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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이미숙 논설위원 게재 일자 : 2017년 03월 03일(金)
北 독가스 VX와 ‘시리아式 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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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숙 국제부장

풀리지 않는 국가 간 갈등의 이면엔 강대국의 이해 충돌이 깔려 있는 경우가 많다. 북핵 문제가 제네바 합의 이후 20여 년째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은 북한에 대한 미·중의 지정학적 계산이 근본적으로 대립하기 때문이다. 미·중이 ‘하나의 중국’에 공감하면서도 자유민주주의 체제인 대만의 존재를 현실적으로 부정하지 못하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다. 2011년 시리아 내전 발발 후 6년여간 수십만 명이 죽어 나가도 전쟁이 끝나지 않는 것이나, 우크라이나 분쟁이 지속되는 것은 미·러 전략 충돌 때문이다.

최근 말레이시아에서 독살된 김정남의 사인이 대량파괴무기(WMD)로 분류되는 신경성 독가스 VX 중독으로 밝혀지면서 북한의 화학무기는 핵 문제 못지않게 화급한 위협으로 부상했다. 화학무기는 핵무기와 달리 언제 어디서나 사용될 수 있는 치명적 무기라는 점이 새삼 입증됐기 때문이다. 수교를 맺고 있는 상대국의 국제공항에서 독살 테러를 자행한 김정은의 대담성과 잔혹성을 볼 때, 북한 간첩들이 서울 한복판에서 VX를 동원한 테러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고모부인 장성택을 총살한 데 이어 고위인사들을 무더기로 숙청해온 김정은이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김정남을 보란 듯 독살한 것은 국제사회에 북한의 화학무기 수준을 과시하기 위한 작전일 수도 있다.

북한은 화학무기가 없다고 발뺌하지만, 한국국방백서에 따르면 북한은 2500∼5000t의 화학무기를 보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미 군 당국은 북한이 VX의 핵심원료를 분리해 만든 신형 이원화탄(VX-2)을 전방포병부대에 배치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북한이 VX-2를 남쪽으로 발사할 경우 한국은 순식간에 패닉에 빠지게 된다. 화학무기는 핵무기보다 훨씬 더 현실적인 위협이 된다는 점에서 그간 원점을 맴돌아온 북핵 협상에 대한 관심을 보다 현실적인 화학무기 협상 쪽으로 돌려야 할 상황이 됐다.

문제는 북한이 화학무기를 포기하도록 만들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김정일시대엔 대화와 협상이라도 진행됐지만 김정은은 문을 꽁꽁 걸어 잠근 채 VX 같은 WMD 개발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정은을 굴복시키려면 미국과 중국이 나설 수밖에 없다. 미·중 관계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한반도 배치, 남중국해 갈등까지 겹쳐지면서 불편한 상태지만, 화학무기는 중국에도 위협인 만큼 두 강대국이 공동 해법을 마련해야 할 현안이다.

이를 위해 2013년 미·러가 합의한 시리아 화학무기 해법은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될 만하다. 버락 오바마 당시 미 대통령은 시리아 내전에서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이 화학무기를 사용한 증거가 나오자 “화학무기를 자진 신고·폐기하지 않을 경우 군사개입을 하겠다”고 압박했다. 이런 의지는 러시아를 움직였고 결국 미·러 외교장관이 나서서 알아사드 대통령을 굴복시켰다. 시리아는 2013년 9월 화학무기금지조약(CWC) 가입 선언을 한 뒤 보유 화학무기를 신고했다. 이듬해 미국 등은 이것을 국외로 반출해 폐기한 바 있다. 시리아 내전은 알아사드를 비호하는 러시아 때문에 계속되고 있지만, 화학무기 문제는 해결 수순에 접어든 것이다.

김정남 독살로 공론화된 북한의 화학무기 문제도 비슷한 과정을 거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이 화학무기를 신고·폐기하지 않을 경우 군사적 카드를 동원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면서 VX 해결을 위한 미·중 협상에 나서야 한다. 이럴 경우 중국은 최후 수단인 대북 석유 지원중단 카드를 꺼낼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이 연간 50만t의 석유 지원을 중단하면 북한은 멈춰 설 수밖에 없다.

그간 김정은이 핵 개발에 골몰하며 화학무기를 제조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이 눈을 감아줬기 때문이다. 거기엔 김정은이 어떤 패악을 저질러도, 북한 체제가 붕괴돼 중국이 주한미군과 국경을 맞닿게 되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렇지만, 북한의 도발은 국제적 레드라인을 넘어선 지 오래다. 당장 북한의 화학무기 폐기 조치를 하지 않는다면 한국은 물론 중국, 일본의 요인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독살되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동북아의 안보 자체가 위협받는 미증유의 사태로 비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북한 화학무기 위협이 더 확산되기 전에 미국과 중국이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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