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개뿔박물관, 노박 갤러리, 이화마을박물관 등 크고 작은 미술관과 박물관이 늘어선 서울성곽길 낙산구간의 이화동 박물관 골목. 신창섭 기자 bluesky@munhwa.com
서울 성곽마을
조선의 태조는 한양을 수도로 삼고 궁궐과 종묘를 지은 후 총 18.2㎞ 길이의 성곽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1396년 1월부터 축성을 시작해 1397년 4월, 동대문 옹성까지 완성했다 하니 공사가 꽤 빨리 진행됐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422년(세종4년)에 전면적인 보수 과정에서 토성 부분을 석축으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처음부터 성벽 모두가 돌로 돼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후에도 광해군과 숙종, 영조, 고종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개보수가 있었는데 태조와 세종, 숙종 때 이루어진 대규모 보강공사로 현재의 모습이 갖추어졌다.
한때는 한 나라의 수도를 지키는 단단한 성이었지만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평지에 있던 성곽은 개발로 잘려나가고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경사지에 있던 성곽만이 겨우 살아남게 됐다. 사람의 접근이 어려웠던 산지의 성곽들도 6·25 전쟁과 급격한 개발의 시대를 거치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이곳이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가 됐다. 이렇게 제 몸 하나를 유지하기 어려웠던 서울성곽이 다시 주목 받기 시작한 것은 2006년, 경복궁의 숙정문이 개방되면서 서울성곽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졌고 성곽을 도는 한양도성 순성길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부터다.
혜화문에서 시작하여 낙산공원, 흥인지문으로 연결되는 한양도성 순성길인 낙산구간에서 만나는 이화마을은 주민들에게 피해가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벽화마을로도 유명하다. 낙산전망대를 지나, 성곽 안 마을인 이화마을과 성곽 밖 마을인 창신동 봉제마을이 좌우로 내려다보이는 경치 좋은 곳에서 규모는 작지만 아기자기한 모습의 박물관이 모여 있는 골목을 만날 수 있다. 와인 따개를 전시하고 있는 개뿔박물관, 봉제박물관 수작, 갤러리 노박, 부엌박물관 배오개, 대장간인 지붕위의 장닭, 무엇보다도 이화동의 과거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마을박물관까지 소소한 즐거움이 가득한 곳이다.
이곳에 있는 비슷한 모양의 집들은 1950년대에 연립주택처럼 지어진 일본식 목조건물로 1층은 넓고 2층은 좁은, 얼핏 보면 작은 방앗간 같은 귀여운 모습이다. 내부의 공간들은 서로 이어졌다 끊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즐거운 공간의 변화를 느끼게 한다. 작은 창을 가진 외관에 예쁜 색을 입혀놓아 밤이 되면 산 아래 도시의 불빛을 배경으로 동화 속의 집처럼 아련하게 다가온다. 그런 까닭에 종종 인기 멜로드라마 여주인공의 집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성곽에 기대어 있는 카페나 미술관들은 성곽과 어울려 독특한 분위기를 뽐내고 있는데 특히 개뿔박물관의 성벽을 마주한 화장실은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장충체육관에서 시작하는 한양도성 순성길 남산구간의 성곽 안은 남산을 배경으로 반얀트리, 신라호텔, 국립극장 등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건물들이 즐비하지만 성곽 밖 마을은 여느 달동네와 비슷한 상황이다. 가파른 성곽길의 정점을 향해 오르다 보면 성곽을 배경으로 낡았지만 범상치 않은 건물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곳이 복합문화공간인 더 서드플레이스(the 3rd place)이다. 서드플레이스는 집과 사무실을 벗어난 제3의 공간이라는 의미인데 그 의미를 몰라도 이곳이 흔히 볼 수 있는 집이나 사무실이 아니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더 서드플레이스는 기존의 낡은 건물 일부를 잘라 내거나 덧대는 방식으로 3개의 건물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있어 마치 하나의 건물처럼 보인다. 전시장 2층의 테라스에 올라앉으면 서울의 숨겨진 동쪽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흔하게 볼 수 없던 서울의 색다른 모습에 설렘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3개의 공간은 전시관, 북 스튜디오, 청년취업 상담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중구에서 제공한 낡은 주택을 젊은 기획자, 디자이너, 건축가가 모여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들었다. 작은 공간이지만 새로운 내용의 전시와 기획으로 신선함이 느껴진다. 더 서드플레이스와 이웃한 꼬레아트에서는 타악 공연과 체험교실을 수시로 열고 있어 한 곳에서 다양한 문화체험을 할 수 있으며 매년 성곽길에서 예술축제가 열리는 등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발전하고 있다.
한때는 성안의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또 한때는 가난한 사람들을 품어주던 서울 성곽이 지금은 새로운 문화공간의 든든한 울타리로 거듭나고 있다.
건축가·디자인연구소 이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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