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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파워인터뷰 게재 일자 : 2017년 05월 04일(木)
“신발장엔 구두 두 켤레뿐… 구두쇠 정신이 기업인의 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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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금조 회장이 지난 4월 28일 부산 부산진구 경암교육문화재단 사무실에서 90여 년 동안 자신이 살아온 한국 현대사와 사회공헌 사업 등을 설명하고 있다. 김호웅 기자 diverkim@

- 송금조 경암교육문화재단 이사장

“자갈밭 갈듯 일궈온 재산… 다 내놓고 가는 게 인간의 美”


인터뷰 = 김기현 부장(전국부)

“나는 일생 여러 사업에 매달려 오면서 하나씩 돌멩이를 걷어내며 자갈밭을 갈듯이 살아왔습니다. 어느덧 100세를 바라보는 나이가 됐습니다. 인생은 무(無)입니다. 다 내놓고 빈손으로 가는 것이죠. 내 재산이 다음 세대들의 인재양성과 교육활동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하지만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지금에 이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 삶이 내세울 만한 것은 못되더라도 어려운 시대를 헤쳐나가려 노력했고, 젊은 세대들에게 조금이라도 남겨놓고 갈 수 있다면 그것이 인간의 미(美)라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부산에서 자수성가한 뒤 1300억 원 이상의 전 재산을 털어 사회공헌 활동에 매진하고 있는 경암(耕巖) 송금조 태양사 회장의 말을 요약하면 이렇다. 송 회장은 1000억 원을 출연해 ‘경암교육문화재단’을 설립해 개인 공익재단 시대를 열었다. 지역 명문대학인 부산대에 305억 원을 기부약정하고 195억 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그가 설립한 경암학술상은 올해 13회째를 맞아 국내 최고 권위의 학술상으로 성장했다.

송 회장은 올해 94세로, 50~60대의 아버지뻘이자 20~30대에게는 할아버지에 해당하는 세대다. 송 회장은 일제강점기인 지난 1923년 태어나 가장 수탈이 심했던 말기에 청소년기를 보냈다. 태평양 전쟁 때는 일본 해군에 강제 징집되기도 했다. 해방, 좌우 이념분쟁, 6·25 전쟁, 보릿고개, 경제개발과 민주화 시대 등 온갖 역정을 거치면서 한국 현대사의 부침을 온몸으로 겪었다. 그는 “운명을 한탄해 본 적이 없고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고 토로했다. 돈이 없어 17세가 돼서야 겨우 초등학교만 졸업했지만, 점원에서부터 시작해 안 해본 사업이 없을 정도로 악착같이 돈을 벌어 수천억 원대의 재산가가 됐다. 그가 이 큰 재산을 문화·교육발전을 위해 기부한 과정을 점검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송 회장과의 인터뷰는 지난 4월 28일 부산 도심인 서면 주변의 부산진구 동천로 경암교육문화재단 사무실과 인근 아파트 자택에서 3시간 넘게 이어졌다. 사무실 옆 회의실 서가에는 송 회장의 12년 전 초상화와 고려·조선왕조사 등 다양한 역사책과 레코드 LP판들이 꽂혀 있었다.

▲  송금조(왼쪽) 회장과 부인 진애언 경암교육문화재단 이사가 지난 4월 28일 부산 자택 정원을 함께 거닐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 김호웅 기자 diverkim@

송 회장은 90대 중반의 고령이지만 나이에 비해 훨씬 젊고 건강해 보였다. 지팡이만 짚었을 뿐, 등을 꼿꼿이 세운 채 보행을 했다. 요즘도 30~40분씩 산책하면서 건강을 유지한다고 한다. 부인인 경암재단의 진애언(72) 상임이사가 송 회장의 손을 잡고 안내했다. 진 이사는 “회장님 인터뷰를 위해 머리 감고 세수하는 데 도움을 드리고, 너무 흔한 남색 계통의 옷을 입으면 빌려 입은 것처럼 보일 것 같아 신경을 좀 썼다”며 웃었다. 사진 포즈를 취하기 위해 옷에서 지갑을 꺼냈는데 수십 년을 썼는지 가죽이 터지고 너덜너덜했다. 아직도 근검, 절약 정신이 몸에 밴 듯했다. 송 회장은 구두도 10년씩 신는다. 굽을 한 번 정도 가는 것은 기본이다. 지금 신고 있는 검정 구두도 굽을 갈았다고 한다.

