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評>안보의 정쟁화, 국가 존립 위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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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환 한국외국어대 교수 국제정치학

미국 미시간주 그랜드래피즈에 있는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 기념관에 들어서면 눈에 띄는 2개의 숫자가 보인다. 퇴임 시 미국의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율을 나타낸 것이다. 결국 민생에 주안점을 둔 그의 정책적 의지를 보여준다. 또한, 그의 일대기를 다룬 동영상을 관통하는 그에 대한 평가는 ‘국내외 위기를 극복한 지도자’이다.

포드는 1970년대 초 1차 오일쇼크의 경제적·사회적 충격과 닉슨 독트린에 따른 외교적·안보적 격변의 위기를 극복한 대통령으로 평가된다. 새로운 업적을 쌓기보다는 지난 정권의 흉허물과 시대적 상황을 수습하려던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물론 닉슨을 사면한 일로 인해 여론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던 인물로, 또 재선(再選)에 실패한 대통령으로 그를 저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위기 때 기본에 충실했던 그의 리더십을 간과해선 안 된다. 그리고 헨리 키신저와 조지 H W 부시 등 훌륭한 참모를 중용한 그의 혜안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수개월 동안 우리는 대통령 탄핵소추라는 국가적 사안에 매몰돼 나라가 표류해 왔다. 한마디로 경제도 안보도 불안정한 상황이다. 지금 청년 실업과 스태그플레이션의 늪에 빠진 우리의 경제는 단기적으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사드(THAAD) 배치와 북핵 개발로 인한 안보 논쟁은 국민의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문제는, 경제 위기 해결을 위한 이념 논쟁은 이해가 가지만, 안보 위기 해결과 관련한 이념 논쟁은 이제 시대착오적인 게 아닌가 하는 점이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을 앞두고 조기 대선을 예상하며 여야를 막론하고 자천타천 후보가 난립하고 있다. 보수와 진보의 구도 속에서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인지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사드 배치를 두고 반대하면 진보이고 찬성하면 보수인지, 북핵 문제를 두고 강경 대응하면 보수이고 온건 대응하면 진보인지, 외교적 사안을 두고 친미면 보수이고 친중이면 진보인지, 후보들은 표를 얻기 위해 편 가름을 위한 안보 정쟁 속으로 국민을 내몰고 있다.

지금 미국 도널드 트럼프 새 행정부의 친러·반중 행보가 거침이 없고, 우리는 미국과 중국의 틈바구니에서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북한 김정은의 정권 사수 광기(狂氣)는 최근 김정남 청부 살해 사건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 끝을 알 수 없다. 독도 문제와 관련한 일본의 행태는 이미 우리의 주권을 침해한 지 오래고, 러시아와의 관계도 진전 없이 소원한 상태다.

이런 가운데 우리는 안보 관련 보수와 진보 논쟁을 하고 있다. 노무현정부 초기 자주파와 동맹파의 노선 투쟁 속에서 동북아 균형자와 관련한 안보 논쟁이 있었다. 당시 논쟁은 세기적 전환기에 우리의 생존 전략을 모색하는 차원에서 노 정부 내의 안보 전략 논의로 자리매김 됐다. 그러나 오늘날의 안보 관련 보수·진보 논쟁은 정쟁에 불과하다. 차기 선거에서 득표에 유리한가 불리한가 하는 계산 속에서 ‘치고 빠지기’식인 것이다. 합리적 판단 속에 국익을 계산하고 국민을 이끌어가는 논쟁이 아니라, 여론 향배에 편승해 국민 다수의 의견을 선점하려는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는 미국식 일방주의와 중국식 일방주의 외교 사이에 놓여 있다. 미국식 일방주의의 동인이 균형이 진전돼 가는 한·미 관계 속에서 미국이 우방의 안보 분담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존재한다면, 중국식 일방주의의 동인은 불균형이 심해지는 한·중 관계에서 중국이 자국의 위상을 시위하는 차원에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사드 배치, 북한 핵·미사일, 대미·대중 관계를 두고 옥신각신하는 여야 후보들을 보면서 과연 안보 문제가 이념적 스펙트럼으로 다뤄져야 하는지 묻고 싶다. 더 이상의 수사적 기술로 우리의 안보 위기 해법을 제시해선 안 된다. 언제까지 진보 또는 보수 코스프레로 안보 정쟁을 벌이고 있을 것인가. 이제 안보에는 합리적 국익 판단만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의 상황은 미사여구(美辭麗句)로 화려한 업적을 남기려 하기보다는 현 정권의 흉허물과 시대적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정치권이 안보에 관한 한 보수·진보 스펙트럼에서 벗어나 국가 안위만을 염두에 둬야 한다. 국가 안보의 중심은 국가이익의 기본인 생존에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