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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카페 게재 일자 : 2017년 06월 14일(水)
東西洋 열강 침탈기에 세워진 ‘동서양 건물의 조화’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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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중구 정동에 자리 잡은 덕수궁의 중화전(앞)과 석조전(왼쪽). 동서양의 만남과 같은 두 건물의 동거는 대한제국이 출범한 시대적 상황을 오롯이 보여준다. 아래 사진은 덕수궁 전경. 덕수궁은 1896년 중건된 근대 도시궁궐로 입지부터 여타 고궁과 다르다. 고궁들은 대부분 산을 배경으로 하지만, 덕수궁은 높은 빌딩이 배경인 궁궐이다. 김선규 기자 ufokim@

안창모의 도시 건축으로 보는 서울 - ③ 덕수궁 석조전과 중화전

서울에는 5개의 궁궐이 있다. 그렇지만 5곳의 궁궐 모두가 고궁(古宮)은 아니다. 고궁은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의 궁궐을 말하는데, 이 기준에서 벗어나는 궁궐이 있다. 덕수궁이다. 덕수궁은 1897년 대한제국의 출범으로 황궁이 된 궁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1876년을 근대의 기점이라고 한다. 이 기준으로 보면, 덕수궁은 1896년에 중건되어 1897년에 대한제국의 황궁이 되었으니, 고궁이 아닌 근대 도시궁궐이라고 할 수 있다.

덕수궁이 근대궁궐이라는 사실은 덕수궁을 보는 시선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사실 덕수궁은 조선을 대표하는 궁궐인 경복궁이나 창덕궁과 다른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궁궐의 입지가 다르다. 덕수궁은 다른 궁궐과 달리 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 않다. 도심 한복판에서 높은 빌딩이 배경인 궁궐이다. 한편 덕수궁은 전체 모습이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규모도 매우 작다. 덕수궁은 다른 궁궐과 달리 2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고, 정문이 2개였으며, 금천교도 2개였다. 더 중요한 것은 정전도 2개였는데, 두 정전 모습이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중 하나는 우리의 전통건축과는 전혀 다른 서양건축 모습으로 지어졌다. 석조전 이야기다.

다섯 개의 궁궐 중 막내로 규모가 가장 작은데도 불구하고 2개의 정전을 가진 궁궐! 상식적으로 쉽게 이해되지 않는 덕수궁의 가치는 오랫동안 묻혀 있었다. 올해는 대한제국이 출범한 지 2주갑, 120년이 되는 해다. 지난 10여 년 사이에 대한제국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급증하면서, 무능한 군주의 상징이었던 고종황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달라지고 있고, 대한제국이 대한민국의 시작점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그 중심에 덕수궁의 두 정전, 석조전과 중화전이 있다.

석조전은 어떻게 건립되었을까? 고종은 국모가 일인에 의해 시해된 을미사변으로 인해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러시아공사관에서 머문 1년 동안 대한제국을 준비한 후 경운궁으로 환어한 뒤 본격화된 제국 건설의 조치 중 하나가 석조전 건축이었다. 1896년 2월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한 직후 경운궁의 수리를 명한 고종이 1년 뒤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환어한 후 대한제국을 선포했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환어한 고종이 석조전을 영국인 건축가 J R 하딩에게 의뢰했다는 사실은 석조전이 갖는 의미가 가볍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석조전은 총세무사로 조선을 위해 일한 맥레비 브라운의 건의로 건축되었다. 브라운은 왜 석조전 건설을 건의했을까? 1893년부터 조선에서 근무한 브라운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서울을 떠난 인물이다. 브라운은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의 국가체제 전환이 갖는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고, 고종이 꿈꿨던 대한제국을 위해 석조전이 필요하다고 건의한 것으로 판단된다.