송 회장은 귀가 좋지 않아 보청기를 착용했다. 바로 옆 진 이사가 다시 묻고 답해서 전달하는 말 외에는 직접 의사소통은 조금 힘들었다. 너무 예의가 발라 자신을 낮추고 단답형으로 짧게 골자만 말해 인터뷰어로서는 애가 타기도 했다. “글쎄요. 제가 크게 아는 게 없어서… 부족해서 큰 성공도 못했는데…”라며 겸손이 몸에 배어 있다. 그러나 나라를 걱정하는 부분에서는 가끔씩 열정적인 톤으로 반복해서 여러 번 강조하기도 했다. 결국 진 이사가 평소 송 회장이 자신에게 누차 강조해온 말을 전달해주거나, 부족하면 부연 설명을 하는 쪽으로 인터뷰가 이어졌다. 청소년 시절 등은 기억이 가물가물해 그가 지난해 펴낸 자서전 ‘나는 여기까지 왔다’를 참고했다. 송 회장은 최근 정세에 매우 밝았다. 모두 신문 덕분이라고 했다. 눈이 침침해도 문화일보 등 신문을 요즘도 꼼꼼히 애독한다. “문화일보 구독자가 많이 늘었느냐”고 관심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는 신문은 늘 새로운 정보와 읽을거리로 가득한 ‘배움의 밭’이라고 표현했다.

―젊은 세대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우리 세대가 고생했지만 젊은 세대는 더 잘할 것으로 믿는다. 한국경제는 더 뻗어 나갈 것이다. 한국사람은 매우 영리하고 뛰어나다. 그러나 개인 이기주의가 심한 것은 고쳐야 한다. 우리는 주변 러시아, 일본, 중국의 틈바구니에서 너무 많이 고생했고 지금은 더 위기다. 우리가 힘을 키워야 이들과 평화스럽게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먹고살기 위해 매진했지만 젊은이들은 절박함이 부족한 것 같다. 더 용감하게 살아가야 한다.”(용감하게 살아야 한다, 주변 3국 사이에서 버텨내야 한다는 말을 다른 질문에서도 여러 차례 반복했다.)

―한국사람들이 특히 고쳐야 할 부분은.

“대중적인 도덕심이 많이 부족한 것 같다. 담배꽁초나 쓰레기를 아무 곳이나 버리고 길에 침 뱉고 하면 안 된다. 도덕심을 고양해야 한다. 공동체 의식이 부족하다. (이를 고치려면) 교육계 혁신이 필요하다. 이스라엘, 독일, 스위스 등을 여행해서 보고 배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나는 너무 바빠 외국여행은 거의 못 갔지만 사업차 독일, 일본에 여러 번 가서 보고 배운 게 많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취업도 안 되고 너무 힘들다고 하는데 해결책이 없을까.

“고리타분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지금 배고파 밥 굶는 사람 없고, 돈 없어 공부 못 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정부 정책상 사회복지가 얼마나 잘돼 있나. 잘사는 나라가 됐으니 여기에 젊은이들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취업이 안 되는 젊은이들 고통은 이해하지만 일할 자리와 기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기대수준에 못 미치는 직업이라도 그 일과 경험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올려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대기업, 중소기업, 자영업 등 종사하는 분야 모두가 중요하다.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다 보면 새롭고 더 좋은 자리와 기회가 온다. 나도 청년 시절에 그랬다.”


―대통령 선거가 임박했는데 어떤 대통령이 되면 좋겠나. 투표를 하실 건지.

“가장 큰 화두는 경제와 안보다. 새 대통령이 국민이 먹고사는 문제인 경제를 안정적으로 발전시키고, 죽고 사는 문제인 안보를 슬기롭게 해결했으면 한다. 생각이 서로 다른 사람의 반목과 분열, 갈등의 고리를 청산하고 국민 모두를 대화합시키는 대통령이 돼야 한다. 여기에는 여야나 진보·보수가 따로 없다고 생각한다. 투표는 꼭 하겠다. 크게 희망적인 후보는 없지만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가 안보 면도 그렇지만, 경남도지사 시절 살림을 잘해 채무를 다 갚았다고 해 호감이 간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가장 존경해 왔고 그 따님인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도 기대를 걸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너무 실망이 크고 기대 이하다. 국가와 결혼했다고 해서 청렴, 결백하게 국가를 위해 온몸을 바칠 것으로 생각했다. 옆에서 국정을 농단한 최순실이 등장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가장 존경하는 이유는.

