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소진 소설에 등장하는 1970년대 서울의 달동네를 재현한 전남 순천의 드라마 세트장(왼쪽)과 달동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모한 길음뉴타운 아파트 숲(오른쪽). 김호웅 기자 diverkim@
(76) 타계 20주기… 소설가 김소진의 ‘미아리 달동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미아리 달동네에 애착을 보였던 김소진 작가. 문학동네 제공
1991년, 김소진은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쥐잡기’가 당선되면서 소설가로서 세상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 그는 당선 소감에 이렇게 썼다. “지치고 상처 입은 이들의 깊고 가없는 삶과 꿈의 언저리에 손톱만큼이나 가 닿을 수 있을까. 혼신의 힘을 다 쏟아 좋은 얘기를 쓸 각오를 다질 뿐이다.”
김소진은 이 각오에 부끄럽지 않게 온 힘을 다해 짧은 기간 많은 소설을 발표했다. 1990년대에 작품 활동을 시작했지만 김소진은 90년대가 상징하는 새로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소설은 정치적 정열에 휩싸였던 지난 시대를 섣불리 단죄하지 않았고 새롭게 밀려오던 욕망과 자유를 향한 향유의 열정에 부박하게 편승하지 않았다. 김소진은 오히려 새로움의 물결에 의해 밀려나고 스러지던 것들을 찬찬히 그리고 오래 붙잡았는데 이는 그 자신이 바로 주변으로 밀려나 점점 설 곳을 잃어가는 사람들 속에서 자라난 존재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주변으로 밀려나 스러져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과 애정. 이것이 바로 김소진 소설의 고갱이를 이룬다.
1963년 강원 철원에서 태어난 김소진은 다섯 살이 되던 해 가족들과 함께 상경했다. 6·25전쟁 당시 월남한 아버지는 온순하고 착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지만 경제적으로는 극히 무능력했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철원의 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군수품을 밀매해 가계를 꾸려갔는데 5·16 이후 이조차 여의치 않아지자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온다. 그때 김소진의 가족이 자리를 잡은 곳이 지금은 미아 뉴타운과 길음 뉴타운으로 탈바꿈한 미아리 산동네다.
이후 미아리는 30여 년 가까이 그와 함께하면서 그의 주된 소설적 배경이 된다. 미아리 산동네에 대한 김소진의 관심과 애착은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었는데 오죽했으면 한 벗이 “김소진이 미아리를 쓴 것이 아니라, 미아리가 그의 손을 빌려 그 스스로를 썼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까지 했을 정도다.
일제강점기 시절 미아리는 공동묘지였다. 1912년 총독부에서 ‘묘지규칙’을 발표하면서 묘지로 설정된 19곳 가운데 하나였다. 해방 이후 미아리에 있던 공동묘지가 광주로 옮겨가게 되면서 비어 있던 곳을 6·25전쟁 이후 피란민들과 이재민들이 모여 살게 되면서 마을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다 1970년대 이후 서울 도심 개발 사업의 여파로 뿌리 뽑힌 사람들이 미아리로 밀려나게 되면서 명실상부한 서울 최고의 ‘달동네’로 이름나게 된다. 그런 ‘달동네’ 미아리에 김소진은 왜 그토록 집착했을까? 혹시 그 미아리 산동네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뭔가 범상치 않은 것이 있었던 건 아닐까?
그곳에는 확실히 뭔가 있긴 있었다. 김소진은 이렇게 말했다. 거기엔 “거짓말, 좀도둑질, 쌍소리, 깡다구부리기, 그리고 언젠가의 가출들, 어른들의 술주정, 마누라 두들겨 패기, 젓가락 장단, 자포자기한 울부짖음”들이 가득했다고. 이런 곳에서 성장한 사람이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남으로써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어 할 만큼 비루하고 초라한 풍경들이다. 더군다나 김소진은 그 빈민촌에서 서울대에 입학해 신문기자라는 번듯한 직장까지 가진 ‘개룡남’이지 않았던가. 자신을 길러준 개천을 부정하고 부인하는 것이 우리가 흔히 보는 성공한 용들의 처세라고 할 때 그가 미아리 빈민촌에 대해 갖고 있었던 애착은 의외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지치고 상처받은 사람들의 삶을 자신의 문학적 출발로 삼은 김소진에게 미아리 산동네는 더없이 훌륭한 ‘인생 학교’가 되어주었다.
연작 장편소설 ‘장석조네 사람들’은 미아리가 그 자신의 육체를 개성 있는 인물들의 구성진 입말을 통해 세상에 드러낸 김소진의 대표작이다. 거기서 그는 재개발되기 전 미아리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소묘하고 있다. “바로 옆으로는 아무렇게나 고랑을 파놓은 시커먼 시궁창물이 해자(垓子)처럼 휘우듬하게 스쳐 지나갔다. 아직 맨홀을 깔지 않았기에 뒷돌산 채석장에서 옮겨온 두툼하고 길다란 화강암 두 개를 시궁창 위로 쓰러뜨려 시늉만으로 다리 노릇을 하게 걸쳐놓았다. 한데 그 돌다리의 너비가 어른 한 사람이 겨우 건널 수 있을 만큼 조붓해서 애고 어른이고 그리고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쩍 하면 가랑이를 벌려 훌쩍 건너뛰곤 했다. 그러다가 삐끗 걸음걸이가 어긋나면 시궁창 바닥에서 긁어낸 펄흙을 되는 대로 양쪽에다 질퍽하게 쌓아 개어놓은 데 신발 뒤꿈치가 박혀 낭패를 보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상하수도 시설은 말할 것도 없고 지붕 역시 루핑을 엉성하게 덮어씌운 허름한 날림집이 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다. 그 공간 위로 ‘양은 장수 끝방 최씨’ ‘겐짱 박씨 형제’ ‘폐병쟁이 진씨’ ‘함경도 욕쟁이 아즈망’ 등 서로 몸 비비며 살아가던 사람들의 각종 사연과 이야기가 포개진다.
