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 Story >“대표팀 맡은 건 아버지 유언… ‘국제시장’보며 눈물 펑펑”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달 29일(한국시간)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열린 국제아이스하키연맹 남자 세계선수권대회 디비전 1 그룹 A에서 2위에 올라 내년 월드챔피언십 진출을 확정한 대표팀이 시상식 직후 백지선 감독을 헹가래치고 있다. 대한아이스하키협회 제공

백지선 남자아이스하키대표팀 감독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백지선 남자아이스하키대표팀 감독이 지난 16일 서울 용산구 이촌동 자택 앞에서 “나는 눈물이 많다”고 말하면서 활짝 웃고 있다. 백 감독은 지난달 국제아이스하키연맹 월드챔피언십 진출 확정 직후에도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제대로 준비를 해야 행운이 찾아온다. 기적은 없다.”

지난 16일 서울 용산구 이촌동 자택 앞에서 만난 백지선(50) 남자아이스하키대표팀 감독의 눈은 이미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향해 있었다. 백 감독은 지난달 말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끝난 국제아이스하키연맹 세계선수권대회 디비전 1 그룹 A(2부 리그)에서 대표팀을 2위로 이끌었다. 내년에는 꿈에 그리던 월드챔피언십(1부)에 출전한다. 축구로 치면 월드컵 16강에 사상 처음으로 진출한 셈이다. 하지만 백 감독은 담담했다. 월드챔피언십 진출은 한국 아이스하키가 성장하면서 거쳐야 하는 하나의 관문이지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백 감독은 “이제 시작이고 동계올림픽, 월드챔피언십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놓여 있다”며 “벌써 만족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다음 시즌을 위한 준비 역시 이미 시작했다. 지난 15일부터 대표팀이 진천선수촌에서 11주 체력훈련에 들어간 가운데 백 감독은 17일 독일 쾰른으로 출국, 국제아이스하키연맹 총회에 참석했다. 총회에서 다른 나라 대표팀과의 연습 경기 일정을 잡았다. 백 감독은 “강팀과 경기하면서 경험을 쌓으면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백 감독의 목표는 확실하다. 첫 번째는 내년 2월 열리는 평창동계올림픽 메달 획득. 이어 내년 5월 덴마크에서 열리는 월드챔피언십에 출전해 잔류 이상의 성적을 거두는 것이다. 그는 “메달을 꼭 획득하겠다는 생각으로 올림픽을 준비해야 한다”며 “출전하는 데 의미를 둔다면 올림픽에 나간 것으로 만족하게 된다”고 말했다. 물론 평창동계올림픽 메달 획득과 월드챔피언십 잔류는 굉장히 어려운 과제다. 세계 최강이 출전하는 올림픽에서 한국이 1승을 올리는 것조차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국제아이스하키연맹 세계선수권이 지금의 체제를 갖춘 2012년 이래로 2부에서 승격한 팀이 월드챔피언십에 잔류한 사례는 없다. 두 개조로 나뉘어 펼쳐지는 월드챔피언십에서 조 꼴찌는 항상 2부에서 승격한 팀이었다.

하지만 백 감독은 자신감이 넘친다. 그는 “충분히 공부하고 시험을 치르면 큰 부담이 없지만, 공부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시험을 보지’라는 걱정을 하기 마련”이라며 “할 수 있는 준비를 다하면 가벼운 마음으로 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치열한 준비 과정을 거치면서 얻은 자신감은 말로만 이길 수 있다고 외치는 것과는 다르다. 메달을 목표로, 후회가 남지 않게 매일 최선을 다한다면 결과를 떠나 승리자가 될 수 있다. 백 감독이 ‘메달이 목표’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다.

2014년 8월 부임한 백 감독이 3년 동안 대표팀을 디비전 1 그룹 B(3부)에서 월드챔피언십으로 이끄는 과정은 가시밭길이었다. 부임 당시 대표팀은 디비전 1 그룹 A에서 5전패를 당해 디비전 1 그룹 B로 강등된 상태였고, 평창동계올림픽 출전 역시 불투명했다. 그는 “실업과 대학 소속인 국가대표들의 일정이 각기 달라 선수들을 모으기가 어려웠고, 링크를 확보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백 감독은 국가대표의 정신력을 강화하고 체력을 키우는 등 기초부터 다져 나갔다. 그리고 지치지 않는 체력과 강력한 압박, 순간적인 스피드를 활용한 ‘벌떼 하키’라는 고유의 팀 컬러를 완성했다. 대표팀은 강한 상대와 맞붙어 차례로 승리를 거두면서 일취월장했다. 2016년 4월에는 34년 만에 일본을 처음으로 격파했고, 지난달에는 12번 싸워 모두 패했던 카자흐스탄을 꺾었다. 백 감독은 월드챔피언십 진출을 ‘기적’에 비유하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기적이 아니라 취임 기자회견에서 밝혔던 원칙 ‘매일 조금씩 발전하자’(Getting Better Everyday)를 선수들과 함께 실천한 결과라는 게 그의 설명. 백 감독은 “갑자기 26마일(마라톤 풀코스)을 뛸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진천선수촌에서 훈련에 돌입하면서 이 점을 국가대표팀에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백 감독은 “모두 기적이라고 하지만, 우리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점을 선수들에게 이야기했다”며 “우리를 제외하고는 승격 가능성을 그 누구도 믿지 않았지만 우리는 할 수 있다고 믿었고 결국 해냈다”고 강조했다. 백 감독은 선수들에게 “모든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마라, 현재 자리에 오르려고 노력한 것을 잊지 마라”고 주문했다.

