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지렁이 갈빗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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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

그날 밤에 억수가 내리퍼붓더니만 새 아침엔 언제 그랬느냐는 듯 날이 들었다. 지렁이들은 밤새 땅굴에 흘러든 빗물에 숨 가빠하다가 가까스로 도망쳐 나왔으니, 그들은 물난리를 만난 수재민인 셈이다. 뙤약볕 내리쬐는 마당에 널브러진 지렁이는 꼬마둥이들의 장난감이 되었고, 쓸어담아 닭장에 던져줬었지.

지렁이(earthworm)를 지룡이·지릉이라 하고, 향어(鄕語)로 거시·거생이·껏갱이라 하니 필자도 어릴 적엔 ‘거시’라 불렀다. 한자어론 지룡·구인이라 하는데, 한방에서 고열·경기·고혈압 따위에 썼다 한다. 그런 데다가 지렁이가 약(藥) 된다 하여 끓여 먹으니 토룡탕(土龍湯)이요, 뉴질랜드 마오리족도 아주 즐겨 먹는다 하며, 지렁이를 찌고 볶아 가루 낸 가공식품도 이미 개발했다고 한다. 또, 현대 의학에서는 지렁이 피에서 핏덩이(血栓·혈전)를 녹이는 룸브로키나아제(lumbrokinase)라는 효소를 뽑는다.

밭에서 자주 보는, 지렁이의 대표로 치는 붉은큰지렁이( Lumbricus terrestris )는 유럽 원산이지만 전 세계적으로 퍼져 나갔다. 다 자라면 몸마디 100∼175개에 길이가 30㎝나 된다. 지렁이는 고리 모양을 한 체절(體節)이 여럿인지라 갯지렁이, 거머리와 함께 환형동물(環形動物) 또는 체절동물이라 부른다.

그리고 몸을 둥그렇게 둘러싼 환상근(環狀筋)과 길게 뻗은 종주근(縱走筋)이 수축·이완하여 꿈틀거린다. 이런 운동을 연동운동이라 하는데, 사람의 소화관도 지렁이처럼 꿈틀거려 음식물과 소화액을 섞어서 내려보낸다. 지렁이는 눈이 없지만 피부에 특수 감광세포가 있어서 명암을 구별한다. 또 피부호흡을 하기에 살갗은 늘 촉촉이 젖어 있어 가스 교환을 쉽게 하고, 미끈미끈하기에 굴을 파는 데도 도움을 준다.

살갗은 질깃한 큐티클(cuticle)이고, 여느 무척추동물과 마찬가지로 뼈가 없어도 탱탱하게 일정한 모양을 갖춘다. 이는 체액으로 생긴 물렁한 유체골격(hydrostatic skeleton) 때문인데 물이 든 풍선이 딴딴하고 팽팽한 것과 같은 이치다. 즉, 사람의 발기한 음경이 그렇듯 체액(혈액)으로 채워진, 신체 공간에 생성된 팽팽한 압력으로 꼴을 유지하니 일종의 ‘물 뼈’이다. 지렁이 혈관계는 하등동물에선 드물게 폐쇄혈관계이고, 혈색소도 헤모글로빈이라 피가 붉다.

지렁이는 암수한몸(雌雄同體·자웅동체)이라 정소와 난소가 모두 있다. 하지만 제 정자와 난자가 수정하지 않고 반드시 딴 개체와 서로 정자를 맞바꾼다. 사실 지렁이뿐만 아니라 대다수 하등동물도 자웅동체이면서 타가수정(他家受精)을 한다. 보통 한 시간 동안 머리끝의 배 바닥을 딱 달라 붙이고 짝짓기하니, 그동안에 정자가 몸뚱이에 난 작은 홈을 타고 가 상대의 생식구멍으로 들어가 수정한다.

식물도 제 꽃의 꽃술끼리는 말할 것도 없고 한(제) 나무의 꽃끼리도 수분·수정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과수도 모아 심으라 한다. 이렇게 근친교배가 나쁘다는 것을 우리보다 먼저 알아차린 푸나무나 지렁이에게서 우생학을 배운다.

그리고 지렁이에게는 좀 엷은 색을 띠는 환대(環帶)라는 둥그스름한 고리(띠)가 몸통의 3분의 1 지점에 해당하는 32∼37번 체절 사이에 있다. 이것에서 가까운 쪽 끝자락이 입이고, 그 반대편이 항문이다. 환대는 생식기관이기에 어릴 때는 없다가 성숙하면서 드러나므로 꼬마 지렁이 앞뒤 구별은 불가하다.

지렁이는 난생한다. 짝짓기가 끝나면 환대가 새빨개지면서 점액을 분비하여 알을 둘러싸 레몬 꼴의 작은 고치가 된다. 수정란이 든 크기 6㎜ 남짓의 고치(卵胞·난포)를 땅에 묻고, 2∼3주 지나면 알을 까고 나와 새끼 지렁이가 된다. 지렁이는 이따금 짝짓기를 하여 1년에 10개에서 수백 개의 알을 낳고, 새끼는 1년 후에 성체가 되며, 수명은 4∼8년 남짓이라 한다.

지렁이 몸에는 현미경적인 까끌까끌한 센털(剛毛·강모)을 뒤로 살짝 젖힌 채로 뻗어 있어 땅바닥이나 굴에 그것을 틀어박아 뒷걸음질을 막는다. 그래서 신문지에 지렁이를 놓고, 앞에서 잡아당기면 스르르 쉽게 미끄러지지만, 뒤에서 끌어당기면 꺼끌꺼끌한 신문지에 사각사각 소리를 내면서 잘 끌리지 않는다.

지렁이는 땅굴(집) 속에다 한창 썩어가는 낙엽을 물어 들여 ‘쓰레기를 황금으로’ 만든다. 그리고 잡식성이라 세균이나 곰팡이(토양미생물)나 식물 부스러기, 동물 사체 배설물도 먹어치운다. 여러 유기물을 집어먹고 소화시켜 거무튀튀한 알갱이 똥을 싸 땅을 걸게 한다. 또한, 집을 짓고 먹이를 찾느라 두더지처럼 여기저기 땅을 들쑤시고 다니기에 통기(通氣)를 원활하게 하여 식물의 뿌리 호흡을 돕는다. 그 때문에 찰스 다윈은 지렁이의 땅굴을 ‘흙의 창자’(intestine of soil)라 불렀다. 그러니 지렁이가 바글바글 득실거려야 건땅이다.

지렁이가 사람에게 이로운 동물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다른 동물들의 먹잇감이 되어 자연 생태계 먹이사슬의 고리, 먹이 그물코가 된다. 이를테면 지렁이는 새·뱀·두더지·두꺼비·개구리·고슴도치·딱정벌레·달팽이 등 수많은 동물을 먹여 살린다. 그래서 세상에 필요 없이 태어난 생물은 없다고들 한다.

‘지렁이 갈빗대 같다’란 무척추동물인 지렁이에게 갈비가 있을 리 만무하니 전혀 터무니없는 일이거나 아주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것을 빗댄 말이다. 그리고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하니 아무리 보잘것없고 하찮은 사람이라도 깔보거나 업신여기지 말지어다. 나름대로 다 재능 하나씩은 갖고 태어나는 법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