미아리가 당시 서울의 대표적인 변두리이니만큼 거기 모여 사는 사람들도 어디까지나 변두리 인생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 이 작품의 백미는 바로 이런 너절하고 비루한 변두리 인생을 따뜻한 애정을 갖고 편견 없이 그려낸 데 있다. 하지만 미아리 열차 집에 모여 살던 인간 군상이 소설 안으로 들어오는 일은 쉽지 않았다. 김소진은 대학 시절 우연히 황석영의 ‘돼지꿈’을 읽고서야 이들을 형상화할 용기를 얻게 되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 책을 뽑아 읽는 순간 한 미아리 산동네 출신의 문청은 이렇게 탄성을 베물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이렇게 후줄근한 사람의 땀 냄새와 구린내 나는 듯한 목소리 그리고 숨기고 싶은 속내들이 모여 감히 소설을 이루는구나! 그 순간 소설은 형이상학의 권좌에서 내 어깨 위로 내려와 소년기에 묻어둔 산동네의 기억을 흔들어 깨우는 손길로 변했다. 아마 이 소설이 아니었다면 난 끝내 글쓰기의 길로 나서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김소진의 유년 시절에 각인되었던 후줄근한 풍경은 한국 문학사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던 민중문학이라는 커다란 조류와 맞닿음으로써 비로소 기념할 만한 소설적 장면으로 재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에는 재개발의 광풍을 피해가지 못한 미아리를 씁쓸하게 추억하는 김소진의 마음이 잘 담겨 있다. 미아리 집을 세를 주고 신도시에 살고 있는 ‘나’는 세입자의 수리 요청을 받고 직접 예전에 자기가 살던 미아리를 방문한다.
재개발이 결정된 옛 마을은 인적이 끊기듯 적막함을 풍기고 있고 철거 후 남은 부서진 장롱, 의자 다리, 문설주 등을 태워 만든 모닥불 앞에선 남은 사람들이 모여 대낮부터 술추렴을 하고 있다. 그 풍경 속에서 ‘나’는 욕쟁이 함경도 아즈망네 장독대를 실수로 깨뜨리고 집을 나갔던 어린 시절을 추억한다. 그 항아리를 눈사람 속에 묻어둔 채 나는 짧은 가출을 감행한다. “개똥 천지인 돌산길”을 돌아 나와 “연탄재가 어지럽게 뒹구는 인수교회 뒤쪽의 좁은 골목”을 지나 “처음 볼 땐 한복집인 줄 잘못 알았던 길음천변의 음산한 텍사스 거리”에 이르는 그 방황의 여정을 통해 ‘나’는 자신이 “결코 주변으로 둘러싸인 중심이 아니라는 아슴푸레한 깨달음”을 얻는다. 비록 이 깨달음은 더없이 아프고 씁쓸한 것이지만 이후 김소진 문학이 나아갈 방향을 결정짓는 것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거나 절망하는 데 머물지 않고 중심에 의해 밀려나는 주변에 따스한 눈길과 연민을 담을 줄 아는 작가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김소진은 “사라져 가는 것들. 어쩌면 소설이란 그런 것들을 추억하는 기억 위에서 구축됐다가 또다시 사라지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쓴 바 있다. 미아리 산동네와 더불어 그의 작품 세계 속에서 사라져 가는 것들을 대표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그가 소설 속에서 즐겨 구사하는 순우리말이다. 김소진이 1980년대 후반 방위 생활을 하면서 ‘새우리말큰사전’을 독파하며 우리말 어휘를 공부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가 우리말에 관심을 가진 것은 그것이 민중들의 살아 있는 입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표준어라는 중심에 밀려 공식적인 지면에서 설 곳을 잃고 밀려나는 처지가 되었지만 그에게 있어 우리말은 어머니의 말인 동시에 가난한 이웃들의 언어였다. 김소진이 그려낸 미아리가 그토록 개성 있는 공간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 오래 남을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그가 구사한 순우리말이 미아리의 허름한 풍경들에 조화롭게 덧입혀졌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는 점점 빨리 변한다. 현재는 더욱 빠른 속도로 과거로 밀려나며 미래는 언제나 사람들의 박수갈채 속에서 더욱 빠른 속도로 도래하길 요청받는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은 공간의 변화를 동반하며 그 공간은 거기에 서로 몸을 부대끼며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의 삶을 감싸고 있다. 나날이 밀려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는 애써 외면하고 다가오는 미래만 구원처럼 바라보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어느 저녁 문득 가슴이 공허해질 때면 그 미래로의 질주가 우리의 내면을 충만하게 해주는 덴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문득 그럴 때면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나 버린 그의 부재가 아쉽고 또 아쉽다. 하지만 미아리가 옛 모습을 잃어도 유년의 풍경을 추억하는 김소진의 시선은 남는 것처럼, 비록 그는 우리 곁에 없지만 우리는 그를 통해 우리 가슴속 한편에 잠들어 있는 저마다의 ‘미아리’를 꺼내볼 수 있게 되었다. 김소진이 우리에게 준 큰 선물이다. 그에게 거듭 고맙다.
한영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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