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아픈 삶을 뒤로하고 17년 만에 가요계에 복귀한 가수 양수경은 “나는 은퇴한 적이 없다. 잠시 휴식시간을 가졌을 뿐”이라고 강조하며 “아름다운 가수로 기억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김선규 기자 ufokim@
17년만에 컴백… 가수 양수경
‘이 밤 왠지 그대가／내 곁에 올 것만 같아／그대 떠나버린 걸／난 지금 후회 안 해요／그저 지난 세월이／내리는 빗물 같아요.’ 1990년 발표돼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가수 양수경의 대표곡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의 가사다. 현재 40∼50대 중장년층 중 이 노래를 한 번도 따라부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당시 큰 인기를 모았다. 1988년 ‘바라볼 수 없는 그대’로 데뷔한 양수경은 데뷔 초부터 뛰어난 가창력과 발랄한 무대 매너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대는’ ‘사랑은 차가운 유혹’ ‘이별의 끝은 어디인가요’ 등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가요계를 휩쓸던 그는 1998년 1월 소속사 예당엔터테인먼트 대표인 변대윤(본명 변두섭) 회장과 결혼한 뒤 1999년 홀연히 가요계를 떠났다. 전업주부로 지내며 남편의 사업에도 참여해 한때 ‘주식 부자’로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그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2003년 아버지가 암 판정을 받은 후 15일 만에 별세했고, 몇 년 뒤인 2009년에는 자신의 집 위아래층에서 함께 살던 여동생도 세상을 떠나자 두 명의 조카를 입양했다. 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13년 남편과도 사별한 그는 여동생의 아들, 딸과 자신의 아들 등 세 자녀를 홀로 키우며 팬들의 기억에서 잊힌 채 힘든 삶을 이어왔다. 그러던 중 지난해 7월 17년 만에 신곡을 발표하며 가요계로 돌아온 그를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50줄에 접어든 그는 여전히 소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털어놓았다.
인터뷰에 앞서 사진촬영을 진행했다. 새 소속사(오스카이엔티)가 생겼지만 이날 혼자 나온 그는 여러 벌의 의상을 직접 가지고 와 “어떤 색이 좋을까요”라고 묻고는 보라와 파랑이 어우러진 화려한 의상을 선택했다. 그런 모습에서 처음 연예계에 나온 신인 같은 설렘이 느껴졌다. 전성기 때 CF 모델로도 활동했던 그는 환한 표정으로 다양한 포즈를 취했다. 하지만 인터뷰가 시작되자 표정이 굳어지며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입을 열었다.
“근거 없는 말들이 우리 가족을 괴롭히고 있어요. 아직도 돈이 많아 아이들을 유학(세 자녀는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다) 보냈다며 제 기사에 ‘아이들을 죽이겠다’는 협박성 악플도 달리고 있어요. 채권자(그는 남편의 빚 일부를 떠안았다)들의 입장에서 험한 말을 해도 도의적으로 감수해야 하지만 지금 제 재산은 ‘0’이에요. 제가 편하려고 해명하는 게 아니라 저도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걸 말하고 싶어요. 저도 큰돈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걸 경험했기 때문에 그 마음을 잘 알지만 좀 너그러이 봐주셨으면 해요.”
눈물을 글썽이다가 조금 마음이 가라앉은 그에게 “결혼 후 평범한 주부로 살아가던 이야기를 해달라”는 말을 건넸다.
“처음에는 밤일을 안 해서 너무 좋았어요. 가수 활동을 하며 매일 7∼8곳의 업소를 돌았거든요. 워낙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돈을 버는 게 좋았지만 너무 바빠서 쉬고 싶은 생각도 있었어요. 그러다가 연예계가 분주해지는 연말이 돼 TV에 나오는 동료들의 모습을 보니 허전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무대 의상을 다 없애고 반짝이 옷 한 벌만 남겨뒀었는데 그걸 부여잡고 펑펑 울었어요. ‘조금 있다가 다시 노래를 해야지’ 하다가 지금까지 온 거예요. 아이 키우는 게 서툴렀지만 최선을 다했어요. 아이 뒤통수 예쁘게 해주려고 잠을 못 잤고, 이유식도 직접 만들어 먹였어요. 침구도 매일 소독했고요. 나름 바빴지만 늘 허전했어요.”