“그 어른이 헐벗고 굶주린 대한민국을 살렸다. 어렵고 힘든 시대에 몸소 헌신해 경제개발을 이룩했다. 그 어른이 아니었으면 지금 어떻게 됐겠나. 나도 박 전 대통령을 직접 만난 적이 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고 내가 양조장을 할 때 서울에서 전국 정미소 및 탁주업자 회의를 소집해 참석했더니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인 그가 나타났다. 그는 ‘그래도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보다 여건이 좋고 사업 여력이 있지 않나. 이제 술도가나 정미소는 필요 없으니 외화를 벌기 위해 제조업을 하라’고 부탁해 내가 제조업을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역할도 의미가 크다. 독립운동가로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김구 선생은 중국으로 망명했는데 미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 국가에 도움이 됐다고 본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으로 대한민국을 지키고 공산화를 막은 것은 큰 공이다. 이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일찌감치(북으로 정권이) 넘어가 지금의 자유도, 경제번영도 없었을 것이다.”

―기업인 중 존경하는 분은.

“정주영 회장과 이병철 회장을 가장 존경한다. 이분들과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같이한 인연도 있다. 나와는 열 살 안팎의 나이 차이다. 그들은 변변한 산업 하나 제대로 없는 허허벌판에서 우리 경제가 이만큼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앞으로 이런 기업가들이 나오기 쉽지 않을 것이다. 정 회장은 타고난 근면성과 도전정신, 체력을 바탕으로 한 현장중심 경영이 장점이다. 올림픽을 유치하고 대북교류사업까지 밀어붙였으니 그 열정이 정말 대단하다. 긍정적인 사고로 불가능에 도전해 나도 큰 교훈을 얻었다. 나와 사업 규모는 엄청난 차이가 있지만 정 회장은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미곡상 점원을 하다가 사업을 하게 된 경위와 삶의 여정도 비슷한 것 같다. 이 회장은 명석한 두뇌와 시대를 앞지르는 뛰어난 예지력, 신중함이 강점이다. 선견지명의 혜안으로 세계적인 삼성그룹의 모태를 만들었다. 나는 이분들을 본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미흡했다.”

―이병철 회장 얘기가 나와서 그러는데 손자 이재용 부회장은 어떻게 생각하나.

“구속된 것이 너무 안타깝다. 삼성이 그동안 얼마나 많이 일자리를 창출하고 세계적으로 위상을 높였나. 본인도 억울할 것이고 나도 마음이 아프다. 이 부회장이 뭐가 아쉬워 먼저 대통령한테 뇌물을 줬겠는가. 또 성공한 기업인이 대통령에게 잘 보일 일이 뭐가 있겠나. 대통령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국가를 위해서 달라고 하는데 안 줄 사람 없다. 이제 이런 요구는 완전히 없어져야 한다.”

―노조에 대한 의견은.

“기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기업가의 노력 외에 정부의 제도 및 정책적 지원도 필요하다. 다른 한 축으로는 노동자의 인식 변화와 노력이 필수적이다. 그래야 노사가 서로 공생하고 발전해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인간의 가장 숭고한 정신은 협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노조는 세계에서도 가장 강성노조다. 노조의 이익과 주장이 너무 강한 일면이 있다. 나도 1990년 태양사 근로자들의 파업사태를 겪었다. 납품 날짜를 지키지 못해 주요 거래처인 현대 자동차와의 거래가 끊겼고, 노조원 600여 명을 비롯해 일반직원 100여 명까지 큰 고통을 겪었다. 강소주를 마시며 버틴 나날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플라스틱 사출 업체인 계열사 태양공업사는 노조파업으로 끝내 폐업하기도 했다.”

―무려 1000억 원을 출연해 경암교육문화재단을 설립하고 경암학술상을 만든 이유는.

“이제 한국도 문화의 격이 높아지고 교육수준도 더욱 발전해야 한다. 사회적 가치와 삶의 질을 고양시키는 학술과 문예를 더 육성해야 한다. 자원 빈국이 세계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재를 양성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경암교육문화재단과 경암학술상은 그래서 탄생했다. 특히 창의성과 기술력이 승부하는 시대에 향후 한국 발전은 더 나은 기술발전을 위한 연구·개발(R&D) 중심으로 가야 한다. 내가 살면서 가장 즐거운 날이 매년 11월 첫 주 경암학술상 시상식에 참석하는 날이다. 학문의 발전과 문화증진에 큰 공적을 남긴 분들의 노고에 조금이나마 보답한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 수상자들이 미래에도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세계와 인류의 번영에 더 이바지할 것으로 기대되니 가슴이 벅차다. 국제적으로도 더 많이 알려지고 발전했으면 좋겠다.”

―경암교육문화재단이 하는 다른 사업은.

