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인터뷰>“현재의 ‘超 위험사회’ 극복할 리더십이 19대 大選 승리할 것”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임혁백 고려대 명예교수가 10일 광화문 연구실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건강한 보수가 반드시 존재해 현재 다수가 된 진보를 견제하는 중용이 이뤄져야 한다”며 균형 민주주의 실현을 강조하고 있다. 김선규 기자 ufokim@

비교정치학의 大家 임혁백 고려대 명예교수

안경 너머 노교수의 눈빛은 형형했다. 한국 민주주의가 가는 길에 대해 그는 “역사는 발전을 막는 질곡을 넘어서면서 멈추지 않고 전진한다”는 답을 줬다. 지금은 위기 상황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것이다. 지난 2월 말 고려대에서 정년퇴직한 비교정치학의 대가 임혁백(65) 고려대 명예교수를 만났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와 촛불집회, 박근혜 전 대통령의 파면이 낳은 민주주의 논쟁 등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개헌, 5·9 대선, 남북관계 등 한국의 정치·사회 문제 전반으로 이어졌다. 비판은 엄혹했지만 대화는 따뜻했다. 인터뷰는 지난 10일 사방이 책으로 꽉 찬 그의 광화문 연구실에서 임 교수가 직접 내린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진행됐다.

임 교수는 “지금 대한민국은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가득한 ‘초위험사회’(super-risk society)”라고 진단했다. 그는 “초위험사회에서 공통으로 느끼는 위기와 불안감이 최 씨의 국정 농단 사태를 계기로 거대한 촛불집회 형태로 표출됐다”며 “초위험사회의 난제를 극복할 수 있는 해답과 이를 실천하는 리더십을 보여 줄 수 있는 후보가 이번 대선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임 교수는 “누가 대선에서 승리하든 차기 정권은 여소야대인 만큼, 협치 정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탄핵을 통해 “정치인들이 국민이 주권자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했고, 국민의 요구에 순응하는 것만이 살아남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촛불집회의 정치사적 의미를 설명했다. 이어 “탄핵에 불복하는 것은 민주 헌정 질서의 근간을 부정하는 범법 행위”라면서 “탄핵은 사법 재판이 아니라 정치 재판”이라고 강조했다.

임 교수는 “박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극우 보수 세력이 망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합리적 보수마저 몰락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며 “한국 민주주의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건강한 보수가 반드시 존재해서 현재 다수가 된 진보를 견제해 중용을 이루는 균형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민주주의는 갈등을 해결하는 가장 세련된 제도적 장치이자, 가장 평화적인 해법”이라며 “박 전 대통령의 탄핵도 헌법과 법률에 따라 민주적으로 이뤄졌다”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한국 민주주의는 여야 간 두 번의 평화적 정권교체에 성공하면서 권위주의 시대로 역전될 가능성이 없어질 정도로 공고화됐다. 그러나 언론자유, 대의기관의 책임성, 권력기관의 투명성 등이 약화하면서 질적 측면에서는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법의 지배’(rule of law)는 국가가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국가 행위의 법적인 한계를 설정해 국가권력을 제한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며 “엄격한 법 적용을 통해 국민에게 상벌을 내림으로써 법을 통치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라고 비판했다.

임 교수는 한국 민주주의가 질적으로 향상되기 위해서는 개인의 사적인 자율성과 자유가 확장돼야 한다며 다산 정약용 선생의 ‘활사개공’(活私開公) 정신을 예로 들었다. 개인의 자유가 활성화돼 있을 때 공공성(public)의 정치가 열리며, 공이 열려 있어야 개인의 자유가 활성화된다는 의미다. 그는 “우리 정치, 기업, 대학 사회에는 지위와 권한을 세습 재산처럼 생각하는 전근대적인 ‘가산제’(家産制·patrimonialism)가 뿌리 깊게 존재하고 있다”며 “가산제는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청산해야 할 적폐”라고 비판했다.

개헌과 관련, 임 교수는 “필요하지만, 권력구조 개편에 치우쳐 있는 현재의 개헌론은 성공할 수 없다”며 “시민권, 복지권, 언론자유 등 민주주의의 질을 향상하는 개헌이 논의돼야 한다”고 말했다.