“나는 은퇴한 적이 없다. 잠시 휴식시간을 가졌을 뿐”이라고 강조하는 그에게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가요계에 복귀한 이유를 물었다.
“절박했어요.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다시 노래를 해야 했어요. KBS 2TV ‘불후의 명곡’ PD가 2년 동안 나와달라고 요청했지만 계속 거절해오다가 ‘더 이상 나이가 들면 기회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용기를 냈어요. 노래 부르는 건 제가 분명히 잘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무서워 아이들 보살피는 일을 피할 수는 없었어요.”
복귀 후 지난해 8월 KBS 1TV ‘콘서트 7080’ 무대에 처음 올랐다. 이날 이 프로그램은 ‘양수경 특집’으로 70분을 꾸몄고, 사회자인 배철수는 “선배로서 양수경 씨의 컴백을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축하인사를 전했다.
“그 무대는 평생 못 잊을 것 같아요. 가수 활동을 하며 수많은 무대에 서 왔지만 그날은 많이 떨렸어요. 독실한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 후 무대에 올라갔죠. 무대에 올라가서 객석을 바라보고 깜짝 놀랐어요. 팬들이 저를 보고 울고 있었어요. 20년 가까이 한 번도 나타나지 않은 저를 기다려준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니 뭉클해지며 눈물이 흐르더라고요. 외국 나갈 때 입국신청서 직업란에 ‘가수’라고 쓰다가 어느 순간 점만 찍게 됐어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로요. 아이들의 엄마로 살아온 시간도 행복했지만 가수로서 존재감을 다시 느끼며 가슴이 벅차올랐어요.”
지난해 10월에는 MBC ‘2016 DMC 페스티벌-레전드 토토가’에 나가 녹슬지 않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SBS 예능 프로그램 ‘불타는 청춘’에 출연해 진솔한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했다.
“연예인들을 직접 보니 신기했어요(웃음). 그러면서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도 들었고요. 특히 예능 프로그램은 정말 대단해요. 출연자들이 막걸리도 마시며 40시간 정도를 편하게 얘기하는데 그걸 3시간짜리로 재밌게 편집하니까요. 방송에 나가도 전에 알던 동료들을 만날 수 없어 조금 서운해요. 또 저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부담스럽고요.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따뜻하게 다가와서 기분이 좋아요. 물론 제가 힘든 일들을 겪어서 측은하게 보는 시선도 있겠지만 많은 분이 저를 보고 젊은 시절 추억을 떠올리는 것 같아요. 그런 시선을 받으면 힘이 나요. 아련함도 느껴지고요.”
오랜 공백을 깨고 다시 대중 앞에 나선 그가 가장 걱정한 건 무엇이었을까. 나이가 든 모습일까. 그는 “목소리가 잘 안 나와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꼭 다시 성공하자’는 각오로 나왔지만 처음부터 작곡가와 보컬 트레이너에게 혹독한 악평을 듣고 모멸감을 느꼈어요. 저 잘되라고 극약처방을 한 거겠지만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나이가 들며 근육이 약해지면 소리도 변해요. 목소리가 떨리게 되죠. 멋으로 떠는 게 아니라 힘이 없어서 떨리는 거예요. 목소리와 자세를 지적받으며 계속 연습하고 있어요. 매일 아들 사진을 보며 버티고 있죠. 지금도 많이 모자라지만 자세도 어느 정도 고쳤고, 소리도 조금씩 좋아지고 있어요. 소중한 기회가 주어졌으니 더 열심히 해야죠.”