“당대 최고인 각 분야 수상자들을 강연자로 모시는 학술강좌를 수시로 개최하고 있다. 일반시민도 참여해 관심과 큰 호응을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됐다. 이 같은 수상자들과 석학들의 지도로 매년 고교생을 대상으로 과학적 탐구와 열정을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경암 바이오유스 캠프’도 운영하고 있다. 경암재단이 주최하고 한국·분자세포생물학회가 주관해 매년 7월 이틀간 6개 대학에서 열린다. 후속 프로그램인 ‘경암 바이오유스 실험체험’과 ‘경암 바이오유스 멘토링’ 행사도 생명과학에 대한 이해와 흥미를 고취시키는 계기가 됐다. 미래창조과학부와 함께 고교생과 대학생을 상대로 한 ‘전국학생 설계경진대회’도 매년 개최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대학·고교 등 170개 팀이 참가했다. 노벨상 수상자 초청 강연도 가끔 한다.”

―경암재단이 새 건물을 갖고 출범한다는데.

“부산 최도심인 서면에 대형 건물을 갖추게 되면 각종 문화사업을 할 것이다. 2개 동으로 앞에는 11층, 뒤에는 5층 건물이다. 세계적인 건축가인 부산 출신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했다. 콘서트장과 강연장을 갖춰 각종 음악공연 등으로 부산의 새로운 문화공간 역할을 해 시민들에게도 도움을 주고 싶다. 국제적 연사를 초청해 수준 높은 강연도 할 것이다. 지난해까지 경암학술상 시상식은 해운대 누리마루 하우스에서 열렸지만 올해부터는 여기서 개최해 기대가 크다.”

―아호 경암(耕巖)은 무슨 뜻인가.

“‘돌과 자갈밭을 갈아 옥토를 이루듯 열심히 살라’는 뜻이다. 부산 출신으로 문단의 큰 별인 요산 김정한 선생님이 지어주셨다. 1970년대 중반 무렵 오징어 가공공장과 금형 사출 공장들을 경영할 때 김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문학적 성과도 대단하지만 성품이 바르고 인품이 높아서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아직 젊으니 아호 작명을 사양하겠다는 내 말에 선생님은 ‘그렇다면 미리 지어놓았다가 다음에 쓰라’며 이 아호를 지어 주셨다. 선생님은 사업을 한답시고 부산 곳곳을 부지런히 돌아다닌 제 행동을 알았는지 ‘자네는 성격이 지독하니까 자갈밭도 열심히 갈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선생님과의 인연은 1996년 89세의 나이로 타계할 때까지 이어졌다. 이 아호는 갈수록 내 마음에 들고 지금까지 이렇게 살려고 노력했다.”

―어렸을 때 성장 과정과 첫 취업 등을 설명해 달라.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던 1923년 당시 행정구역으로 경남 동래군(현 양산군) 철마면 송정리에서 태어났다. 호적은 1924년으로 돼 있는데 당시에는 출생신고가 이처럼 늦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8남매를 먹여 살리느라 부모님의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네 신발은 네가 만들라고 일러주신 부모님 가르침에 따라 적어도 내가 신을 짚신 정도는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공부하는 것보다 모내기 일손을 거들고 추수하는 들판에서 짚단을 나르는 것이 더 중했다. 초등학교(당시는 보통학교)는 11세가 돼서야 들어가 17세에 졸업했다. 초등학교 때 직접 닭을 키워 달걀을 낳으면 팔아 당시 50전이던 학교 월사금을 낼 수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겠다는 말은 하지도 못하고 중학교 교복을 입고 다니는 친구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친구 교복을 빌려 한번 입어보긴 했지만 아쉬운 마음을 달랠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하다 부산의 광복동에 있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다이고쿠 난카이도(大黑南海堂) 약품도매상회사에 취직하는 행운을 얻었다. 판매와 경리업무를 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정직하고 성실하게 열심히 최선을 다해 일했다. 어쩌다 일거리가 쌓이거나 골치 아픈 난제에 부딪히는 일이 있어도 불평하거나 회피하려 하지 않았다. 내 모든 심혈을 기울여 어쨌든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이런 조건에서 일할 수 있게 된 행운에 감사하는 마음을 한순간도 잊지 않고자 마음을 다잡았다. 이렇게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정을 받았고 중요한 일을 맡게 됐다.”

