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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명작의 공간 게재 일자 : 2017년 04월 21일(金)
시대의 모습 같았던 ‘외팔이 娼女’·보듬고 싶던 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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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588번지, 속칭 ‘청량리588’은 현재 관리처분 인가가 나 철거가 진행되고 있다. 폐허가 된 윤락업소의 깨진 유리에 붙어 있는 장미꽃 스티커가 이 거리의 화려했던 과거를 대변해주는 듯하다. 곽성호 기자 tray92@

▲  영자(염복순)가 창수(송재호)를 면회하고 눈물 흘리며 걷던 광화문 거리(왼쪽). 영화 장면에 등장한 중앙청은 1990년대 해체됐고 광화문(오른쪽)은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았다. 김호웅 기자 diverkim@

75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 주요 배경 청량리588

588. 오백팔십팔이 아니라 오팔팔이라고 읽는 지역. 이곳 때문에 이후 다른 지역은 백 단위로 주소를 읽게 됐다. 정확한 행정구역은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588번지. 청량리 기차역에서 나와 왼쪽 골목길로 좀 틀면 죽 이어지는 커다란 유리창의 집들. 일본말로 ‘하코방’ 같은 집이다. 밤이 되면 일순간에 불야성을 이루고 어디선가 나타난 묘령의 여자들이 멍하니 앉아만 있어도 슬금슬금 남자들이 모이던 장소였다.

◇어둠의 전성시대= 여자들은 말보다는 눈으로 말한다. ‘잘해줄게’. 남자들은 잘 알면서도 묻는다. 노인이든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젊은이든 모두 짧은 반말을 한다. “얼마?” 한두 마디 나눈 뒤 여자가 먼저, 남자가 좌우를 살피며 그 뒤를 쫓아 올라가던 장면이 목격되곤 한다. 흔히들 얘기하는 사창가지만 낭만적인 유곽과는 거리가 있어도 한참 있게 느껴진다. 이곳에서 몸을 섞는 남자와 여자는 뜨겁고 질퍽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로 눈물겹고 서글프다. 짧은 사정은, 삶은 허탈한 욕망의 일상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한다.

김호선 감독이 연출한 희귀의 역작 ‘영자의 전성시대’를 물끄러미 보고 있으면 이건 ‘파격’이라기보다 난장에 가까운 일탈의 영화라는 것, 그래서 일종의 전위예술을 보는 듯한 전율이 느껴진다. 이 영화가 기획돼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 1974년이고, 발표된 시기는 1975년이다. 박정희 유신시대의 폭풍우가 치던, 그 한가운데였다. 이제 막 사람들은 같은 시기에 터진 제2차 인혁당 사건, 즉 ‘인혁당재건위원회 사건’의 터널 속 공포를 지나온 터였다.

◇1970년대 588=한마디로 기형과 불구의 시대였다. 사람들은 싸구려 창녀들에게 정액을 쏟아내듯, 마음속에 들어차 있는 불안한 울분을 매일 같이 내버려야 했다. 비정형과 비정상, 비상식이 판치던 때였다. 아니 그것이 오히려 정상이었던 시대였다. ‘영자의 전성시대’는 그렇게 눈과 귀를 가리고 입을 막았던 ‘깜깜이시대’에 나와 사람들에게, 마치 살해된 시체 밑에 피가 번지듯 서서히 입소문이 퍼져 나가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다.

주인공은 시골에서 올라온 식모 영자(염복순)다. 고향에는 줄줄이 딸린 동생들과 함께 병원 한번 제대로 가보지 못한 채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아가는 엄마가 있다. 영자의 소원은 열심히 돈을 벌어 엄마의 병을 고쳐주는 것이다. 그런 영자를 창수(송재호)라는 청년이 사랑한다. 창수는 영자가 일하는 집, 주인 공장의 ‘공돌이’다. 어느 날 사장의 돈 심부름을 하러 사장집에 갔다가 영자를 본 창수는 한눈에 반한다. 하지만 영자의 인생은 순탄치 않다. 집주인 아들에게 순결을 빼앗긴 영자는 결국 그 집에서 쫓겨난다. 그녀는 간신히 버스안내원으로 일하며 그래도 밝게 살아가려고 노력하지만 불행은 늘 불행한 사람들에게 겹쳐 오기 마련이다. 영자는 사람들을 가득 태운 버스 문에 매달려 있다가 한 팔을 잃는 사고를 당한다. 이제 그녀가 살아갈 수 있는 길은 몸을 파는 것뿐이다. 유일하게 남은 건 한 팔 없는 몸뚱이. 그런데 남자들은 오히려 그런 영자에게서 위안을 얻는다. 창수도 공장을 나와 목욕탕 때밀이로 일하며 영자를 도우려고 애쓴다. 창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자의 인생은 점점 더 나락으로 빠져든다.

