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 class='emp_01'>[단독]</em>‘빵빵한 매출’… 대전 빵집 성심당, 파리바게뜨·뚜레쥬르도 눌렀다](http://image.munhwa.com/gen_thumb/202404/2024041801072407205001_300.jpg?v=20240418174758)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소설가 박완서가 생전에 거주하던 경기 구리시 아치울마을의 ‘노란집’. 화가 김점선은 원래 붉은 벽돌집이었던 이곳 아래채에 처음으로 화실을 열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69) 화가 김점선의 경기 구리시
“예술가는 굳어지지 않는 외피를 가졌어. 하루에도 몇 번씩 밀물과 썰물에 시달려. 예술은 수십 년을 해도 숙련이 되지 않아. 매우 섬세한 감성으로 이 세상을 버텨 나가는 인간들이지. 왜 우리는 이렇게 태어나 상처받고 느끼는가. 여덟 번 상처 받으면 겨우 한 번 희열을 느껴. 매일매일이 생살에 소금을 뿌리듯 아파. 그림이 요구하는 것은 엄정해. 싫은 그림은 캔버스를 목욕탕에 갖고 들어가 수세미로 지워. 그런 뒤 땅바닥에 눕혀 놓고 사포로 박박 벗겨내.”
화가 김점선(1946∼2009)의 작업실이 있던 ‘아치울(경기 구리시 아천동)’로 향하는 길에 이 말이 문득 떠올랐다. 2008년 5월, 암투병 중이던 그는 ‘앙괭이가 온다’라는 첫 동화책을 냈다. 그 일로 선생은 한 여성지와 인터뷰를 했고, 난 동화 기획자의 자격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그때 했던 말이다. 나는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메모를 했다.
2004년 7월, 문득 우리들(당목클 멤버-당면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모여 만든 ‘당면에 목숨 건 사람들의 클럽’을 줄인 말로 김점선이 붙인 이름)에게 김점선은 아치울 박완서(1931∼2011) 선생 댁에 가자고 했다. 가서 밥을 해달라고 조르자고 했다. “우아, 박완서 선생님 댁에요?” 김점선을 만나면 까닭 없이 어린아이가 된다. 우리들은 그를 따라 무조건 아치울로 갔다. 박완서 선생이 마침 계셨고, 우리는 선생 댁 앞마당에 핀 꽃들과 집앞의 개울과 산을 바라보며 해종일 놀았다. 그날 박완서 선생이 이렇게 말했다.
“김점선이 왔으니 밥을 해준다.”
김점선은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박완서 선생이 사시던 아치울 ‘노란집’은 화가 김점선도 살던 곳이었다. 박완서 선생이 1998년 ‘노란집’을 지어 아치울로 이사 오기 전, 이곳에는 붉은 벽돌집이 있었고 그곳에 김점선이 살았다고 한다.
아치울로 들어서자, 13년 전 그날의 풍경들이 오롯이 떠올랐다. 혹시 그날 김점선이 이곳에 갑작스레 오자고 한 것은, 같은 개성 출신인 박완서 선생이 있고, 첫 화실을 가졌던 이곳이 그토록 그리워하는 개성집 같은 곳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김점선의 기억 속에 개성은 완벽하게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따뜻한 할머니가 있었고, 책을 읽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는 고모가 있었고, 자애로운 큰엄마가 있던 공간이었다. 마당에 온갖 꽃들이 피어 있고, 게사니(거위의 방언)가 겅중겅중 뛰어다니고, 화장실에도 백합이 피어나던 ‘생명체가 살아 숨쉬는 집’이었다. 하지만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그 완전함은 깨어지고 만다. 전쟁이 끝나고 곧, 돌아가리라고 생각하고 피란 내려온 뒤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고 말았다. 피란을 오지 않았던 할머니와는 그 길로 영영 이별을 하게 된 것이다. 다섯 살 때 떠나온 그 집을 김점선은 또렷이 기억했다. 예순이 되도록 할머니를 만나는 꿈을 꾸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오리와 거위, 백합, 맨드라미 등의 꽃들은 개성집의 그것들임을 짐작한다.
