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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His Story 게재 일자 : 2017년 05월 02일(火)
“中서 태어났지만 나주 丁씨… 오로지 中 꺾겠다는 집념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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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은이 서울 노원구 공릉동 태릉선수촌 승리관에서 오는 29일 열리는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대비한 훈련을 하고 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中교포 출신 탁구 국가대표 정상은

남자탁구 국가대표인 정상은(27·삼성생명)의 이력은 독특하다. 탁구 세계 최강 중국에서 태어났다. 1990년 중국 지린(吉林)성 옌볜(延邊)에서 세상으로 나왔다. 그런데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다. 그래서 탁구선수 출신인 아버지의 지도를 받아 6세 때부터 탁구라켓을 잡았다. 아버지로부터 탁구 유전자를 물려받은 정상은은 중국에서 13세 이하 북반부대회 정상에 오르면서 재능을 인정받았다. 부모가 한국으로 직장을 구해 이주하면서 정상은은 흔들렸다. 외로움에 휩싸였고 사춘기 특유의 방황기마저 찾아왔다. 자연스럽게 탁구와도 멀어졌다. 다행히 15세이던 지난 2005년 부모 모두 한국 국적을 취득해 중국에 남은 외아들을 한국으로 불러들였다. 인천 부평구에 터를 잡아 동인천고 탁구부의 문을 두드렸다. 세계 최강 중국에서 탄탄한 기본기를 갖췄기에 금세 두각을 나타냈다. 이듬해 일본에서 열린 아시아주니어선수권대회에서 단체전 우승, 2007년 쿠웨이트에서 열린 세계주니어선수권 개인 단식 우승을 차지했다. 2007년엔 대한탁구협회 선정 최우수선수(MVP)의 영예도 안았다.

하지만 정상은에겐 중국 태생이란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조선족’으로 불리는 건 지금도 참기 힘들다. 단어 그 자체에 비난과 차별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27일 서울 노원구 공릉동 태릉선수촌 승리관에서 만난 정상은은 “중국인들이 중국에 살게 된 우리 민족을 부르거나 한국 또는 북한 사람을 칭할 때 조선족이라고 한다”면서 “조상이 같은 한 핏줄인데 한국에서 조선족이라는 말을 들으면 이상하고 어색한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정상은은 “미국에 사는 교포들을 조선족이라고 부르느냐”면서 “같은 민족을 중국의 소수민족처럼 취급하는 건 결국 한국인들 스스로를 비하하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10대 시절 따갑게 느꼈던 편견의 시선을 떨치기 위해 운동에 전념했고 성과를 얻었다. 그런데 고3이던 2008년 어깨를 다쳤다. 강훈련을 거듭했기 때문. 그 뒤로 짧지 않은 슬럼프가 찾아왔다. 그런데 부상은 도움이 됐다. 정상은은 “어릴 적엔 부족한 기술을 힘으로 만회하려고 했고 그러다 보니 부상이 더 악화했다”며 “어깨를 다쳐 장기인 포핸드 드라이브를 못 하게 되니 그동안 약했던 백핸드를 더 훈련하면서 전체적으로 폼이 안정됐다”고 설명했다. 힘을 줄이고 두뇌 플레이를 펼치면서 허점을 노리는 변칙 공격도 가능해졌다.

정상은이 다시 주목을 받은 건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 출전해 단체전 준우승 멤버로 등록됐다. 그런데 남자 복식 3라운드에선 홍콩에 세트 스코어 1-3으로 덜미를 잡혔다. 단체전만큼 복식에 공을 들였기에 개인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정상은은 “복식에서 너무 쉽게 패해 허무했다”며 “어깨 통증도 계속됐는데, ‘몸이 아픈데도 참고 운동을 계속해야 하나’라는 회의감에 빠졌다”고 말했다. 반년 넘게 불면증에 시달렸고, 탁구를 그만두자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도 포기하는 등 다시 슬럼프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는 “사람을 만나기 싫었고, 혼자서 방황했다”며 “하지만 탁구 외에는 해본 것이 없으니…”라고 덧붙였다.

마음 붙일 곳이 없었기에 홀로 바람을 쐬기 위해 인천 을왕리해수욕장에 갔다. 맥주 한 캔을 마시려고 바닷가에 앉았는데 너무 추워 서둘러 숙소로 돌아왔다. 아무 생각 없이 TV 리모컨을 켰는데 TV에 아프리카 어린이들이 등장하는 프로그램이 떴다. 정상은은 정신이 확 들었다. 물 한 모금 마시기 힘든 열악한 환경에서도 열심히 살아가는 아프리카 사람들, 어린이들을 보면서 ‘내가 지금까지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은 어려운 형편이지만 환한 미소와 희망을 잃지 않고 있었다”며 “어린이들의 행복한 표정을 보면서 슬럼프라고 투정 부린 내가 한심하게 여겨졌고 나를 아는 모든 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그날 정상은은 치열하게 사는 것이 아닌, 더불어 살고 또 욕심부리지 않는 법을 깨달았다. 그는 “편안하게 마음먹자 탁구공이 더 잘 보였다”며 “예전엔 지는 게 두려웠지만, 승패에 집착하지 않고 과정에 전념하면서부터 탁구가 즐거워졌다”고 말했다.