지금 생각하면 끔찍한 생각이 들겠지만 ‘영자의 전성시대’의 영자처럼 외팔이 창녀가 그다지 거부감이 없던 시절이었다. 호기심에 앞서 동병상련의 마음을 갖게 만드는, 그리하여 그런 그녀를 더 안고 싶게 되는 때였다. 자신들 모두 한 팔을 잃은 불구 같은 존재들이었으니까. 아니 그보다 못했으니까. 무항변, 무비판의 사상적 노예들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한 팔을 잃은 영화 속 창녀 영자의 모습이 1970년대 암흑의 시대가 지닌 정신적 장애를 우회적으로 항변하는 모습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에 소설가 조선작은 이런 소설을 쓸 용기를 얻었을까. 단편이어서 정보 당국에서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당시라면 꿈도 못 꿀 야한 영화를 은근슬쩍 용인함으로써 사람들을 성적으로 방종케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사 다른 일에는 눈감게 하려는 고도의 사회 통제조치였을까. 1980년대 전두환 시대 3S(Sports·Sex·Screen) 정책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 같은 일이었을까.

소설은 그렇다 치더라도 검열이 공공연하게 횡행했던 시절에 김호선은 어떻게 이런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영화의 첫 장면에서 단속에 항의하는 창녀촌 여자들이 골목길에서 발버둥 치는 모습이 나오는데, 짧은 치마 속 하얀 팬티가 여과 없이 보인다. 경찰들에게 끌려가는 여자들은 거침없이 다리를 휘젓는다. 당시 남자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를 보고 돌아가 골방에 앉아 수음을 하게 했거나 아니면 몽정을 유도했을 법한 이 장면은 4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다시 보면 그렇게나 그로테스크하게 보일 수가 없다. 김호선은 여자의 다리 사이 하얀 팬티로 당시의 우울을 슬쩍 내비치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활짝 까발려져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느낌을 일순간에 갖게 만든다. 우리 모두 끌려가는 창녀와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 영화는 김호선이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기이한 역설의 시대를 비판하고 있다.

◇영자가 없는 황폐한 그곳=영자가 일했던 588골목은 지금, 여전히 일부 ‘상점(?)’이 남아 영업 중이지만 을씨년스럽게 잔존해 있을 뿐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제 거기엔 더 이상 ‘영자’가 없다. 1970년대도 사라졌다. 1980년대도 없다. 시대의 아픔과 격랑이 두어 차례 지난 듯한 느낌을 준다. 진실로 이상한 점은 영자가 일했던 1970년대의 588은 비록 남루하긴 했어도 살아 있었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던 데 반해 지금은 그저 황폐함뿐이다. 창녀촌에는 창녀가 있어야 방이 따뜻한 법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저 춥고 비어 있는 방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의 시대는 지난 40년간 그렇게 쓸쓸하게 흘러가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 속 서울의 풍경은 불과 40여 년의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을 선보인다. 영화는 1970년대라는 저개발 시대의 추억을 곳곳에서 펼쳐 보인다. 영자가 자신 때문에 감옥에 들어간 창수를 면회하고 (종로경찰서를 교도소처럼 둔갑시켰다) 눈물을 뿌리며 걷던 광화문 거리 장면에서는 지금은 사라진 중앙청이 배경으로 걸린다. 1990년대 김영삼 문민정부가 철거해 해체하기 직전까지 광화문 앞에는 일본 식민지 시대의 상징이었던 중앙청이 있었다.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지금 얼마나 될까. 젊은이들은 그런 사실을 과연 알고나 있을까.

영자가 자신처럼 팔, 아니 다리 한쪽이 없는 남자(이순재)와 살림을 차린 판잣집 동네 어귀 저편에서는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물안개의 흐릿한 느낌으로 보인다. 당시엔 ‘5·16 광장’이라 불렸던 여의도는 막 개발이 시작되던 때였다. 팔이 없는 영자와 다리가 없는 남자는 일순 행복해 보인다. 그러나 이제 곧 다시 철거민 신세가 돼 단속반에게 쫓겨나게 될 것이다. 영화는 그렇게 불안한 행복으로 끝을 맺는다.

이 영화는 1989년 칠레 알레한드로 호도로프스키 감독이 만든 세기의 걸작 ‘성스러운 피(Santa Sangre)’의 한국판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만큼 기크(geek)하고 엽기적이지만 또 그만큼 시대의 진실을 꿰뚫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자의 전성시대’는 ‘성스러운 피’보다 훨씬 빨리 나왔다. 그러나 그것보다 세계에는 덜 알려져 있다. 어쩌면 너무 ‘앞선’ 작품이었을까. 그렇다면 지금도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 또 다른 ‘영자’와 ‘창수’들을 위해 꼭 한번 다시 만들어져야 할 작품일 것이다. 근데 염복순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갑자기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는 요즘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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