중요한 것은 석조전이 신고전주의 건축양식 건물이라는 점이다. 신고전주의 건축은 18세기 중반 계몽주의 시대를 배경으로 성장해 제국주의를 통해 보편화된 서양문화의 상징적 건축양식이다. 따라서 신고전주의 양식의 석조전은 대한제국이 서양식 근대국가를 지향하고, 서양식 근대국가를 운영할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건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종은 석조전을 짓기 전 로마건축을 대표하는 개선문의 모습을 본뜬 독립문을 지어 조선을 두고 각축을 벌이는 열강들에 조선이 자주국임을 선언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건축이 갖는 상징적 기능을 알고 있던 것이다.

중화전이 지어진 것은 1901년 8월 25일 고종의 명에 의해서였다. 현재의 중화전이 지어지기 전에는 즉조당이 중화전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대한제국 출범 당시에는 계획에 없었던 중화전이 지어진 것은 1899년 청나라와 통상조약을 새로 수립하고, 대한제국이 안정화된 시점에 고종이 즉위 40주년을 맞이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대한제국을 인정하지 않던 청국과의 관계가 정상화되면서, 청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자신감이 미뤄두었던 전통적 정전인 중화전 건설로 이어진 것이다. 그런데 중화전이라는 이름이 특이하다. 경복궁이나 창덕궁 등 다른 궁궐의 경우 근정전, 인정전 등과 같이 ‘정(政)’이 시의 운율처럼 사용되었는데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은 이 규칙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용에서 중화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희로애락이 발하지 않은 상태’를 중(中)이라고 하고, ‘발하여 모든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 중은 천하의 큰 근본이고, 화는 천하의 공통된 도다. ‘중화’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에 있고 만물이 잘 길러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부지런하고, 어질고 밝은 정치를 통해 태평성대를 기대하며 정전에 붙이던 이름과는 달리 중화전의 이름에는 제국이 출범하던 당시 조선을 두고 이권쟁탈에 눈이 멀었던 세계열강이 질서를 찾기 바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구체적으로 석조전과 중화전이 지어지는 과정과 모습을 살펴보자. 석조전은 1897년 10월 12일 출범한 대한제국의 첫 번째 정전으로 지어졌다. 오랫동안 외세침탈의 상징이라는 오명이 씌워 있었지만, 이제는 당당하게 대한제국의 중심이다. 석조전 정면은 기단 위에 기둥이 열 지어 서 있고, 중앙에는 삼각형 모양의 박공이 위치한 그리스 신전풍의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 박공에는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이 새겨져 있다. 돌출된 정면의 중앙에는 둥근 기둥, 좌우에는 사각형 기둥을 두어 위계에 따른 차이를 두었으며, 전면과 좌우에 회랑을 두었다.

석조전은 지하 1층, 지상 2층의 건축이다. 외관상 3층 건축으로 보이지만, 중앙 계단을 통해 1개 층을 올라가면 현관이 위치하는데, 계단이 끝나는 곳이 1층이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1층은 실제는 지하층인 셈이다.

이러한 층 구분은 지면에 면한 층은 창고나 하인들이 사용하는 공간이었던 유럽 건축의 전통에 따라 석조전이 지어졌기 때문이다. 현관을 들어서면 2개 층 높이에 천창이 설치된 홀이 나온다. 천창은 인공조명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 큰 홀에 빛을 끌어들이기 위한 장치다. 2개 층 높이의 중앙 홀은 여유로움과 화려함을 갖고 있다.

석조전의 내부는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황궁으로서의 품격을 갖추고 있다. 석조전은 전통 궁궐에서 왕의 집무 공간인 편전과 취침 공간인 침전이 하나로 통합된 건축이다. 1층에는 폐현실이 위치한 업무 공간이며, 2층에는 황제와 황후의 생활을 위한 침실과 거실 등이 위치했다. 1층과 2층을 둘러싸고 있는 베란다의 열주 사이로 궁궐의 풍경이 펼쳐진다. 이는 경복궁이나 창덕궁에서는 볼 수 없는 덕수궁만의 풍경이다. 베란다 너머 기하학적이고 질서정연한 모습의 서양식 정원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분관(옛 이왕직미술관, 1938)과 함께 만들어졌다.

