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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카페 게재 일자 : 2017년 03월 15일(水)
“물 출렁이면 배 뒤집히듯, 백성이 어지러우면 나라 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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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 = 전승훈 기자 jeon@

최연식의 역사 이야기 - (23) 남인 영수 허목 ‘君舟民水論’ <끝>

마른 몸에 헌칠한 키(而기) 우묵한 정수리에 긴 수염과 눈썹(凹頂而鬚眉) 손엔 문(文) 자, 발엔 정(井) 자 무늬가 있고(握文履井) 담담하고 화평하다(恬而熙)

이 글은 노년의 허목이 자신의 초상화에 붙여 자신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그의 술회에 따르면 그는 나면서부터 손에 ‘문’ 자 무늬가 있었고, 눈을 덮을 정도로 눈썹이 길었다. 그래서 스스로 자(字)를 문보(文父)로 정했고 별호를 미수(眉수)라고 지었다. 정수리가 우묵하게 파인 것은 공자(孔子)와 닮았고, 길고 흰 수염과 눈썹은 전설 속 노자(老子)를 닮았다.

아쉽게도 당시의 초상화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보물 1509호로 지정된 현존 초상화는 허목의 인품에 감동한 정조가 초상화 제작을 지시하자, 어진화사(御眞畵師) 이명기가 82세 때의 초상화를 가져다 정조 18년(1794)에 모사한 것이다. 비록 허목 생존 시에 화가가 직접 보고 그린 것은 아니었지만, 당대 최고 초상화가의 붓을 통해 허목 자신이 묘사했던 노학자의 담담하고 화평한 풍모가 오롯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숙종실록’에 기록된 허목에 대한 평가는 가혹했다. ‘숙종실록’ 1년 4월 10일 자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허목은 본래 학술이 없었고 몸가짐도 단정하지 못했지만, 전자(篆字)를 잘 썼다.” “허목은 밖으로는 대범하고 명랑한 것 같지만 속은 간사했으며, 눈썹의 길이가 거의 한 치나 되었기에 스스로 미수라고 호를 지었다. 그러나 눈초리가 굽고 눈동자가 분명치 못했다.” 허목에 대한 평가가 이처럼 엇갈리게 된 것은 그가 남인의 영수였고 ‘숙종실록’은 서인 주도로 기록됐기 때문이다.

훗날 남인의 영수가 된 허목은 1595년 12월 한양 창선방(彰善坊)에서 태어났다. 그는 9세 때 글을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백 번을 읽지 않으면 외우지 못했지만 책 한 권을 뗀 후에는 막힘없이 글 뜻을 해석했다. 그는 19세 때 청백리(淸白吏)로 유명한 이원익의 손녀에게 장가들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손녀 사윗감을 찾던 이원익이 가난한 선비 허목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린 결정이었다. 이원익은 평소에도 허목에게 예의를 갖춰 대하며 “뒷날 내 자리에 앉을 자는 이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 후 허목은 집안의 기대에 부응해 예학(禮學)에 밝은 정구를 스승으로 섬겼고, 여러 유학 경전을 익히며 과거를 준비했다. 그러나 인조 4년(1626)에 발생한 한 사건을 계기로 그는 평생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사건은 그해 1월 인조의 생모 계운궁 구씨가 사망하면서 시작됐다. 이때 인조는 계운궁의 상을 3년상으로 치르고자 했고, 이를 통해 자신의 생부 정원대원군을 덕종으로 추숭할 의지를 피력했다. 인조의 주장은 정원대원군을 임금의 아버지로 인정한 박지계의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반면에 조정에서는 선조와 인조를 부자 관계로 보고 정원대원군과 인조를 숙질 관계로 간주하는 것이 중론이었다. 이 모두가 선조의 손자인 인조가 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발생한 사달이었다. 그리고 이 논란의 와중에 동학(東學)의 재임(齋任)을 맡고 있던 허목이 3년상의 이론을 제공한 박지계에게 임금의 뜻에 영합해 예를 어지럽힌(逢君亂禮)죄를 물어 유적(儒籍)에서 삭제했다. 그러자 인조는 이에 분노해 허목에게 과거 응시 정지 처분을 내린 것이다. 32세 되던 해의 일이다.

그 후 인조가 재위하는 기간 내내 허목에게는 정치에 참여할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가 처음으로 조정의 부름을 받은 것은 56세 되던 해 효종 1년(1650)이었다. 이 해에 그는 정릉 참봉(종9품)에 제수됐지만 한 달 만에 사직했다. 이후 그는 효종의 조정에서 내시교관(57세·內侍敎官·종9품), 조지서 별좌(62세·造紙署別坐·종5품), 공조 좌랑(62세·工曹佐郞·정6품), 용궁 현감(62세·龍宮縣監·종6품), 공조 정랑(63세·正郞·정5품), 사헌부 지평(63~64세·司憲府持平·정5품), 부사직(64세·副司直·종5품), 사헌부 장령(65세·掌令·정4품)에 제수됐다. 현종이 즉위한 후에는 사헌부 부호군(65세·副護軍·정4품), 장악원 정(65세·掌樂院正·정3품), 사헌부 장령(65세), 상의원 정(65세·尙衣院正·정3품)에 제수됐다.

