비 티저가 공개된 뒤 그 주말 동안 서점에 깔린 책들이 싹쓸이되면서 그 뒤 일주일간 7000여 부가 팔려나갔다.

어슐러 르 귄은 살아서 이미 전설이 된 작가로 그의 대표작 ‘어스시 연대기’는 J R R 톨킨의 ‘반지의 제왕’,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와 함께 세계 3대 판타지로 꼽히지만 한국 시장에서는 많이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아니기에 이런 반응은 놀랍다. 앞서 지난해 이 그룹의 정규 앨범 ‘wings’가 전체 콘셉트를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가져오면서 앨범 발매 후 3개월 동안 한 출판사에서만 ‘데미안’이 2만 부 이상 팔리기도 했다. 팬들이 만든 팬덤셀러(Fandomseller)이다.

‘바람의 열두 방향’과 ‘데미안’이 팔려나간 사연은 우리 시대에 ‘팬’과 ‘팬덤’이야말로 엄청난 구매력을 지닌 강력한 최대 소비 파워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드러내는 동시에, 책이라고 하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몇몇 기존 관념들을 깬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젊은층은 책을 잘 읽지 않는다는 생각, 청소년들이 고전이라면 어려워 가까이하지 않으려 한다는 지레짐작, 책과 대중문화는 비교적 대척점에 서 있다는 관념, 현실적으로 청소년들에게 고전을 권하는 길은 그저 ‘신입생 권장 도서’ ‘청소년 독서 목록’ 같은 권장 도서 목록 아니면 대입 논술 제도를 통해서나 이뤄질 것이라는 판단이다.

하지만 팬들이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과 ‘데미안’ 등을 분석해 놓은 글들을 찾아 읽어보면 팬과 팬덤의 특성대로 집요하고 열성적으로 작품을 읽고 작품을 파고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출판사 편집자도 팬들의 ‘열독’에 상당히 놀랐다고 했다. 물론 이들의 목적은 전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그룹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들뿐 아니라 최근 팬들이 좋아하는 가수나 그룹의 작품 세계를 인문학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이 유행처럼 자리 잡아가고 있다.

이런 점에서 팬덤 셀러는 영화나 드라마 인기에 힘입은 원작소설, 인기 드라마 주인공이 들고나온 책이 순식간에 팔리고 소비되는 ‘미디어 셀러’와는 확실히 구분된다. 책의 위기라는 말들이 넘쳐나지만 책에 대한 수요와 접근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지점에서 전혀 다른 형태로 끊임없이 새롭게 생기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일상적 관심과 의문에서 시작하는 것이 진짜 독서이며 비평이기 때문이다.

곳곳에서 책과 출판이 위기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지난주 문화체육관광부는 출판문화산업 진흥 5개년 계획을 발표하며 내년을 책의 해로 선포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운 팬덤 셀러 현상을 보면서 독서에 대한 좀 더 새로운 접근이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최소한 몇 년째 그대로인 초·중·고등학교 추천 독서 목록, 참으로 재미없는 각 기관의 대학 신입생 추천 독서 목록 정도만이라도 좀 더 자유롭고 새롭게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ch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