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法治와 協治로 국가위기 넘자>분열 수습·새 질서 확립… 확고한 법치만이 혼란 막는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사저로 들어가는 경호차량 13일 오전 서울 강남구 삼성동 박근혜 전 대통령 사저 앞에서 한 경호 차량이 경비 근무 중인 경찰의 통제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② 위기보다 무서운 아노미

법치는 보수진영의 핵심가치
‘태극기’는 이를 부정말아야
촛불진영도 사안 있을때마다
광장에서 해결하려해선 안돼

두달여간 리더십 공백 불가피
‘게임 룰’ 지켜 갈등 최소화를

사상 초유의 대통령 파면 사태 이후 한국 사회는 법치주의 수호라는 확고한 원칙 아래 국면을 수습하고 새로운 질서를 확립해야 한다는 전문가·원로들의 지적이 제기됐다. 특히 박근혜 전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불복하는 듯한 발언을 하고 탄핵을 반대해 온 세력이 불법·폭력 집회를 벌이는 상황에 대해 보수가 스스로 자신의 핵심 가치를 부정하는 모순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촛불’에 대해서도 제도적 틀, 즉 정치와 국회 내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확고한 법치로 아노미 막아야 = 법조계 전문가들은 대체로 헌재 결정에 승복하는 모습이 법치주의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구유고슬라비아국제형사재판소(ICTY) 상임재판관과 부소장을 지낸 권오곤 한국법학원장은 13일 문화일보와의 통화에서 “게임의 룰을 정했으면 그것에 따라야 하는 게 법치”라며 “물론 개인적으로 승복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것도 법이 정해준 제도 안에서 토론을 하는 등 해야지, 법치 이외의 틀에서 뒤집어엎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권 원장은 “특히 폭력이나 테러 시도는 엄벌이 필요하다”며 “우리나라는 역사적 배경이 ‘국가 폭력에 대응하는 폭력은 정당하다’는 인식이 있을 정도로 폭력적 시위에 무디고, 벗어나지 못하는 게 있는데 이제는 이런 폭력 선동 등을 엄격히 처벌하는 성숙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밝혔다.

이찬희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도 “갈등 및 분쟁 해결을 법치주의의 토대에서 하기 위해 헌법재판소를 만들었고, 그것에 따르기로 약속한 것”이라며 “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떤 결정에 대해서든 비판은 가능하지만 폭력 집회와 같은 불복 운동은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헌재 결정에 대한 승복을 넘어 앞으로 개혁과 새로운 질서 확립에 있어 법치주의가 기본 원칙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데에도 공감했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제는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헌법을 위반했을 때 파면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는 선례가 만들어졌다”며 “향후 권력에 헌법을 준수하라는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이번 결정의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김상겸 동국대 법대 교수는 “헌재가 결정한 것처럼 국가 기관이 법에 따라 국민의 뜻을 존중해야 하는 걸 알았고 이게 이제 자리잡힐 것”이라며 “국민도 일상에서 법치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향후 두 달여간 국가 ‘리더십’의 공백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질서 확립과 개혁, 후속 검찰 수사 등이 자칫 심각한 사회 갈등으로 번질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만큼 확고한 법치만이 극심한 혼란을 막을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보수는 스스로 가치 부정하는 행위 중단해야 = 전문가들은 특히 헌재의 탄핵 인용 결정 이후 3명의 사망자가 나올 정도로 거친 폭력 집회를 벌인 보수 진영에 우려를 나타냈다. 탄핵 반대 진영이 아예 헌재 결정에 불복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일부 친박(친박근혜)계 정치인들이 ‘불난 데 기름 붓듯’ 이 같은 움직임을 부추기고 있는 상황에 대해 보수 진영이 자가당착에 빠졌다는 지적도 있다.

김상겸 교수는 “보수들이 법치를 주장했는데, 이게 그들이 이야기한 법치인가”라고 되물으며 “독선이고 위선이었던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김 교수는 “과격 집회, 폭력 집회는 집회가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장영수 교수는 “탄핵 반대 집회 참가자들은 저항권이라는 근거를 들고 있는데, 저항권은 헌법 질서가 파괴되거나 독재화돼 법적 제도로 회복될 수 없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라며 “헌재라는 법적 제도를 통해 탄핵이 이뤄진 것을 두고 저항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맞지 않는 이야기”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박 전 대통령 탄핵 반대에 앞장섰던 정광용 국민저항본부 대변인은 “우리는 지난 10일 헌법재판소발 국가반란적 판결에 승복할 수도, 굴복할 수도 없다”며 “헌법상 주권자인 국민의 이름으로 헌재 해산을 요구하고, 헌법재판관 9명을 새로 지명해 다시 심판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고 회원들에게 공지했다. 하지만 공권력과 법치에 대한 존중을 강조해 온 보수 진영이 헌법 심판의 최고기관이 전원일치로 내린 결정에 불복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더구나 그 같은 불복 운동이 불법·폭력 집회로 변질되는 것은 더욱 국민 여론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촛불도 모든 것을 광장에서 해결하려 해선 안 돼 = 모든 사안을 광장에서만 해결하려는 방식은 해소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무조건 제2, 제3의 촛불, 광장정치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더 이상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을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국론 분열을 조기에 해소하기 위해 촛불이 먼저 나서야 한다는 조언도 있다. 초대 헌법재판연구원장을 지낸 허영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는 “자꾸 승리대회를 열어 열 받은 사람 뺨 때리는 건 국민 갈등만 키우는 것”이라며 “촛불도 자제하는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허 석좌교수는 “승리한 측에서 자제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패배한 측에서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정치권, 국민통합 비전 내놔야 = 무엇보다 정치권이 차기 권력을 획득하는 데에만 정신이 팔리지 않고 국민 통합의 비전을 보여줘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허 석좌교수는 “사실 정치권이 촛불이나 태극기 집회 현장에 나가서 국론 분열을 부추기는 목소리를 계속 냈다”며 “‘기각이 되면 혁명을 한다’느니 ‘인용이 되면 피바다 된다’느니 국민을 부추긴 건 정치권 책임”이라고 비판했다. 허 석좌교수는 “이 시국에선 여야를 떠나 정치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국민을 향해 국민 통합 내용을 담은 합의된 발표문을 내는 것도 방법”이라고 제안했다. 권 원장도 “헌재 결정 전부터 정치인들이 나서서 장외 설전하는 모습은 비판받아 마땅하다”며 “정치인들부터 법률이 정해준 장과 틀 안에서 활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병기·정철순·이후연 기자 mingmi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