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徐遊記>(1137) 55장 사는 것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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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로 했다. 젊은 사람들이라면 첫눈에 반한다든가 믿는 경우가 흔하겠지만 박재영 세대는 다르다. 경험에 의하면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만 하는 것이 정상이다. 박재영은 3개나 되는 짐가방을 끌고 김영태를 따라 고구려호텔로 들어섰다. 김영태도 짐가방이 2개였지만 박재영의 가방 하나를 들어주었다.

“방 하나만 씁시다.”

프런트에서 김영태가 정색하고 말했다.

“방값 아끼세요. 나는 따로 잘 테니까.”

다행히 프런트 직원이 러시아인이어서 박재영은 눈치 안 보고 사양했다.

“저, 괜찮아요. 호텔비 있어요.”

어차피 일자리가 확실해질 때까지 싼 호텔에 묵을 작정이었던 것이다. 김영태가 머리까지 저으며 만류했다.

“그러지 마세요. 난 나쁜 사람 아닙니다. 그리고…….”

김영태가 똑바로 박재영을 보았다.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다.

“이혼하고 나서 여자하고 잠자리 같이 한 것 몇 번 안 됩니다. 그러니까…….”

“알았어요.”

얼굴이 더 빨개진 박재영이 한 걸음 물러서면서 방 하나로 결정이 되었다. 짐가방 5개를 날라준 직원 둘에게 김영태가 각각 5불씩 팁을 주었더니 박재영이 5불을 꺼내 내밀었다.

“이거 받으세요. 제 짐값요.”

그때 김영태가 처음으로 입을 벌리고 소리 없이 웃었다.

“회사 망하고 도망 나왔다니까 거지인 줄 압니까? 됐습니다.”

“호텔 방값도 절반 드릴 거예요.”

“너무 그러지 말아요.”

박재영이 내민 5불을 받아 탁자 위에 놓은 김영태가 손을 내밀었다.

“거기, 식당 주소하고 전번을 주세요. 내가 알아보고 올 테니까.”

“네?”

“그동안 방에서 자요. 난 잠이 없어서 대개 낮에 자요.”

“주소는 왜요?”

“내가 알아보려고 합니다. 식당이 어떤지,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박재영의 시선을 받은 김영태가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아까 의욕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지요? 기를 쓰고 뭘 해야겠다는 생각이 없다고도 한 것 같은데.”

“…….”

“일단은 할 일이 생겼어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모르지만 난 꼭 할 일을 염두에 두고 삽니다. 박재영 씨 덕분에 당장 할 일이 생긴 셈이지요.”

그때 박재영이 가방에서 접힌 쪽지를 꺼내 내밀었다.

“여기요.”

김영태가 받자 박재영이 시선을 내리고 말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호텔방 안에 같이 있게 된 것이 아직 믿기지 않아요.”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일어나는 거죠.”

손목시계를 본 김영태가 창가의 의자에 앉더니 박재영에게 말했다.

“저기, 욕실에서 좀 씻고 옷도 갈아입으세요. 그리고 침대에서 좀 자요. 난 그냥 여기 앉아 있다가 9시쯤 나가서 일 볼 겁니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지금 당장 그 사람한테 전화할 필요는 없어요. 아직 이른 시간이니까. 내가 알아보고 와서 해도 늦지 않아요.”

“고맙습니다.”

“친척보다 날 믿으라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 사는 것이 다 순리대로 안 됩니다. 계산이 먼저더군요.”

그러고는 김영태가 창밖으로 머리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