―강단을 떠난 소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교수직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독일의 사회과학자 막스 베버가 ‘직업으로서의 학문, 직업으로서의 정치’라는 강연을 했는데, 이것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베루프’(Beruf)라는 단어를 직업으로 번역했는데, 베버가 이야기한 베루프는 직업이 아니라 소명, 즉 하나님이 부르신 일에 열정적으로 헌신함으로써 구원을 받는다는 확신을 가지라는 뜻으로, 우리말로 번역하면 천직(하나님이 내리신 직업)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교수직을 베루프로 생각했지요. 근데 베루프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니고 대의에 대한 열정적 헌신, 책임감, 균형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5·9 대선이 갖는 시대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먼저 이번 대선이 조기에 치러지게 된 이유를 생각해야 합니다. 박 전 대통령이 비선 실세 최 씨의 국정농단에 깊이 연루돼 탄핵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탄핵은 국회의 탄핵소추안 의결과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으로 이뤄졌지만, 실제로 탄핵은 촛불집회가 이끌어 냈다고 봐야 합니다. 한겨울에 수백만의 시민이 광장에 나온 것은 최 씨의 국정농단이 계기가 됐지만, 그간 우리 사회에 쌓여 왔던 온갖 적폐로 사회적 위기가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최순실 사태를 계기로 촛불집회 형태로 폭발했다고 봅니다.”

―어떤 위기죠.

“제가 보기에 우리 사회는 초위험사회입니다. 1990년대 초부터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우리 사회는 초고령화, 저출산, 경제위기, 양극화, 격차 사회 등 다중적 복합위기에 처했고, 이에 따라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초불확실성’(super-uncertainty)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위기의식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광장에서 폭발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임 교수는 지난 2008년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시위, 지난해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예상을 깬 야당의 4·13 총선 승리,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 등 예측하지 못한 사건의 이면에는 공통으로 초위험사회, 초불확실성 등이 자리 잡고 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파면 결정에 대한 반발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미국 헌법의 아버지들(framers)은 고정된 임기를 기본으로 하는 대통령제하에서 대통령이 임기 중에 헌법 위반, 법률 위반, 뇌물 수수와 같은 범죄행위를 저질렀을 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헌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한 결과 탄핵제도를 만들었습니다. 미국 헌법해설서인 ‘페더럴리스트 페이퍼’ 65장과 66장에서 제임스 해밀턴은 미국 헌법에 규정된 탄핵제도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의회에 탄핵권을 부여함으로써 의회가 대통령을 견제해야 한다는 삼권분립의 정신을 강조하고, 의회가 임기 중인 대통령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있게 함으로써 고정된 임기가 가지고 있는 책임성(accountability) 확보의 결함을 의원내각제 수준으로 시정할 수 있는 혁신적인 제도로 탄핵을 고안했다고 했습니다. 해밀턴은 탄핵 소추가 될 수 있는 사유에는 헌법과 법률 위반, 범죄가 있으나 대통령의 ‘공적 신뢰(public trust)의 배신’이 가장 중요한 사유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이정미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탄핵선고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잘못들을 열거하고 난 뒤 결론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의 신임을 배신했다” 그래서,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라는 판결을 내린 것은 해밀턴과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헌재의 파면 결정이 사법적 절차를 지키지 않았다는 반론도 많습니다.

“탄핵을 판결하는 행위는 ‘사법적 판단’이 아니라 ‘정치적 심판’입니다. 미국은 하원에서 탄핵소추안이 의결되면 상원에서 심판하는데, 사회를 상원의장이 아닌 대법원장이 봅니다. 이는 사법부에 권한을 준 것이 아니라 상원의장인 부통령은 대통령과 같은 당이기 때문에 탄핵이 공정하게 진행되지 않을 수 있어 공정한 진행을 위해 대법원장에게 사회권을 부여한 겁니다. 탄핵은 원래 정치 재판입니다.”

―탄핵이 남발돼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옵니다.

“국민이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게 권력을 위임했지만 모든 권리를 다 준 것은 아닙니다. 영국의 정치사상가 존 로크는 시민들이 국가를 건설하는 사회계약을 맺을 때 국가가 시민들의 생명, 자유, 재산을 보호해 준다는 조건부로 자연권을 양도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국가가 계약조건을 위반했을 때 시민은 국가에 위임한 권력을 거둬들인다는 것이 근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입니다. 민주주의하에서 대표는 권력을 위임(委任)받았지, 일정 기간 수임받는 모든 권한을 행사하는 수탁자(受託者)가 아닙니다. 위임된 권력은 탄핵이나 선거를 통해 언제라도 거둬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탄핵은 박근혜정권의 위기였지, 대한민국의 위기는 아닙니다.”


