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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뉴스와 시각 게재 일자 : 2017년 02월 24일(金)
혼돈 시대에 향나무 묻은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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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일 문화부 부장

이것은 보이지 않는 희망에 관한 이야기다. 기약조차 없는 어둡고 긴 고통의 터널을 지나면서도 백성들이 기댔던 희망의 꿈, 그리고 절망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매향비(埋香碑)는 ‘묻을 매(埋)’에 ‘향기 향(香)’자를 쓰는 이름 그대로 ‘여기에 향나무를 묻었음’을 알리는 오래된 비석이다. 매향비는 경남 사천에도, 전남 영암과 신안의 암태도에도 있다. 비(碑)라고 해서 잘 다듬어 번듯하게 세운 게 아니라 자연석에다가 향나무를 묻은 내력과 묻은 이들의 이름을 투박한 솜씨로 적어놓은 것이다.

고려 말 혼돈의 시대. 망해가던 나라의 권력은 탐욕과 부패로 눈이 멀었다. 창궐하는 왜구의 잦은 침략으로,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의 곳간을 채우기 위한 노역으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왜구의 약탈과 탐관오리의 학정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삶이란 곧 지옥도였을 것이었다. 고려 말 백성들이 ‘미륵의 도래’를 애타게 기다렸던 것은 그래서였다. 미륵은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이 세상에 출현하기로 예정돼 있는 부처다. 백성들은 미륵이 세상에 도래하면 고통의 모든 사슬이 끊기고 ‘좋은 세상’이 온다고 믿었다.

문제는 가늠할 수 없는 시간. 원효식 계산법으로 셈하자면 미륵이 오는 건 자그마치 56억7000만 년 뒤다. 예정된 구원을 믿기에는 너무나도 긴 시간이었다.

고려 말 백성들이 강과 바다가 만나는 갯벌에다 향나무를 묻고 그 자리에 매향비를 세웠던 건 미륵의 도래를 앞당기기 위한 것이었다. 갯벌에 묻어둔 향나무가 1000년이 지난 뒤에 침향(沈香)이 돼서 떠오르고, 그 나무를 쪼개서 향불을 피워올리면 미륵이 온다고 믿었다. 그들이 믿은 건 한낱 나무가 아니라 미래의 꿈이었다. 이렇게 앞당긴대도 미륵이 오는 건 1000년 뒤의 일. 그러므로 그들은 ‘당대의 구원’을 포기한 셈이었다. 매향비가 묵직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건 당시 백성들이 자신들의 피폐한 삶을 기꺼이 감내하면서도 먼 미래의 후손들을 위해 희망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라 안팎으로 온통 혼란스러운 시대에 매향비를, 그리고 그 매향비를 세운 사람들을 생각한다. 촛불과 태극기가 광장에서 대립하는 상황에서 코앞으로 다가온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 재판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우리 사회는 정치적 급변 상황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일각에서는 헌재의 판결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출구가 잘 보이지 않는 이런 상황에서 ‘나’의 구원이 아닌 ‘모두의 구원’을, 당대가 아닌 ‘후대의 구원’을 바라며 끝내 꺼뜨리지 않았던 옛사람들의 희망을 생각한다. 그들이 묻어놓은 향나무는 아직 떠오르지 않았고 미륵의 도래도 아직 멀었지만, 매향비에서 우리가 봐야 할 것은 ‘미륵’의 존재가 아니라 끝내 잃지 않았던 ‘희망’이다. 체념을 넘어서 그들이 지켜냈던 희망으로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그들이 후손들을 위해 향나무를 묻고 매향비를 세웠다면, 우리는 미래세대들을 위해 어떻게 불씨를 지킬 것이며 그렇게 지켜낸 희망의 기념비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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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ail 박경일 기자 / 문화부 / 부장 박경일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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