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카페>美 37년 적자에도 ‘기축통화’ 특권…달러화, 계속 안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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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수의 글로벌 경제 이야기 - ②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안전자산을 둘러싼 갈등

#1. 환율보고서

“미국은 인위적으로 왜곡된 환율을 통해서 부당하게 우리의 수출에는 불이익을, 교역국에는 이익을 주는 국제무역체제의 짐을 감당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 우리는 불공정한 통화 관행을 적극적으로 감시하고 철저히 지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지난달 미 재무부가 의회에 제출한 환율보고서 내용의 일부다. 2015년의 무역촉진법에 따라 미 재무부는 환율과 관련이 있는 대미무역흑자, 경상수지흑자, 일방향 환율개입 등 구체적인 지표와 그 지표의 임계치를 설정해 주요 교역국을 대상으로 평가한다. 불공정 관행을 추구하는 나라가 이를 시정하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제재를 가할 수 있도록 했다.

미국은 지난 40년 가운데 단 세 해를 제외하고 무려 37년 동안 경상수지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그림) 상식적 판단에서 볼 때 막대한 규모의 누적적자를 떠안고 있는 미국경제가 과연 앞으로 빚을 상환할 능력이 있는지 의문이다. 동시에 미국은 도대체 어떤 연유로 지구 상의 그 어떤 나라도 감당할 수 없는 특권을 가지게 됐는지도 의문이다.

사실 오랫동안 이 우려와 의문이 제기됐으나 명쾌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굳이 경제이론을 빌려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개인이나 기업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적자를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기축통화로서 달러화가 누리는 특권은 미국민이 얼마든지 자신이 번 것 이상 쓸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2. 브레튼우즈회의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1년 전 1944년 7월 당시 44개 연합국 730명 대표가 모여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턴우즈의 마운트 워싱턴 호텔에서 전후 국제통화질서에 대한 회의를 개최했다. 브레턴우즈회의에 영국 대표로 참석했던 존 케인스는 새로운 국제통화질서는 국제무역과 자본흐름이 초래하는 대외수지불균형을 제어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케인스는 초(超)국가통화인 방코(Bancor)와 개별국가의 방코 계정을 설치할 국제청산동맹(ICU·International Clearance Union)의 설립을 제안했다.(Bancor는 불어로 은행(Banc)과 금(or)의 합성어다.) 모든 국제무역은 다자간 청산시스템인 ICU 안에서 방코로 결제하되 만성적자국은 강제로 통화가치를 절하하고, 보유금을 처분하고, 해외차입이나 채권발행 등을 제한했다. 반대로 만성흑자국은 강제로 통화를 절상하고, 상한을 초과하는 방코 계정에 높은 수준의 마이너스 금리를 적용하거나 벌금을 물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케인스가 국가 간 수지불균형을 제어하는 데 최우선순위를 둔 것은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국제통화체제인 금환본위제(Gold exchange standard)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했다. 금환본위제는 1차대전까지 유지됐던 금본위제(Gold standard)의 변형으로서 영국과 미국은 금을 준비금으로 보유하되, 다른 나라들은 금 외에 파운드화와 달러화도 준비금으로 보유하는 통화체제다.

즉 외환준비금이 당시 처음 등장했는데 이는 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오늘날과 차이는 금의 달러화 또는 파운드화 가격을 정부가 약속한 액면가격(Par value)으로 고정했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1834년 금1온스=$20.67를 금환본위제 마지막 해인 1933년까지 100년간 유지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 초강대국의 지위를 잃어버리고 양차 전쟁으로 피폐해진 영국 대표 케인스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신 미국이 액면가격 금1온스=$35인 금본위제를 유지하고 다른 나라들은 미 달러화에 통화가치를 고정하는 브레턴우즈체제라고 하는 금환본위제 시리즈2가 시작됐다.


#3. 금환본위제

금본위제나 금환본위제의 핵심은 금과의 태환성에 있었다. 태환성은 그 나라 금융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는 징표였다. 돈이라는 부채를 발행하는 발권은행, 즉 오늘날의 중앙은행은 반드시 상응하는 안전자산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발권은행의 안전자산에 해당하는 준비금이 금이었고 부족분은 적격증권으로 채웠다.

태환성은 금의 흐름이 대외수지 불균형을 치유할 것이라는 신뢰와 함께 국가 간 협조가 전제될 때 유지될 수 있었다. 1차대전 후 많은 나라가 엄청난 인플레이션에 시달린 나머지 다시 전전(戰前)의 금본위제 시대로 돌아가고자 했으며 금환본위제가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전전 세계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전쟁의 후유증은 국제통화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협조 대신 불신을 불러일으켰다. 더 이상 금의 흐름 즉 국제수지는 국가 간 왜곡된 금의 분배를 교정하는 시장의 조정과정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많건 적건 금을 지키고자 했으며 중심국들은 금 유출을 막기 위해 긴축 통화정책을 수행했다.

금환본위제는 1929년 10월 월가의 검은 화요일을 전 세계로 확산시켰고 결국 전 세계 대공황을 초래한 원인이 되었다. 1931년 금이 부족한 영국이 액면가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불안감에서 파운드화를 외환준비금으로 보유했던 나라들이 런던에 예치한 예금을 인출, 대규모 금의 유출이 일어났다. 영국은 마침내 금환본위제를 포기한 것이다.

