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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명작의 공간 게재 일자 : 2017년 06월 16일(金)
‘과거’를 간직한 도시… 전통윤리에 발묶인 ‘애틋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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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상옥 감독의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촬영지인 경기 수원시 북수문(화홍문)과 방화수류정 전경. 아래 사진은 이곳에서 촬영한 영화 속 장면.

(83)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촬영지… 경기 수원시 행궁동

역사와 문화의 도시 경기 수원시, 그중에서도 행궁동은 조선 정조 때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볼 수 있어 국내외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왕이 본궁을 떠나 잠시 머물던 행궁(行宮)인 화성(華城)은 220년 전에 축성됐음에도 불구하고 성곽이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을 뿐만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도 그때와 같이 흐르고 있다.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 또한 현재에도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수원 화성은 이렇듯 과거의 고풍스러움을 그대로 간직한 채, 우리로 하여금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재촉한다.

◇행궁동에서 만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 행궁동의 하늘은 유난히 낮다. 머리를 맞대고 늘어선 건물들이 키를 재기라도 하는 듯, 아이들처럼 올망졸망 귀엽게 늘어서 있다. 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면서 행궁동 주변은 과거를 보존하기 위해 개발이 제한되었으나 주민들과 지역 예술가들이 뜻을 모아 골목골목마다 서로 다른 이야기와 특색을 지닌 수원을 대표하는 문화거리로 재탄생시켰다.

행궁동 일대는 신상옥 감독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1961년 신 감독은 주요섭이 1935년 조광(朝光) 창간호에 발표한 단편소설 ‘사랑손님과 어머니’를 영화화했다. 이 작품은 1930년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거친 역사보다 당시 우리 고유의 풍습과 시대상에 초점을 맞췄다. 여섯 살 난 옥희의 눈을 통해 비친 어른들의 애틋한 감정을 순수하게 그리며 사랑의 상상력을 한층 증폭시킨다.

이 영화는 시어머니(한은진)와 청상과부인 며느리 정숙(최은희)이 살고 있는 시골의 명문가에 서울에서 내려온 죽은 남편의 친구인 화가 한선호(김진규)가 찾아와 사랑방에 머물게 되면서 시작된다. 선호와 정숙은 어린 딸 옥희(전영선)를 사이에 두고 조금씩 사랑의 감정을 만들어가지만 당시 수절해야 하는 관습을 거스를 수 없었던 정숙은 선호의 구애를 거절한다. 결국 시어머니는 선호를 서울로 돌려보내게 되고 정숙은 뒷산에 올라가 애틋한 마음으로 선호가 탄 기차가 사라질 때까지 그 모습을 지켜본다.

이 영화의 주 촬영지는 팔달구 행궁로에 위치한 한옥이다. 현재까지도 잘 보존돼 있는 이 한옥은 1937년 지어진 전통가옥으로, 한국 영화 역사의 한 축으로서 보존가치가 매우 높은 건물로 인정받고 있다. 영화 속에 등장했던 대문의 왼쪽, 즉 사랑방 손님과 식모가 드나들던 출입구는 다소 변형돼 있긴 하지만 선호가 정숙을 내다봤던 창문과 정문 등의 외형은 촬영 당시 그대로 유지돼 있다. 그리고 건물 벽면에는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촬영지임을 알리는 현판이 붙어 있다.

◇그리움의 장소, 화홍문 언덕 = 신 감독은 이혼과 재혼이 자유로울 수 없었던 시절, 원작에서 보여준 한국의 보수적인 윤리를 비판적으로 되새기며 그 속에 담긴 전통적인 여인상을 아름답게 그려냈다. 이 영화에서 선호와 정숙은 사회적 관습과 통념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봉건적이고 유교적인 사상의 잔재가 남아 있었기 때문에 재혼을 두려워했다. 신 감독은 주인공들을 통해 그릇된 사회적 통념이 개인의 삶과 행복을 얼마나 억압하는지를 보여줬다.

배우 최은희 또한 이 영화에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열연했다. 그 배경에는 신 감독과의 재혼도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최은희는 1947년 영화 ‘새로운 맹서’로 은막에 등장했다. 당시 영화 촬영감독이었던 김학성과 결혼한 뒤 이혼한 그는 1954년 신 감독과 재혼했다.

당시 사회관습을 고려하면 최은희는 신 감독과 재혼하면서 사회의 보수적인 시선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신 감독의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 출연해 수절하는 한국의 전통적인 여인상의 표본으로 높이 평가됐고, 국내는 물론 동양을 대표하는 여배우로 각인됐다. 인터뷰를 통해 최은희는 본인의 아이디어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멀찍이 떨어져 걸어가고 그 사이를 옥희가 오가는 장면을 연출했다고 말하며 영화에 대한 애착을 나타냈다. 이러한 설정으로 두 주인공이 서로 쑥스러워하며 감정을 숨길 때, 순수한 아이가 사랑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  영화 주 촬영지인 수원시 팔달구 행궁로에 위치한 한옥(위)에는 촬영지임을 알리는 현판이 붙어 있다. 아래 사진은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한데우물.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한데우물(집 울타리 밖에 있는 우물) 또한 보존돼 있다. 한옥과 불과 20m 떨어져 있는 우물가는 작품 속에서 식모가 계란 장수를 처음 맞이한 장소이자, 옥희가 사라지자 정숙이 옥희를 찾으러 다니던 중 우물 속을 살펴봤던 곳이다. 그리고 정숙의 거절에 힘들어하던 선호가 술을 마시고 들어온 밤에 두 사람은 우물가에서 단 한 번의 포옹을 하기도 했다. 또한 마을 아낙들이 한데 모여 이야기꽃을 피울 때 시어머니가 선호에 대한 나쁜 소문을 듣고 서울로 보내는 계기가 됐다. 한데우물은 한때 소실됐지만 지금은 외형만 복원된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