그는 다시 노래를 하며 오랫동안 잊고 있던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고 했다.
“그냥 엄마로 살았어요. 행동이나 몸짓이나 모두 엄마였어요. 그냥 엄마가 아니라 ‘치맛바람’을 내는 열혈 엄마였죠. 아들을 전교 회장으로 만들었어요. 주변 분위기에 휘둘리는 치맛바람이 아니라 제 소신을 갖고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키웠어요. 그러다가 노래를 다시 하며 20년 동안 안 신던 하이힐을 다시 신어보고 깜짝 놀랐어요. 거울을 보니까 제 자세가 달라져 보이더라고요. 오랜만에 제가 ‘여자’라는 걸 느꼈어요.”
“지금의 양수경이 보여줄 수 있는 전성기 때와 다른 매력이 뭐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그는 “안정감”을 꼽았다.
“아직 부족하지만 제 노래가 전보다 차분해졌어요. 제가 무대로 걸어 나오면 객석에 있는 팬들의 추억도 같이 따라 나오거든요. 공감할 수 있는 추억이 있다는 게 제가 지닌 가장 큰 무기죠. 팬들을 대하는 제 마음도 편안해졌어요. 전에는 공연이 끝나면 팬들을 피해서 나갔는데 지금은 ‘한번 안아보자’고 하시면 안아드려요. 그런 게 좋아졌어요.”
2시간 가까이 인터뷰를 진행하며 그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그러면서 씩씩한 목소리로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계속 무대에 서서 팬들을 만나고 싶어요. 그러면서 아름다운 가수로 기억되고 싶어요. 또 저처럼 혼자 된 여성들을 돕는 일도 하고 싶어요. 법적인 일들과 생활고 등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몰라요. 국가에서 복지 정책을 펴지만 혼자 된 여성들을 돌봐주지는 못해요. 또 아이들이 궁핍하지 않을 정도로 돈도 벌어야죠. 돈이 많다고 행복한 건 아니니까요.”
미니앨범 타이틀 ‘사랑 바보’
“살게 해다오 웃게 해다오”
그녀 삶 닮은 가사 애달파
가수 양수경이 17년 만에 발표한 미니앨범에는 타이틀곡인 신곡 ‘사랑 바보’와 자신의 히트곡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 리메이크곡 나훈아의 ‘갈무리’·여진의 ‘그리움만 쌓이네’ 등 4곡이 수록됐다.
작곡가 하광석이 만든 ‘사랑 바보’는 양수경이 가사를 붙이진 않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아파할 가슴도 없어(중략)／살게 해다오／웃게 해다오’라는 내용이 그가 겪은 삶의 아픔과 닮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에 대해 양수경은 “이별 노래는 내게 안 맞는 게 없다. 어둡고 슬픈 노래를 안 하려고 ‘스마일 어게인’이라는 타이틀을 정해 놓았는데 결국 이 노래를 하게 됐다”며 “더 비참한 내용의 노래를 녹음해놓고 발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여러 히트곡 중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를 넣은 이유를 묻는 질문에 “비만 오면 라디오에서 이 노래를 틀어줘서 자연스럽게 내 대표곡이 됐다”며 “대중을 위해 이 노래를 선택했다”고 답했다.
리메이크곡 2곡은 각각 의미가 있다. 그는 “나훈아 선생님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선배 가수다. ‘불후의 명곡’ 300회 특집에서도 ‘갈무리’를 부를 예정”이라며 “나훈아 선생님 같은 가수는 두 번 다시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분이 다시 복귀하시길 바라는 응원의 의미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들 좋아하는 ‘그리움만 쌓이네’는 여성 팬들을 위해 넣었다”며 “처음에는 이 노래를 가볍게 생각했는데 여진 선생님을 직접 만난 후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사랑의 아픈 감정을 섬세하게 풀어낸 이야기를 듣고 배운 점이 많다”고 덧붙였다.
인터뷰 = 김구철 부장 (문화부) kcki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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