▲  정상은이 훈련에 앞서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있다. 김낙중 기자

달라진 정상은이 지난달 ‘대형사고’를 쳤다. 아시아선수권 단식 32강전에서 세계랭킹 1위인 중국의 자존심 마룽을 꺾었다. 마룽은 리우올림픽 단식 금메달을 포함해 그랜드 슬램(올림픽·세계탁구선수권·탁구월드컵 단식 우승)을 달성한 최강자. 정상은은 부진에 빠졌던 탓에 세계랭킹마저 없는 무명이었지만, 마룽을 3-1로 완파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그는 결승전까지 진출했지만 판젠둥(중국)에게 0-3으로 패했다. 하지만 17년 만에 아시아선수권에서 한국에 남자 단식 은메달을 안겼다. 단체전 은메달도 목에 걸었다. 정상은은 “단식 결승전에서 패한 게 어쩌면 더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다”며 “이겼다면 나한테 뭐가 부족한지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금메달을 놓친 덕에 자신의 약점을 파악했고 보완할 기회를 얻었다는 얘기다. 정상은은 “1위와 2위의 차이는 크지만, 오히려 1위는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할 수 있다”며 “2위인 난 더 열심히 훈련해 더욱 강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긋지긋하던 슬럼프를 벗어나면서 찾아온 경사는 이것만이 아니다. 6개월 전엔 ‘천사’ 같은 그녀가 정상은에게 다가왔다. 운동선수이기에 주말커플이다. 금요일까지 체육관에서, 태릉선수촌에서 비지땀을 흘리고 토요일에 데이트를 한다. 그래서일까, 애정은 샘물처럼 솟아오른다.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드라마를 시청하는 게 정말 꿀맛이다. 정상은은 “여자친구가 탁구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데 절대 가르쳐 주지 않을 것”이라며 “(여자친구가) 기본이 전혀 안 돼 있어 지도하기가 어렵고, 또 휴식하는 날까지 탁구라켓을 잡는 건 싫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상은은 그래서 여자친구를 달래 당구를 함께 즐긴다.

그는 여자친구가 생긴 뒤 목표를 정했다. 2020 도쿄(東京)올림픽이 정상은의 과녁이다. 여자친구는 “올림픽 무대에 서는 걸 보고 싶다”며 정상은에게 동기를 부여했다. 정상은은 “안 그래도 열심히 하고 있지만, 더욱 집중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며 “여자친구한테 ‘너 때문에 다시 죽게 생겼다’는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고 귀띔했다.

정상은의 단기목표는 오는 29일부터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 다시 한 번 중국의 만리장성과 맞붙을 공산이 크다. 아시아선수권은 ‘모의고사’였다. 중국 선수들과 맞대결하면서 노출된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는 데 힘쓰고 있다. 정상은은 “길게 공을 주고받는 롱플레이는 누구와 붙어도 안 밀릴 자신이 있는데, 롱플레이로 가기 전 필요한 짧은 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많이 흔들렸다”며 “경쟁자들의 영상을 보면서 장단점을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어느새 대표팀에서 최고참이 됐다. 이상수(27·국군체육부대)와 ‘맏형’이다. 그래서 훈련엔 늘 솔선수범한다. 오전 9시부터 오전 훈련, 오후 3시부터 오후 훈련을 하는데 몸 푸는 시간을 제외하면 하루 5시간 정도는 탁구라켓을 손에 쥐고 있다. 168㎝, 60㎏으로 왜소한 체구지만 탁구대 앞에 서면 ‘작은 거인’ ‘작은 탱크’로 돌변한다.

지금은 10대 시절보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익숙해졌다. 자신의 기사는 물론 기사에 달리는 댓글도 빠짐없이 읽는다. 이젠 악성 댓글에 신경 쓰지 않는다. 정상은은 “어렸을 때부터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태극기를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걸고 애국가도 울렸다”며 “국위선양을 했고, 앞으로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은 그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정상은은 자랑스러운 국가대표다. 그리고 중국을 꺾겠다는 집념을 불태우고 있다. 그는 “할아버지께선 대전 분이시고, 전쟁 때문에 중국으로 넘어가셨다고 전해 들었다”며 “나는 ‘나주 정씨’이고, 단 한 번도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책임감을 잊지 않았다”고 말했다.

전현진 기자 jjin23@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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