그러나 그의 관직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헌부 장령으로 재직하던 현종 1년(1660) 3월에 상소를 올려 1년 전인 기해년의 복제(服制) 결정을 반박한 것이 원인이었다. 원래 기해년 당시에는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가 효종의 상에 입을 복제를 기년복(朞年服·1년복)으로 결정한 바 있다.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이 주도한 결정이었다. 그러자 허목은 기해년의 결정이 잘못됐다며 자의대비의 복제를 3년복으로 바로잡자고 주장했다. 결국 기해년의 예송(禮訟)에서는 서인의 주장이 채택됐고, 남인에 속했던 허목은 외직인 삼척 부사(三陟府使·종3품)로 좌천됐다.

허목은 66세에 맡은 삼척 부사직을 성실히 수행했다. 그는 삼척에 부임하자 곧바로 향약(鄕約)을 시행해 그 지역의 풍속을 교정했고, 해일과 재난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를 건립했다. 그러나 그의 부사직 수행은 22개월 만에 중단됐다. 새로 부임한 관찰사에게 의례적으로 공물을 바치던 도계진상(到界進上)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연천으로 낙향해 10여 년간 독서와 저술로 일상을 보냈다. 그의 문집인 ‘기언(記言)’의 서문을 완성한 것도 이 시절(73세)이었다. 그가 그의 문집을 남달리 ‘기언’이라고 명명한 것은 말을 하면 반드시 써놓고 날마다 반성하고 힘쓰겠다는 각오를 다지려 했기 때문이다.

낙향해 노년을 보내던 허목은 현종 15년(1674)에 갑인예송(甲寅禮訟)이 시작되자 다시 남인의 입장을 대변했다. 효종비 인선왕후를 위해 자의대비가 입을 상복의 종류를 둘러싼 이때의 논쟁에서 서인들은 대공복(大功服· 9개월복)을 주장했고, 허목과 남인들은 기년복을 주장했다. 기해예송 때는 서인이 승리했지만, 이번에는 현종의 지지를 받은 남인설이 채택됐다. 그 결과 갑인예송 직후 승하한 현종에 이어 숙종이 14세의 나이로 보위를 잇는 혼란한 정국 속에서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됐다.

남인 정권이 수립된 직후 허목은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종2품)에 임명됐다. 그의 나이 80세 때의 일이다. 이때 숙종은 그를 불러들이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 경을 보니 비록 연로하지만 근력은 쇠약하지 않으니 사퇴하지 말고 나를 도우라.” 어린 나이에 즉위한 임금으로서 남인 영수의 전폭적인 지지가 필요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말이었다. 실제로 숙종은 그를 붙잡아 두기 위해 다음 해에는 81세의 그에게 이조 참판(吏曹參判·종2품),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정2품),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정2품), 이조 판서(判書·정2품), 의정부 우의정(右議政·정1품) 등의 직책을 연이어 맡겼다.

숙종은 나이는 어렸지만 꽤나 당당한 임금이었다. 숙종은 재위 1년(1675) 11월에 ‘주수도설(舟水圖說)’을 지어 신하들을 훈계했다. 배와 물의 비유는 ‘순자(荀子)’ 왕제(王制)편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임금은 배요, 서민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집어엎기도 한다(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 허목도 숙종의 의지에 부응해 ‘주수도설’을 해설하며 그 말미에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아, 백성이 어지러워지면 나라가 멸망하고 물이 출렁거리면 배가 뒤집힌다.” 민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군주는 결국 민중의 폭동으로 물러나게 될 것이라는 경고였다.

허목은 82세 때에도 숙종에게 모범적인 임금이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첫째는 입을 지키는 것(守口)이고, 둘째는 몸을 지키는 것(守身)이며, 셋째는 마음을 지키는 것(守心)이었다. 입을 지키면 망령된 말이 없게 되고, 몸을 지키면 망령된 행실이 없게 되고, 마음을 지키면 망령된 행동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허목의 숙종에 대한 충고는 그 후에도 계속됐고 숙종도 집까지 지어줄 정도로 허목을 극진하게 예우했다. 이때까지 임금이 신하에게 집을 하사한 경우는 세종 때 황희와 선조 때 이원익 두 사람밖에 없었다.

그러나 숙종의 남인에 대한 비호와 지지는 오래가지 않았다. 숙종은 재위 6년(1680)에 영의정 허적이 왕실의 유악(油幄·기름을 입힌 천막)을 임의로 가져다 썼다는 보고를 받고, “한명회도 못하던 짓”이라고 대로하며 경신환국(庚申換局)을 단행해 남인들을 대거 숙청했다. 허목은 이 사건이 불거지기 반년 전에 권력의 무상함을 다음과 같이 예견했다. “큰 권력이란 마치 용이 지나가는 곳과 같다. 반드시 뇌성벽력하며 변화가 진탕하고 나무와 돌을 뽑고 산과 내를 움직인다. 권력이 떠나갈 때에도 마찬가지인데, 그가 일찍이 두려워할 줄 모르니 애석한 일이다.” 그의 예견처럼 허목 자신도 환국의 광풍을 비켜 가진 못했다. 그해 5월에 그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직됐고, 그의 이름도 벼슬아치의 명부인 사판(仕版)에서 삭제됐다.

허목은 고문(古文)을 좋아했고 자족(自足)하는 삶을 추구했다. 그는 평생 옛사람의 교훈에 따라 자신을 지키려 했지만, 그에게도 허물이 없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말은 행동을 덮지 못했고, 행동은 말을 실천하지 못했다”며 스스로 책망했다. 병중에도 ‘주역’을 곁에 두고 누워서 읽던 미수(眉수) 허목은 미수(米壽·88세)를 맞은 1682년 4월 제자들에게 잘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문화일보 2월 8일자 24면 22회 참조)

연세대 교수

※ 최연식의 역사 이야기 연재를 마칩니다.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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