―촛불집회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정치인들은 촛불집회를 통해 국민이 주권자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했고, 국민의 요구에 순응하는 것만이 살아남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또한 1987년 체제를 종식하고 질 높은 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봅니다. 촛불집회를 통해 새로운 개혁을 이룰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고 봅니다.”

―한국 민주주의는 어느 수준이라 생각하십니까.

“이제는 권위주의 시대로 다시 퇴행할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권위주의 정권을 축출하고 민주정부를 세우는 ‘전환’(transition·민주주의 이행)은 완료됐다고 봅니다. 민주주의의 공고화는 이뤄진 것입니다. 두 번의 정권교체는 선거를 통해 평화적으로 진행됐습니다. 그런 면에서 정권교체가 한 번밖에 이뤄지지 않은 일본보다 우리가 민주주의 공고화 측면에선 앞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권교체가 없는 민주화는 의미가 없습니다.”

민주주의 전환에 관해 연구해온 임 교수는 역대 정권마다 역사적 소임이 있었다고 말했다. 김영삼(YS)정권은 군부를 퇴진시키고 문민통치를 확립함으로써 평화적으로 김대중(DJ)정권이 탄생하는 길을 텄다는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평화적 정권교체로 한국 민주주의를 공고화했고, 노무현정권은 탈권위주의와 국민이 참여하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경험할 수 있게 해줬다고 평가했다. 민주주의를 역행했다는 지적을 받는 이명박정권도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역할을 부분적으로 수행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이 부여한 역사적 소명을 다하지 못하자 국민이 촛불집회와 탄핵으로 처벌해 민주주의 발전 경로를 바로잡았다. 임 교수는 “강물이 구덩이를 메우고 사해로 나가듯이(離婁章句·맹자) 우리 국민도 역사의 질곡을 극복함으로써 한국 민주주의도 ‘비탈길의 수레바퀴처럼 멈추지 않고 전진’(論語古今註·다산)한다”고 설명했다.

―그렇지만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지적도 적지 않습니다.

“국회가 대통령을 탄핵한 것은 민주주의의 승리고, 헌재가 대통령을 파면한 것은 법치주의의 승리입니다. 법치와 민주주의가 동시에 승리한 이번 사태에 대해 불복하는 것은 민주 헌정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일입니다.”

―민주주의의 질적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요.

“정치는 좋으나 싫으나 선거를 통해 국민의 권한을 위임받은 대표들이 해야 합니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들이 국가적 의제를 이끌어 가는 것은 민주주의의 후퇴입니다. 절차적 민주주의는 안정화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이젠 사회 민주화, 경제 민주화, 복지권, 노동권 등 실질적 민주주의로 들어가야 합니다.”

―민주주의에서 개인과 공공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다산 정약용 선생의 ‘활사개공’ 정신이 필요합니다. 개인의 자유가 없는데, 어떻게 공공의 자유가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개인의 자유가 활성화돼야 공공의 역할이 열린다는 말입니다. 같은 시기 서양에서 프랑스혁명을 통해 깨우친 민주주의 원리를 다산 선생은 보지도 않고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율적인 개인이 있어야 그 개인이 국가, 즉 공을 위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자유가 억압받는데, 남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일본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군국주의에 물들었던 우리는 공적 공간을 위해 사적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는 멸사봉공(滅私奉公)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질적 성장을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 증진을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보수가 너무 위축되는 것이 민주주의 위기를 초래하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사르토리에 의하면 민주주의는 다수 지배이지만 절대적 다수 지배가 아닌 제한적 다수 지배입니다. 절대적 다수는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전체주의를 잉태할 수 있습니다. 다수와 소수의 등가주의적 균형이 이뤄져야 합니다. 국정의 양 날개 중 하나로서 합리적 보수, 나라의 기본 가치를 지키며 이성적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국가의 이익을 우선하는 진정한 ‘애국’ 보수의 회복이 절실합니다.”

민주주의 이론에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세력은 민주주의 게임을 할 수 있도록 용인돼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다. 임 교수는 “반민주 세력은 기본적으로 용서해선 안 된다는 의미”라며 “만약 반민주 세력을 포용하려면 진정성 있는 반성을 하고 달라진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박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개혁적·합리적 보수 세력까지 무너지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산업화만큼이나 민주화도 압축적으로 이뤄지면서 예상치 못한 정치 행태가 나타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최 씨의 국정농단 사태와 박 전 대통령의 파면 등 일련의 사태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드러난 전형적인 사건입니다. 제정 러시아를 파멸로 이끈 괴승 라스푸틴에 비유된 최 씨의 샤머니즘과 비선 정치는 전근대를, 촛불사태를 의회 민주주의적 절차를 통해 해결하는 대의민주주의는 근대를, 온·오프라인을 동원해 수백만 명이 참가한 촛불집회는 탈근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촛불혁명은 이렇게 복잡하게 얽힌 비동시성적인 현상의 동시적 출현을 해결하고 새로운 민주주의로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 우리 사회가 치러야 하는 자기희생(passion)이자 통과의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임 교수는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의 ‘시간의 충돌과 공존’이라는 개념을 활용해 한국의 20세기를 분석한 역작 ‘비동시성의 동시성’으로 2015년 대한민국학술원상을 수상했다.