그러나 근대국가 건설의 의지를 담아 세워진 석조전은 완공된 해에 국권을 빼앗긴 탓에 제국의 정전으로 사용되지 못했다. 일제 강점 후 1919년까지 태황제인 고종이 덕수궁에 거처하면서 석조전은 만찬 등의 장소로 사용되거나 영친왕이 고국을 방문할 당시 숙소로 사용되었다. 고종황제가 승하한 뒤, 석조전은 미술관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방 후에는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된 현대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석조전과 중화전은 대한제국으로 국체를 바꾼 고종의 의지와 시대상이 선명하게 담겨 있는 건축이다. 그런데 두 건물은 나란히 남쪽을 향해 지어졌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로 어긋나게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두 건물의 축이 어긋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결론은 두 건물이 함께 계획된 건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어진 과정을 보자. 1897년 4월 6일자 독립신문에는 ‘영국사람 브라운 씨와 통변관 최영하 씨가 3월 15일 경운궁에 들어가서 궁 안의 지형을 측량하고 나왔다더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는 석조전 설계를 의뢰하면서 실시한 오늘날 경계측량에 해당하는 행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석조전은 늦어도 1898년에는 하딩에게 설계가 의뢰되었고, 1900년 5월 이전에 설계가 완료되었다.

1900년 5월 26일 미국 건축전문지 ‘American Architecture and Building News’에 석조전 모형사진이 실렸다. 조선에서는 모형을 만드는 전통이 없었지만 새로운 건축을 설계하면서 이해를 돕기 위해 모형을 만들었던 것이다. 1900년 말에 기초공사가 시작되어 1901년에 완료되었으나, 1902년에 공사가 잠시 중단되었다가 1903년에 재개되었다. 재개된 공사는 1905년에 외관이 마무리되었으나, 또다시 중단되었다. 실내공사가 시작된 것은 1907년이었으며 전 공정이 완료된 것은 1910년 8월이었다.

한편 중화전 공사는 1901년 8월 25일 고종의 명에 의해 시작되었다. 같은 해 10월 11일에 치석(돌을 다듬음)이 시작되어 1902년 11월 12일에 상량이 이뤄졌다. 그러나 1904년 4월의 화재로 경운궁이 소실된 후 4월 20일 공사가 다시 시작되어 1905년 8월에 외부공사가 마무리되었다. 석조전 공사가 먼저 시작되었지만 중화전 공사가 시작되자 석조전 공사가 중단되었고, 중화전이 완공된 후에 석조전 공사가 재개되는 과정이 반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석조전과 중화전 두 공사가 중복되지 않은 것은 경제적 부담과 함께 두 공사 현장이 인접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중화전 건축 계획이 없던 시기에 시작된 석조전은 대지의 형상과 경계 그리고 향의 조건이 반영되어 정남향으로 건축되었지만, 중화전은 이전에 중화전의 역할을 했던 즉조당의 남쪽에 지으라는 황제의 명에 따라 즉조당의 축을 따라 지어졌다.

이로 인해 두 건물의 배치 축은 나란하지 않고 비스듬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석조전 남측의 정원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두 건물의 배치가 물리적 충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1919년 고종이 서거하고, 1930년대 덕수궁 공원화 계획에 따라 중화전의 회랑이 철거된 후 석조전 남측에 현재의 서양식 정원이 조성되면서 중화전의 회랑 영역이 침해되었다.

이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석조전과 중화전을 들여다보면 무엇이 달라 보일까? 동서양의 만남과 같은 석조전과 중화전의 동거는 대한제국이 출범한 시대적 상황을 오롯이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문화일보 5월 24일자 28면 2 회 참조)

안창모 경기대 교수
e-mail 김선규 기자 / 사진부 / 부장 김선규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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