“그림을 아주 많이 팔아서 광화문 빌딩들을 사들여야지. 그래서 그 빌딩들을 허물고 풀이 자라고 개울이 흐르고 벌레도 살고 뱀도 사는 것으로 만들자.”
장난스레 들려준 말이지만, 그 말 속에서는 인간의 원형, 삶의 공간의 원형에 대한 그리움이 배어 있다고 느꼈다. 그것은 곧 개성집의 재현을 꿈꿨던 듯하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아차산에서 내려다본 아치울마을. 많은 예술가들이 살고 있어 아치울 문화마을이라고도 불린다. 김낙중 기자
“대학을 졸업하고 자신의 의지로 살아야 하는 때가 되었을 때, 나는 죽음밖에 떠오르는 말이 없는, 낙오자가 되어 있었다. 대학원에 갔지만 한 학기만에 제적당했다. 맘에 안 드는 필수과목을 수강 거부했기 때문이다. 대학원 선생님이 나의 제적을 안타까워하면서 통역일을 소개해 주었다. 돈을 많이 받았지만 모으지 않았다. 행복하지 않았다. 다시 죽음과 마주섰다. 그때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림! 그림을 시작했다. 하루종일 그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림 그리는 일뿐인 것처럼 그렇게 살았다. 행복했다.”(김점선 산문집 ‘나는 성인용이야’ 중에서)
김점선은 1972년 높은 경쟁률을 뚫고 홍익대 대학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대학원에 입학한 김점선은 동료들과는 뚜렷이 달랐다. 원근법이나 구도를 무시하고 단순하고 투명한 선과 색채로 말과 오리, 꽃을 그렸다. 미술 교육을 정식으로 받은 사람들의 눈에 김점선의 그림은 ‘그림’이 아니었다. 아이들 장난 같았다.
대반전이 일어났다. 그해 여름 제8회 파리 비엔날레 출품 후보를 뽑는 제1회 앙데팡당전이 열렸다. 김점선은 관념예술에 속하는 작품을 출품했고, 후보작으로 선정됐다. 화단에 화려하게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하지만 그의 표현에 의하면 “관념미술에 염증에 느껴 미련 없이 찬란한 무대에서 내려왔다”고 했다.
찬란한 무대를 스스로 걸어 내려온 김점선은 자신만의 그림을 그렸다. 김점선이 그림에서 추구하는 정신은 ‘자유’였다.
“모든 사람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그림을 잘 그릴 필요는 없어. 누구나 그림을 그릴 수 있어.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한다고 생각해. 그게 왜 그런 줄 아나? 그림은 다빈치처럼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그런 고정관념 속에 갇혀 있기 때문이지.”
평소의 이런 그의 생각은 그림 속에 고스란히 투영된다. 마치 어린아이가 그린 듯한 천진무구한 그림을 보면, 그림에 대한 고정관념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경계가 없이 무한히 확장되는 세계에 풍덩 빠질 수 있다.
그는 고등학교 때 사회 선생님으로부터 학창 시절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미술 시간에 말을 그리라는데 아무리 그려도 말을 그릴 수 없어 글로 ‘이것은 말이다’라고 썼다는. 김점선은 그림 그리는 일에서도 고통으로 눌리는 것이 기가 막혔다. 그로부터 15년 후 화가가 된 김점선은 버스를 타고 가다가 문득 고등학교 때 그 선생님이 생각났다. 그 사회 선생님을 괴롭힌 것을 ‘다빈치 콤플렉스’라고 규정지었다. 다빈치처럼 잘 그리려고 하기 때문에 생긴 고통과 두려움이 그것이다. 그는 “자유선언으로서의 그림, 정신을 억누르는 돌덩이를 분쇄해내는 그림, 카리스마에 반항하는 그림, 자유의 원형을 탈환하는 그림을 그려야겠다”(김점선 그림에세이집 ‘바보들은 이렇게 묻는다’ 중에서)고 생각했다.
