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늦기전에 엄마와 걸어보세요”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독자들도 저마다의 골목을 엄마와 걷고, 이야기하고, 웃었으면 좋겠습니다. 더 늦기 전에, 부디!” 진해의 어느 거리에서 엄마와 함께한 김탁환(오른쪽) 작가. 난다 제공

엄마의 골목 / 김탁환 지음 / 난다

올해 마흔아홉인 작가 김탁환이 고향 진해에 홀로 살고 있는 일흔다섯인 모친을 여러 차례 찾아가 곳곳을 함께 걸어보고 쓴 에세이다. 출판사가 내고 있는 ‘걸어본다’ 시리즈의 진해편인데, 그저 기행 에세이라기보단 작가의 생애에 처음 쓰게 된 엄마의 이야기이며, 그 생명의 고향으로부터 자신이 어떻게 작가로 만들어졌는지에 관한, 그래서 허구가 없는 소설같기도 하다. 엄마와 진해의 골목 구석구석을 걸으며 나누는 대화에서 늙음, 시간, 사랑, 예술에 대한 단상들이 건져 올려 진다.

그는 이 책에 두 가지 골목이 있다고 말한다. 엄마와 함께 걷는 골목과 엄마 마음의 골목이다. 두 아들이 있지만 31년 동안 혼자 산 엄마, ‘고독’이란 단어를 수백 번도 더 소설에 썼지만 엄마의 고독을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없었던 작가에게 그 ‘엄마의 골목’을 처음 들여다보는 여행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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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위한 걷기를 하기 전에 작가의 엄마는 10권이 넘는 사진 앨범을 모두 태워 없앴다. 아버지와의 사진은 물론 작가 형제의 어릴 적 사진들도 많았기에 당혹스러웠다. “지나간 거니까. 사라진 것은 곱게 보내야 해”라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엄마의 대답이었다. 골목을 걸으며 나중에 엄마에게 그 이유를 듣게 된다. “매일매일 네 아버지가 떠올랐어. (앨범을 없앤 건)화가 나서 그랬어. 너무 또렷하니 화가 나더라고.” 하지만 더 지나 엄마는 “후회스러운 일이 하나 생겼어. 앨범을 모두 버린 것”이라고 고백한다. 엄마의 골목 풍경 중 하나일 것이다.

작가는 얼마전부터 책날개에 들어가는 자신의 약력에 “고향 진해로 돌아가 장편작가가 되었다”고 적었다. 그가 해군사관학교에서 강의하며 학자와 작가의 길을 고민했고, 당시 데뷔작의 초고를 쓰기도 했지만, 거기서 진해는 곧 엄마이기도 하다. “엄마를 무게중심으로 삼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멀리 날아가려 발버둥 쳐왔다. 엄마가 강한 만큼 내 상상의 폭도 넓어졌다. 엄마는 결정적인 순간 믿어준 내 사람이었다.” 그가 진로를 선택해야 할 순간마다 엄마가 했던 말, “네 맘대로 하렴”은 길이 돼주었다. 어릴 적부터 작가에게 오늘 읽은 이야기책의 줄거리를 물어 상상력과 글쓰기의 힘을 키워준 것도 엄마였다. 이야기 솜씨가 탁월했던 작가의 증조 외할머니 ‘구석할매’를 비롯해 예민한 예술적 기질을 저마다 드러냈지만 살리지 못했던 엄마와 이모, 외숙들, 특히 작가가 ‘앵두의 시간’에서 그렸던 단명한 치숙(癡叔)은 작가의 예술가적 핏줄을 짐작하게 한다.

사진기를 들면 등부터 돌리는 엄마는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해. 젊음은 내게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란다”라든지, “늙는다는 건 낯설어진다는 거야. 그리고 끝내는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게 되지”라고 말한다. 매일 펼쳐보고 펼쳐보았을 앨범을 없앤 이유 중 다른 하나도 “…젊든 늙든, 결국 다 사라질 테니까”라는 세월에 대한 엄마의 생각을 엿보게 한다.

물론 책에는 진해의 거리와 골목은 물론 군항제와 바다에 얽힌 에피소드들이 여럿 나온다. 해군 장교로 복무했던 작가는 엄마와 진해 해군교육사령부 앞을 지나며 “네가 훈련받는 동안, 여길 서성거렸어. 훈련병들의 함성이 들릴 때까지 기다렸지”라는 얘기를 처음 듣는다. 가을비 내리는 진해 바다 길을 걷다가 작가는 엄마에게 “바다의 유혹에 걸려들어 독자를 유혹하는 작가가 됐다”고 들려주기도 한다. ‘아들과 걸어 행복하고, 남편과 걷지 못해 불행한 여인’과의 꼬리를 무는 대화를 나눈 뒤 작가는 “엄마가 쉰 살 때, 예순 살 때, 일흔 살 때, 왜 이렇게 마주하지 못했을까”라고 회한을 보이면서, 독자들에게 늦기 전에 한번 꼭 해보도록 권유한다.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