화홍문도 영화 속 촬영 장소다. 사랑방 아저씨와 옥희는 금방 친해져서 뒷동산에 놀러 가고 돌아오는 길에 옥희 친구들을 만나게 되는데, 친구들은 옥희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놀린다. 옥희는 사랑방 아저씨에게 아버지가 돼 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는데 이 장면이 촬영된 곳이 팔달구 북수동에 위치한 화홍문 주변 일대다. 옥희와 사랑방 아저씨가 그림을 그리던 곳은 화홍문 동쪽 언덕 위에 위치한 방화수류정(동북각루)이라는 정자(亭子)이며, 옥희가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 나누는 곳은 그 옆 북암문이다.

화홍문은 영화 속에서 꽤 자주 등장한다. 정숙이 사라진 옥희를 찾으러 다닌 곳도 화홍문이며 옥희와 친구들이 놀이터 삼아 놀던 곳도 이곳이다. 화홍문의 수문을 통해 흐르는 수원천을 사이에 두고 정숙과 선호는 서로를 향해 애틋하게 바라보며 마음을 나눈다. 무엇보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정숙이 선호를 떠나보내며 그리움에 사무쳐 하는 장면도 화홍문 주변 언덕에서 촬영됐다. 화홍문 바깥이 서울 방향인데 정숙과 옥희는 서울로 떠나는 아저씨를 바라보며 오랫동안 서 있었던 것이다. 화홍문은 수원천의 범람을 막아주는 동시에 방어적 기능을 갖춘 수문으로 화강암으로 쌓은 다리 위에 지은 문이다. 7개의 수문을 통하여 맑은 물이 넘쳐흘러 물보라가 생길 때면 햇살 사이로 생겨난 무지개가 화홍문을 한층 더 아름답게 만든다.

◇사회적 관습과 통념에 맞선 삶 = 주요섭은 사랑을 통해 불합리한 사회관습과 제도를 비판하려 했다. 당시의 사회적 제도와 관습은 ‘사랑손님과 어머니’ ‘아네모네의 마담’ 그리고 ‘첫사랑 값’ 등 일련의 연애소설을 통해 잘 드러난다. 그는 작품에서 유교적이고 가부장적인 사고방식과 편견이 개인의 행복을 얼마나 억압하는가를 보여줬다.

‘사랑손님과 어머니’에서 옥희의 어머니는 기독교 신자였으나 과부의 재가를 금지하는 유교 관습을 떨치지 못했다. 주요섭 역시 유학 중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지만 상대가 조선인이 아니었다는 것과 조국이 처한 식민지 현실 때문에 헤어져야만 했다. 주요섭은 자신의 작품이 사랑을 주제로 했기 때문에 애정소설 작가 또는 통속소설 작가로 그릇되게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그는 사랑을 통해 사회관습과 제도를 비판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세우고자 한, 사회의식이 강한 작가였던 것이다.

신 감독이 주요섭의 소설을 택한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가 연출한 많은 영화에서 신 감독은 현대와 과거의 경계에서 갈등을 빚어내는 전통 윤리의 부당함을 드러내고자 했다. 신 감독 자신이 유교적인 가치관을 저버리지는 못했지만 봉건 윤리에 저항하고 자유분방한 삶을 추구했던 것은 그의 영화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단편소설을 각색해 만든 문예영화의 가작(佳作)이면서 동시에 신 감독의 영화미학과 삶의 가치관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를 통해 어찌 보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듯이 보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수원 화성은 정조가 세운 조선 후기 최대 신도시다. 고통 속에서 죽어가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최후를 열한 살 때 목격한 정조는 당시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을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탄생한 곳이다. 1789년 건립된 화성행궁은 국내에 있는 행궁 중에서도 규모나 기능 면에서 단연 으뜸으로 꼽히는 대표적인 행궁이며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우리 민족 문화 말살 정책으로 사라졌다가 복원됐다.

220년 전 행궁이 잘 보존된 덕분에 행궁동 일대는 최근에도 영화촬영지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화성행궁을 비롯해 이곳 카페와 문화거리에서 촬영됐다. 곽재용 감독의 영화 ‘클래식’도 수원에서 촬영했고, 김하늘, 강지환 주연 영화 ‘7급 공무원’ 역시 수원 화성과 장안문을 촬영지로 삼았다. 최근에는 이준익 감독의 ‘사도’가 관객들에게 큰 인기를 얻으면서 정조와 수원화성, 행궁 등이 다시 한 번 조명을 받았다.

사회적 관습과 개인의 행복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가 있을까.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와 같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사회적 관습과 통념도 중요하겠지만 개인의 자유와 행복 또한 무시할 수는 없다. 녹음이 짙어가는 6월, 행궁동에서 만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자칫 통속적으로 보일 수 있는 사랑 이야기를 통해 진지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글·사진 = 양경미 영화평론가·한국영상콘텐츠산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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