비록 좌절됐으나 대공황시대의 구루(guru) 케인스는 새로운 국제통화질서를 국제수지불균형을 해소하는 데서 찾으려 했다. 그는 자국의 이익을 희생하면서 대외적 약속을 지킬 나라는 없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대공황시절 모든 나라가 수출에 매진하면서 한편으로는 수출을 늘리려고 환율을 평가절하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수입을 줄이려고 무역장벽을 쌓았다. 그 결과 경제공황은 더 깊고 길어졌다.

무엇이 그토록 금에 대한 애착을 가게 했을까? 뮤지컬로 더 많이 알려진 동화 ‘오즈의 마법사’는 1896년 미 대선 당시 격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금본위제를 둘러싼 갈등의 산물이다. 최다 금보유국인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1933년 3월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전격적으로 금본위제 폐지를 명령했을 때 당시 예산국장이었던 L 더글러스는 ‘서구문명의 몰락’이라고 대들었다.

사실 당시 사람들이 원했던 것은 안전자산이었다. 희소성과 내구성을 가진 금이 안전자산으로서의 가치를 가졌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은(銀)은 희소성에서 떨어졌다. 안전자산이 반드시 금일 필요는 없다는 것은 먼 훗날에 가서야 깨닫게 된다.


#4. 브레튼우즈체제

전후 브레턴우즈체제는 그렇게 태어났다. 기능적으로 문제 있는 자동차의 외관만 멋지게 복원해 놓은 것처럼 금환본위제의 흠은 그대로 잠재해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기축통화국으로서 미국만이 금본위제를 준수했고, 질서의 감시자로서 국제통화기금(IMF)과, 전후 유럽재건과 개도국 경제발전을 위한 목적에서 세계은행이 설립된 것이다. 이렇게 팍스 아메리카나는 냉전시대의 국제평화질서를 이끌었다.

오래지 않아 브레턴우즈체제의 흠은 드러났다. 전후 유럽과 일본의 고성장은 국제무역과 자본거래를 위한 달러화에 대한 높은 수요가 일어났다. 이를 수용하기 위해 기축통화국 미국은 달러화를 지속적으로 공급해야 했다. 이렇게 늘어난 달러화 공급 때문에 국내 통화량을 줄이지 않는 한 궁극적으로 금1온스=$35의 액면가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금본위제와 통화정책이 충돌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1960년대 당시 샤를 드골 대통령의 재무장관이었던 G 데스텡은 달러화만이 가지는 태환성이 미국의 ‘얼토당토않은 특권’을 만들었다고 불평했다. 35달러 지폐를 찍어내는 데 비용은 거의 없지만 금 1온스의 구매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 얼토당토않은 특권으로 미국민은 번 것보다 더 쓸 수 있게 됐고 경상수지는 만성적인 적자로 돌아섰다.

더욱이 고정환율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외환준비금은 계속 늘어나는 국제자본 흐름을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1971년 8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금태환 중지를 선언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금본위제폐지를 선언한 지 38년 만에 같은 일이 반복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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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달러화의 위상

금본위제도 고정환율제도 모두 역사가 됐다. 변하지 않은 것은 기축통화로서 달러화의 위상이다. 달러화를 대체할 정도로 높은 유동성과 다양한 만기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통화는 없기 때문이다. 작년 달러화는 일평균 5조 달러가 넘는 전 세계 외환거래의 88%를, 10조 달러가 넘는 전 세계 보유외환의 64%를 각각 차지했다.

한편 세계가 글로벌 경제의 중심국과 주변국으로 재편되면서 국제통화체제의 갈등은 기축통화국 대(對) 주변국으로 그 양상이 바뀌었다. 주변부 국가들은 G20 가운데 11개국일 정도로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부상했다. 반대로 미국경제의 위상은 줄어들었다. 이코노미워치닷컴에 따르면 2015년 미국의 구매력 기준 국내총생산(GDP) 비중은 전 세계 16%로 이미 중국(17%)에 추월당했다.

중심국 투자자들이 주변국의 금융자산을 위험자산으로 편입하면서 금융글로벌화가 급속히 일어났고 덩치가 커진 주변국들은 크게 늘어난 변덕스러운 자본흐름에 대응해 기축통화국 위주로 중심국의 안전자산을 외환준비금으로 쌓았다. 결과적으로 스스로 안전자산을 생산할 수 없는 주변국의 경제성장은 글로벌경제에 안전자산이 부족하게 되는 문제를 초래했다.

브레턴우즈체제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기축통화로서 달러화의 높은 수요는 미 연준이 이를 수용할 때 달러화공급량이 늘어나게 돼 결국 달러화 가치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비록 고정환율제에서 변동환율제로 변화했으나 한 나라의 통화가 동시에 기축통화로 사용되는 한 같은 문제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 달러화가치가 하락할 때 주변국들이 외환준비금으로 쌓은 달러화 자산은 더 이상 안전자산이 될 수는 없다.

과거와 같지 않은 미국경제의 위상에도 불구하고 달러화의 위력은 오히려 더 커졌다. 이제 주변국 경제는 중심국 미국의 통화정책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됐다. 달러화는 ‘our currency, but it’s your problem’이라는 명구(名句)를 남긴 닉슨 대통령 때 재무장관을 지냈던 고(故) J 코널리도 아마 오늘의 글로벌 경제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미 연준의 양적완화가 한창이던 2010년 10월 상하이(上海)에서 개최된 국제회의에서 개막식을 마칠 때 한 중국인 참석자가 발언을 요청했다. 모두 의아해하면서 통역기를 들었다. 그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이 자리에 전 세계 경제를 위험으로 모는 나라의 대표가 있다.’(문화일보 4월 12일자 26면 1 회 참조)

성균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