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아벨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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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교 시인, 동아대 명예교수

전화가 왔다. 조그맣고 약간 힘없는 목소리였다. “혹시 기억하세요? ○○의 △△△입니다.”

“아∼ 네.” “아프시다면서요?” “아녜요, 잘 살고 있습니다.” “주소가 그대로인가 해서요.” “물론이죠. 그대로예요.”

거의 그 일을 잊을 무렵 소포 하나가 왔다. 포장을 뜯으니, 책이 한 권 나왔다. 아주 옛날 잡지였다.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화풍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한 그림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한눈에 봐서도 옛날 잡지인 월간지 □□이었다. ‘어디서 이런 누우렇게 된 옛날 잡지를….’ 잡지 뒷장을 보니 발행 날짜가 1979년이라고 씌어 있었다. ‘냄새도 나는군….’ 보낸 사람 이름도 없었다. 찬찬히 잡지를 열어 읽어 보니, 특집이 ‘반쪽은 반쪽을 위해 무엇을 했나요? …저술인 배우자의 내조 외조’라는 것이었다. 책장을 넘기니, 한 글이 보였다. 낯익은 이름의. 얼른 펴보았다.

‘도움은커녕’이라는 제목이었다. 고인이 된 남편의 이름이 씌어 있었다.

‘아내에 대한 얘기를 자주 하는 사람을 팔불출의 하나라고 그러는데, 내게는 아내에 관한 이야기를 할 기회가 다른 남자들보다 비교적 많은 편이다. 아내가 시를 쓰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점점 속이 떨려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과연 나를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한 번도 나에 대한 속마음을 물어보지 않았는데 그는 일찍이 가 버렸으니….’ 우리는 이렇게 속을 모르는가. 함께 베개를 같이하고 살면서도 속을 모르다니, 우리란 얼마나 고독한 존재인가. 아니 고립된 존재?

‘나의 아내에 대해서 그런 면으로 평가하자면 비교적 티를 안 내는 편이다…. 아내는 천성적으로 잘 돌아다니지도 않고, 또 너저분한 자기감정의 찌꺼기를 스스로 소화시키지 못해 실수를 저지르고 다니지도 않는, 그리고 무슨 일에건 아주 잘 참는 편이다. 특히 병원에서 무슨 수술 같은 것을 할 때 보면 의사들도 칭찬이 대단할 정도이다. …저렇게 참을성이 많은 여자는 내 의사생활 20년에 처음입니다….’

‘나는 오히려 아내에게 방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같이 현실적인 문제에 민감하지 못한 사람을 만나서.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시만 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내는 매일같이 밥도 하고 빨래도 하고, 그리고 딸아이의 교육도 제법 깐깐하게 돌보고 그러고도 틈을 내어 글을 쓰려고 노력한다. 아내의 노력은 참으로 옆에서 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애처롭게 느껴진다…. 아내가 남만큼이나 건강한 사람이라면 오죽 좋으랴. 그럼 남편인 내가 아내의 글 쓰는 일에 크게 외조해주었다고 좀 허풍스럽게 얘기해 볼 수도 있는데….’

아마도 내가 몹시 아프던 무렵의 글이었던 것 같다. 내 앞엔 갑자기 노란 귤과 검은 비닐 봉투가 떠다닌다. 그가 자정쯤 되면 헐레벌떡 집 앞 과일 가게에서 산 귤이 들어 있는 검은 비닐 봉지를 들고 현관을 들어서던 기억. 노란 귤에서 뿜어나오던 향기…. 이렇게 속을 모르고 있었다니…. 우리는 타인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상자를 버리려고 보니, 그 안에 또 무언가가 있었다. 검은 보랏빛의 열매가 가득 들어 있었다. ‘아로니아의 열매입니다. 식간에 대여섯 알씩 잡수세요’라는 쪽지가 붙어 있었다.

아아, K 사장…. 그는 한 소도시의 헌책방 사장이다. 그의 헌책방은 묘한 느낌을 준다. 거기 가득 쌓여 있다시피 한 헌책들을 보면 인생의 무게 같은 것이 전해온다고나 할까. 그리고 탁자 위에는 자줏빛 오미자가 따뜻한 김을 향기처럼 펼쳐 올리고 있었다. 그 책방에서 돌아온 어느 날 시 하나를 썼다. 제목은 ‘아벨서점’, K 사장의 그 헌책방 이름이다. 그 뒤 어느 날이던가, 무거운 유리 항아리 하나가 우리 집에 배달됐다. 오미자였다. 그다음 해에도 K 사장은 말린 오미자를 한가득 보내왔다. 조금씩 오미자차를 만들어 마시면서 그 향기에 얼마나 취했던지….

향기에 취하게 하는 사람들은 가끔 있다. 시인 신석정 선생이 그런 분이다.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의 시인. 그분은 내가 신인상을 타고 문단에 나오던 무렵 내게 ‘긴 두루마리 편지’를 보냈었다. 요즘 말로 하자면 팬레터 같은 것이었다. 물론 놀란 나는 답장을 보냈고, 그분의 초대에 전주에 내려가기도 했고, 또 석정 선생님이 서울 오시는 길에 만나 ‘닥터 지바고’라는 영화를 보기도 했고…. 그러다 그 흰 두루마리에 쓴 멋진 붓글씨는 자랑삼아 들고 다니다 잃어버렸지만…. 까마득한 신인에게 원로시인이 팬레터를 보내다니…. 그 두루마리 한지와 먹글씨에서 풍기던 향기를 맡던 새벽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1960년대 말이니까, 벌써 50년 전 이야기다.

오늘 아침 무슨 일 때문인가, 그때 석정 선생님 댁 정원에서 미니스커트를 입은 나와 석정 선생님의 사진을 찾아냈다. 첫 월급으로 맞춘 짧은 원피스를 입고 있는 나와 석정 선생님의 사진…. 아, 그때의 향기는 다 어디 갔을까….

인생에는 가끔 그런 향기들이 있다. 마리아의 후광 같은 그런 향기들…. 그런 향기를 주우며 우리는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인생이 탁하고 어두울수록 그런 향기는 그리운 법이니까. 인간은 향기롭다. 가버린 이들은 특히 보이지 않으면서 보이는, 향기를 풍긴다.

나는 시 ‘아벨서점’을 이런 구절로 끝냈었다. ‘아, 거길 아는가/ 꿈길이 벼랑의 속마음에 깃을 대고/ 가슴이 진자줏빛 오미자차처럼 끓고 있는 그곳을/ 남몰래 눈시울을 닦는, 너울대는 옷소매들을, 돛들을, 떠 있는 배들을/ 배들은 오늘 어딘가 아름다운 항구로 떠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