다음 정류장에서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되돌아간 그녀는 그림을 그렸다. 아무렇게나 말을 그렸다. 왼손으로 그리고 빨간색을 칠했다. 그리고 캔버스에 ‘이것은 말이다’ 하고 연필로 썼다. 그 그림을 발표했다. ‘또라이, 사이코’라는 말들이 돌아왔다. 하지만 줄기차게 그런 그림들을 그렸다. 그림으로써 고정관념에 저항하는 방식이었다.
“직선 산행해 봤냐? 주어진, 단단하게 다져진 길로 가는 게 아니라 내가 맘속으로 그린 길로 산행을 하는 거야. 그 길로 가다 보면 바위도 만나고, 비탈도 만나. 그래도 피해 가지 않아. 그러면 나뭇가지에 옷이 찢기고, 나뭇가지에 쌓여 있던 먼지가 묻고, 머리는 헝클어져 산발이 돼. 그렇게 길 없는 길을 갔다 내려오면 사람들이 뭐라 하는지 아냐? 미쳤구나!”
김점선은 어느 날 화실이 있었다는 ‘노란집’ 아래채 창가에서 아차산을 바라보다가 직선 산행을 감행했다는 얘기도 한 적이 있다. 선생의 화가로서의 길도 직선 산행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다녀 잘 다져진 길은 그를 전혀 매혹시키지 못했다. “길이 없는 곳을 걷는다는 것은 숲을 감상하는 일 더하기 숲이 가진 모든 해악과 위험을 깊이 체험하는 일이다”는 말처럼, 그는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걸음으로써 화단에서의 냉대는 물론 혹독한 가난과도 싸워야 했다.
‘시를 읽고 노래 부르는, 야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완전한 백수’인 남자, ‘노래를 부를 때만이 비로소 아름다운 인간’인 남자와 결혼을 한 선생은 결혼 초기 심각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때 그는 생각했다. ‘첫째, 이대로 죽는다. 둘째, 도둑질을 한다. 그러나 도둑질은 절대 못하고, 어차피 죽을 것이니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리자.’
김점선은 팔이 아프도록 그림을 그렸고, 그 때문에 오십견이 찾아왔다. 오십견은 화가 김점선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팔이 아파 그림을 한동안 그리지 못하고 있는 그에게 아들이 컴퓨터를 사다 주었다. 처음에는 자판 연습만 했다. 그러다 우연히 컴퓨터 속에 다양한 색채와 공간이 숨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컴퓨터 그림은 김점선의 작품 세계에 신기원을 이룬다.
“시나 소설은 아무리 많이 팔려나가도 괴롭지 않아. 책으로 만들어지면 그 글을 누구나 공정하게 소유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림쟁이들은 달라. 누가 내 그림이 좋다고 사 가지고 가면 나는 다시는 그 그림을 볼 수도, 공유할 수도 없어. 그건 정말 말도 못하게 슬픈 일이지. 그런데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면서부터는 그런 슬픔이 해결되었어. 잡지사, 출판사 등 아무리 여러 군데 그림을 퍼서 보내도, 원본은 그대로 컴퓨터 속에 있으니까.”
딱 한 점밖에 없는 캔버스에 그린 그림이 팔려 나갈 때 마치 신체 일부가 잘려 나가는 아픔을 느꼈다고 그는 말했었다. 그런데 컴퓨터 그림을 그림으로써 그 괴로움이 해소되었다. 심지어 공유하는 기쁨까지도 누리게 되었다. “수천억 장 찍어서 그림이 지구를 덮으면 가난해서 그림을 못 걸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 가난해서 시각적인 꿈을 접하지 못하고 사는 인간이, 바로 여기 이 세상에 남아 있을까?”(‘바보들은 이렇게 묻는다’ 중에서)
대중과 나누는 미술을 추구하는 김점선의 가치관은 그렇게 실현되었다. 아치울 마을에서 ‘직선 산행’이 아닌 둘레길을 따라 아차산에서 마을을 내려다본다. 김점선이 어느날 문득 직선 산행을 했다는 그 길을 눈으로 죽 그려보았다. 나뭇가지를 헤치고 바위를 오르느라 옷은 찢기고 먼지투성이가 된 채 산을 오르는 화가 김점선이 곧 눈앞에 보일 듯하다.
김진 동화작가
;){kind=li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