그의 삶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도전이다.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난 백 감독은 1세 때 캐나다로 넘어갔고 캐나다 아이들처럼 7세 무렵 자연스럽게 스틱을 잡았다. 그리고 아시아계 최초로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 선수가 되기까지 피나는 노력과 정성을 쏟아부었다. 백 감독은 “나아지기 위해서는 항상 도전해야 한다”며 “매번 성공할 수는 없지만, 도전을 통해 경험을 쌓을 수 있고 행복 역시 도전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도자로서 선수들에게 요구하듯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투자했다. 파워를 기르기 위해 주차장에서 차를 밀고, 300파운드(136㎏)에 달하는 벤치프레스를 즐겼다. 여름에는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스틱을 든 채 길거리를 누볐다.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돌면 백 감독은 그 뒤를 쫓으면서 지구력을 키웠다. 백 감독은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라면서 “아이스하키를 시작한 후 여러 차례 실패했으나 좌절하지 않고 다시 시작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터뷰 도중 휴대전화에 저장한 캐나다 아이스하키 선수들에 관한 통계 수치를 보여줬다. 백 감독은 “캐나다에 등록된 아이스하키 선수는 56만 명에 이르는데 이 가운데 NHL의 지명을 받는 선수는 0.2%에 불과하다”며 “NHL에 입성하더라도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는 전체 등록 선수의 0.025%에 그치고, NHL 선수들의 평균 경력은 5.5년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백 감독이 치열한 경쟁을 뚫고 NHL에 진출해 우승 트로피인 스탠리컵을 2번이나 들어 올릴 수 있었던 데에는 아버지의 지원이 밑거름됐다. 그의 아버지는 그 시대의 부모들이 그렇듯이 자녀의 성공을 위해 헌신했다. 백 감독은 “아버지는 우리 형제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캐나다 이민을 결정했고, 자식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셨다”며 “아버지의 헌신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백지선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아버지는 어린 백지선의 훈련 파트너였고 스승이었으며 든든한 후원자였다. 게다가 그의 아버지는 선수로서 갖춰야 할 자세도 가르쳤다. 백 감독이 피츠버그 펭귄스와 처음 계약할 때 그의 아버지는 선수 생활이 끝난 후 팀이 학비를 지원하는 조건을 포함시켰다. 백 감독이 선수로서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바르게 성장하기를 바란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백 감독의 뿌리가 한국이라는 점도 늘 강조했다. 백 감독이 한국 국가대표가 되는 걸 보고 싶어 했고, 2013년 작고하기 전엔 “한국으로 돌아가 조국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가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것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 애국심과 자부심 역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백 감독은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한 나라를 대표한다는 것은 특별히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니 그에 걸맞은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그의 리더십은 세심함과 카리스마가 결합해 완성됐다. 백 감독은 눈물이 참 많다. 그는 “영화 ‘국제시장’을 보면서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에 펑펑 울었다”고 귀띔했다. 평창동계올림픽 출전이 확정됐던 2014년, 디비전 1 그룹 B에서 우승했던 2015년, 월드챔피언십 진출을 확정했던 지난달 어김없이 눈물을 흘렸다. 가족 사랑은 각별하다. 백 감독은 취미가 ‘가족’이라고 말할 정도. 아이스하키와 관련된 시간 외엔 모두 가족에게 할애한다. 또 선수들의 개인적인 일을 꼼꼼하게 챙긴다. 백 감독은 스스로를 ‘세심한(sensitive)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선수들은 내 자식, 가족 같다”며 “자식이 잘하면 얼마나 예뻐 보이느냐”며 “선수들은 저마다의 개성을 지니고 있기에 각각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어울리며 이야기한다”고 설명했다.

백 감독은 카리스마가 넘친다. 선수들이 잘못하면 호통을 치고, 상대가 심한 반칙을 하면 심판에게 거세게 항의한다. 감독과 코치, 감독과 선수의 경계가 명확하고 그의 권위를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게 한다. 그가 강요하는 건 아니다. 선수들에게 믿음을 주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분위기가 자리 잡았다. 백 감독이 지시한 대로 훈련하고 경기하면 이긴다는 경험이 쌓이면서 선수들의 신뢰는 확고해졌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월드챔피언십 이후 계획을 세웠느냐”고 물었다. 백 감독은 “왜 지금 미래를 걱정하나?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그것부터 해결해야지”라고 말하며 웃었다. 한국 아이스하키의 발전을 위해 1년간 매진하겠다는 뜻이었다.

조성진 기자 threemen@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