―왜 박근혜정부에서 전근대성이 나타났을까요.

“대한민국은 열심히 일해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성취하면서 역사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근대로의 행진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박근혜정부가 들어서면서 근대로의 행진이 멈추고 전근대로 역행했다고 봅니다. 최 씨와 박 전 대통령이 보인 전근대적인 정치는 ‘가산제’라 할 수 있습니다. 북한이 권력을 3세대 세습한 것은 가산제의 전형입니다. 가산제를 청산하지 않으면 근대사회로 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청산해야 할 최대의 적폐입니다.”

박 전 대통령의 가산제에 대한 그의 비판은 신랄했다. 박 전 대통령은 공적 선발 시스템을 통해 충원된 관료들을 가신처럼 부리는 가신주의, 정경유착을 넘어 재벌의 재산을 갈취하는 약탈국가, 관료제 충원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인(私人)의 채용 등 역사상 최악의 가산제를 보여줬다고 했다.

―민주주의를 설명하면서 ‘다중’이란 개념을 많이 사용하고 계십니다.

“다중(multitude)은 대중(mass)과 다릅니다. 4·19혁명이나 6월 항쟁을 주도한 학생 그룹은 정체성이 비슷한 대중이었습니다. 세계화와 정보화가 진행된 이 시대에서는 다양한 정체성(multiple identity)을 가진 다중이 주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촛불집회에 가보면 중학생, 대학생, 직장인, 유모차 부대, 노동자, 농민, 노인 등 다양한 시민이 모여 각자 주장을 하다가 집회가 열리면 ‘박근혜정권 퇴진’이란 한목소리를 내지 않았습니까. 각자 자신들의 집단 정체성을 대변하다 사회 공통의 의견을 표출하는 것이 다중입니다. 세계화로 사회가 다변화하고, SNS 등으로 실시간 쌍방향 다중 소통이 가능해지면서 다중이 탄생했다고 볼 수 있겠죠.”

―정치권을 중심으로 개헌 논쟁이 뜨겁습니다.

“정략적 개헌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국민이 얼마나 스마트한데 권력 나눠먹기 개헌에 찬성하겠습니까. 대선을 앞두고 정치공학으로 추진하는 정략적 개헌 논의에 반대합니다.”

―그럼 개헌에 반대하시는 건가요.

“지금은 개헌 타이밍이 아니라는 겁니다. 개헌은 필요합니다. 언론자유, 시민권, 복지권 등 실질적인 민주주의 진전을 위한 조항이 헌법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권력구조 개편보다 더 중요한 사항입니다. 그런데 현재 진행되는 개헌론은 누가 권력을 더 갖느냐 등 권력구조 개편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어떤 권력구조가 우리나라에 적합하다고 보시나요.

“권력구조를 연구한 자료에 따르면 의원내각제가 가장 우월하다고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선진 유럽 민주국가 대부분이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국민에게 물어보면 대통령제를 선호합니다. 자기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합니다. 국민이 직접 선출한 대통령과 국회에서 뽑은 국무총리가 권력을 나누는 이원정부제는 최악의 권력구조가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권력구조가 아니라 이에 조응하는 정치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권력구조와 선거체제, 정당체제가 조응해야 정치적 안정과 발전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가 엇박자가 나면 개헌을 하지 않은 것보다 못한 엄청난 정치 혼란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1987년 개헌은 7월에 논의를 시작해 10월에 국민투표까지 끝내는 등 초스피드로 진행됐다. 임 교수는 “대통령직선제를 수용한 6·29 선언 이후 3개월간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지면서 개헌을 서두르지 않으면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위기감이 작동했다”며 “12월 안에 대선까지 끝내자는 정치권의 공감대 속에 역순으로 개헌 일정을 잡는 바람에 졸속, 밀실 개헌이 됐다”고 지적했다.

인터뷰 = 유병권 부장(정치부) ybk@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