―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약품상에서 근무할 때 일본군대에 징병으로 끌려갔다. 고향에서 부산 징집장소까지 어머니는 다 해진 고무신을 신고 한나절을 걸어서 오셨다. ‘일본사람들을 위해 싸우다 죽고 나면 개죽음보다 못하니 무조건 살아 돌아오라’고 내 옷소매를 잡고 눈물을 흘리셨다. 새벽 일찍 집을 나서 쉬지 않고 걸어오신 어머님을 위해 설렁탕 한 그릇 사드리지 못한 그날의 내 신세가 서럽기만 해 기억에 오래 남는다. 반드시 돈을 벌어 어머니를 잘 모시겠다고 결심했지만 어머니는 51세로 몇 년 뒤 돌아가셨다. 해군으로 당시 해군 진해기지로 배치돼 잠수함 훈련을 받는 등 근무하다 일본의 항복선언으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사업은 어떻게 성공했나.

“한창 일할 때는 밤 12시에 자고 통행금지가 풀리는 오전 4시에 일어나 사업에만 매진했다. 약품 도매상부터 미곡상, 정미소, 양조장, 수산물 가공업, 봉제공장, 플라스틱 사출 공장 등 온갖 사업에 뛰어들었다. 내세울 만한 업체는 금형 사출업체인 태양사다. 주로 스푼, 포크, 나이프 등 서구식 스테인리스 제품을 만들어 수출했다. 이 식기세트들은 품질을 인정받아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유럽 전역과 미국으로 팔려 나갔다. 16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독일의 WMF 사에도 우리 제품을 납품할 정도였다. 국내 처음으로 거위털 점퍼를 만들어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면서 봉제업도 성공을 거뒀다. 성장이 빠른 건설업은 하지 않았다. 당시는 관급 공사가 많아 공무원에게 줄을 대야 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돈이 있다는 이유로 내밀던 정·관계의 수많은 유혹의 손길을 거부하고 오로지 한길로만 나갔다. 개인소득으로 10여 년간 부산에서 1위를 차지했고 성실 납세자로 등록됐다. 음악가 출신인 아내는 눈을 감으면 브람스, 베토벤 음악이 들린다는데 나는 꿈을 꾸면 내 집 정원에 돈이 쫙 깔리는 게 보였다. 저걸 벌어서 내 것으로 해야 할 텐 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부는 어떻게 만났나. 요즘 진 이사 활동은.

“지난 1993년 초등학교 교사였던 첫 부인과 사별하고 주변의 권유에 따라 1995년 아내와 결혼했다. 나와 아내는 원래 먼 친척 사돈 간이었다. 진 이사는 ‘훌륭한 분이 있다고 해서 만났고 회장님의 외로운 부분을 제가 잘 감싸주고 위로해 드릴 자신이 있어 결혼했다’고 말했다. 경암교육문화재단 설립은 아내가 적극 권유해서 이뤄졌다. 미국, 유럽에서 오랫동안 유학했던 아내는 미국의 록펠러 재단이나 카네기 재단의 사례를 들며 나를 설득했다. 아내는 부산시청과 교육청을 오가며 설립인가를 받는 데 많은 고생을 했다. 경암학술상이 이처럼 성장한 데는 아내의 역할이 매우 컸다.”

진 이사는 경희대 음대(성악 전공)를 졸업한 뒤 하버드대학원에서 음악분석학과 현대음악 연주법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음악원과 빈 음악원에서 수학했다. 성심여대(현재 가톨릭대) 교수, 컬럼비아 사범대학 성악 강사 등을 역임했다. 미국에서 10회 이상 독창회를 가지기도 했던 진 이사는 그러나 송 회장과 결혼 이후 경혜여고 및 경암교육문화재단 운영에 전념하고 있다.

―구두쇠란 별명을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근검절약과 솔선수범이 기업인이 갖춰야 할 가장 큰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신발장에는 구두가 두 켤레밖에 없다. 수많은 공장을 운영했지만 공장을 가동하지 않으면서 전기를 켜두는 것은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요즘도 나는 사람이 없을 때는 무조건 소등한다. 메모지는 이면지를 사용한다. 해외여행도 거래처 방문을 위해 독일과 일본 등을 가봤을 뿐이다.”

송 회장은 아침에는 과일주스나 과일, 야채죽을, 점심·저녁에는 김치, 두부 조림, 된장, 각종 나물, 콩자반, 생선조림이 대부분인 토종한식을 여전히 즐겨 먹는다. 기자가 인근 송 회장의 아파트로 옮겨 취재를 겸해 점심 식사를 할 때는 진 이사가 추어탕을 끓여서 내왔다. 몸에 밴 예의와 겸손은 막내아들뻘 기자를 맞아서도 여전했다.

ant735@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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