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評>재벌개혁 정치화와 국가주의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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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순 연세대 교수·정치학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과 함께 재벌 개혁이 탄력을 받는 모양새다. 제19대 대통령 선거의 예비 주자들은 조기 대선을 염두에 둔 재벌 개혁 공약을 경쟁적으로 내놓고 있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 대선에서 주장했던 재벌 개혁 방안에 노동자 추천 이사제를 더했고, 안희정 충남지사도 재벌 개혁을 예고하고 있다. 우리 경제를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착취하는 동물원 구조라고 비판한 안철수 의원과 정글 경제로 현 상황을 묘사한 유승민 의원도 재벌 개혁을 내세우고 있어 누가 집권하든 재벌 개혁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선 주자들의 말처럼 재벌을 규제하는 제도를 만들면 단숨에 정경 유착의 고리가 끊어지고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나아질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박근혜정부 역시 순환출자 금지와 출자총액제한 제도를 보강했고, 공정거래위원회, 감사원, 금융감독원의 권한을 강화해 재벌들을 규율하려 했다. 그럼에도 이번 최순실 사태가 드러내듯 정경 유착의 현실은 여전히 강고하다. 재벌 개혁의 과제를 단순하게 개별 기업의 도덕성 문제로 보는 것은 너무 안이한 태도다.

오히려 이러한 관점은 재벌 개혁 이슈를 지나치게 정치화시킬 뿐만 아니라,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전략적 사고를 가로막는다. 정치인들은 표심을 자극하기 위해 반기업 정서를 부추기고 단기적인 처벌 강화를 약속하라는 압력을 받는다. 노동자 추천 이사제, 연구·개발(R&D) 투자에 대한 세금 공제 철폐, 법인세 인상 등을 통해 재벌들을 혼내주겠다고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이러한 약속들은 보호무역주의의 강화, 2%대의 경제성장률, 급증하는 가계부채 등과 같은 악재들 속에서 기업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재벌 개혁 문제의 정치화는 한국 경제의 본질적 문제인 국가·시장 관계의 개선을 가로막는다. 정치권은 과거 압축 성장 패러다임으로 재벌을 만든 국가가 이제는 재벌 해체에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을 뿐, 국가의 강력한 개입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과거 개발독재 시대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새로운 시대정신과 국가 운영의 원리를 고민하기보다는 재벌 개혁을 통해 정권만 바뀐 국가주의 재현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우리에게 신중하게 계획되지 않은 국가의 개입은 그만한 부패와 불공정을 낳는다는 점을 가르쳐 주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산업구조를 고도화하고 얼어붙은 소비와 투자를 되살리기 위해 기업을 포함한 경제 주체들이 신뢰할 수 있는 체계적인 설계도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대선 주자들의 재벌 개혁 공약들 속에 하나로 뭉뚱그려진 동반성장과 정경 유착을 분리해 다룰 필요가 있다. 한국 대기업의 지나친 지배력은 중소기업의 성장을 저해하고 공정한 산업 생태계의 형성을 명백히 방해한다. 우리 경제의 새로운 성장동력 확보와 양질의 고용 창출을 위해서라도 동반성장을 위한 제도적인 개선책을 마련해야 한다.

그런데 정치권과 기업이 결탁한 정경 유착 문제는 좀 더 세심한 고려가 필요하다. 근래의 정경 유착은 대부분 경영권 승계와 연계돼 있다. 경영권 승계가 거의 불가능한 현 제도에서 기업은 경영권 승계를 위해 부당 내부거래, 일감 몰아주기 등 각종 편법과 대정부 로비에 몰두하고 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정부는 이러한 약점을 이용해 기업을 압박하거나 회유해 왔다. 그렇다면 기업의 경영권 승계를 규제할 방안을 고심하는 만큼 공정하고 현실성 있는 과세 기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과도한 부의 불평등은 민주주의를 위협하지만, 동시에 거세지는 해외 투기자본의 공격에도 합법적 수단을 통한 경영권 방어가 쉽지 않은 비현실적인 제도 역시 국민경제의 존속을 위험하게 할 수 있다.

재벌 개혁은 어떤 방법을 통해 추진되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를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이며, 더는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이기도 하다. 정치권은 재벌 개혁 문제의 정치화를 예방하고 개발독재 시대의 국가주의 유혹을 떨쳐버려야 한다. 지금은 기업의 불공정한 거래를 감독할 공정한 제도의 도입이 기업의 자율성 제고 및 산업구조의 재편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고민해야 할 때다. 국가 경영의 비전과 전략들이 대선 전후의 토론을 통해 구체화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