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한세기 같은 전쟁통에도… 삶은 흐르더라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피란 과정에서 헤어진 아버지의 생사를 반년 가까이 알지 못하게 되자 거목처럼 흔들림이 없던 어머니가 소금에 절인 푸성귀처럼 힘이 빠졌다. 자기밖에 몰랐던 사춘기 소녀 강인숙은 식구를 길에서 얼어 죽게 할 수 없다는 강인함이 안에서 생겨나는 걸 알고 스스로 놀랐다. 1950년 9월 부산 광복동 뒷골목 풍경. 에피파니 제공

어느 인문학자의 6·25 / 강인숙 지음／에피파니

6·25를 다룬 전쟁소설이 적지 않지만, 박완서의 소설들이 독자들에게는 각인돼 있을 듯하다. 대개 남성 작가가 기둥으로 삼는 이념적 틀에서 벗어나 여성 주체가 생래적으로 갖는 생명에 대한 경외와 타자에 대한 배려, 비극을 극복하는 유연성이 전쟁 체험의 속살을 더 생생하게 증언하고 치유적 효능도 더 있기 때문일 것이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강인숙(84) 영인문학관장의 이 ‘6·25 회고담’도 그와 같다. 박완서의 소설이 체험 없이 쓸 수 없다 보니 소설과 수필을 오가듯 하며 독자를 빨아들이는데, 수필인 이 책은 소설을 읽는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보편적인 삶을 뒷받침해줄 질서가 사라진” 전쟁이 픽션 같기 때문일 것이다. 국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저자는 고교 2학년 때 서울에서 6·25를 맞았다. 책은 “전시에 사춘기를 맞은 병약하고 예민한 여자아이”의 눈으로 본 전쟁 체험이자 “내 생애에서 보낸 가장 험난한 날들”을 통해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어진” 여성으로 자라는 성장기(記)이기도 하다.

함경도 갑산에서 월남한 이후 부친의 연이은 사업 실패로 삼각지에서 이촌동으로 이사하던 날 북한군이 남침했다. 이 사춘기 소녀는 틀에 박힌 학교 교육에 진저리를 쳐 ‘제발 하늘이라도 좀 무너져 내렸으면’ 하고 바라던 때였고, 막상 공습경보가 울리자 해방감을 느낀 철부지였다. 38선이 조용해 본 일이 없어서 시민들도 전쟁 발발 소식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아마 그날 밤 서울 시민들은 대체로 편안한 잠들을 잤을 것이다. 우리 집처럼 말이다.”

하지만 가까워지는 포성에 밀려 한밤중 피란을 떠나 한강을 건너야 했지만 앞이 막혀 움직이지 못했다. “가장 불가사의했던 것은 멀리 보이는 한강철교 위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많은 차들이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철교 중간에 있는 어느 한 지점에 다다르면, 약속이나 한 듯이 헤드라이트들이 꺼져 버리는 것이다. 필름이 끊기듯이 깔끔하게 불들이 꺼져 버리고, 또 꺼져 버리고, 또 꺼져 버리고….” 동이 터올 무렵에야 피란민들은 어젯밤 폭발음이 철교가 폭파되는 소리였고, 꺼져 버리는 불빛들은 어둠 속에 줄지어 다리를 건너다가 영문도 모른 채 강물에 수직 낙하하는 차량이었음을 알고 경악했다. 전쟁이 피부 깊숙이 와 닿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강인숙(왼쪽)과 이어령은 캠퍼스 커플이지만 교정에서 둘만 어울리진 못했다. 1950년대식 사랑법이다. 졸업을 앞둔 어느 일요일, 큰마음을 먹고 교정에서 학교 사진사를 불러 둘만의 사진을 처음 찍었다.

전쟁이 난 지 나흘 만에 피란 간 경기 광주 정자리에서 처음 인민군을 만났다. “그들은 함경도 사투리를 쓰고 있었다. 5년 만에 들어 보는 순종의 고향 사투리다. 반가워서 말을 걸려는 순간, 나는 그들이 바로 조금 전까지 우리 군대와 죽고 죽이면서 싸운 인민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대부분이 소년병이었기 때문이다. …물놀이하러 온 고교생들처럼 철이 없어 보였다.” 그는 그 순간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끼리 서로 죽이는 전쟁을 하는 것은 하늘이 용서하지 않을 것 같았다”는 깊은 절망과 분노를 느꼈다.

인민군은 병력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젊은이 사냥에 혈안이 됐다. “어머니들은 목숨을 걸고 아들들을 숨겼다. 적 치하 3개월 동안 어머니들이 짊어진 가장 고통스러운 멍에였다….” 인민군 치하에서 북한군 소좌의 사랑을 받아 그 부대의 주방일을 하며 식량을 얻어 이웃을 돕고 여성으로도 다시 깨어나는 서른 살 과부 매자 아줌마, 여성동맹 활동을 하며 배급을 받아 가족을 먹여 살렸을 뿐 아니라 이혼한 전 남편까지 숨겨줬지만 9·28 서울수복 이후 행방이 묘연해진 스물두 살 이혼녀 등 전쟁 중에 이중의 고통을 받는 여성들에 대한 저자의 시선은 따듯하다. “하루가 한 세기 같은” 전쟁을 통해 저자는 사춘기를 지나 어른이 된다. “그보다 더 나쁜 날들은 있을 수 없는데도 그것을 견뎌냈다는 사실이 언제나 자신감을 자아냈다. 그 후 6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오며 뇌수술을 받고 암에 걸렸을 때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고 말한다.

책은 전쟁 체험과 함께 전쟁 중 부산 천막 교사에서 시작해 1953년 서울 동숭동으로 옮겨진 서울대 국문과 재학시절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저자가 책에서 인용하는 “오오! 계절이여, 성이여!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라는 랭보의 시구처럼 그의 청춘기는 전쟁과 낭만이 교직됐다. 당시 같은 과 동기생이었던 남편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의 만남과 사랑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상세히 공개된다.

이어령은 처음에 저자를 향한 친구의 사랑을 전하는 메신저 역할이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이성으로 다가오지 않아” 깨끗이 거절했다. 어느 날 졸업생 환송회를 한 날 보낸 편지에서 이어령은 “30도의 술에 취하여 이 글을 쓰오”라고 말문을 열었다. 저자는 당시 일기에 “그가 마신 두 잔 술에 나는 아직도 취해 있는 것 같다”고 썼다. 하지만 저자는 이미 당시 화제를 모은 ‘문리대학보’의 편집과 거기에 실었던 ‘이상론(李箱論)’ 등 이어령이 보인 천재성에 압도돼 있었다.

3학년 1학기에 둘은 극장이나 같이 가는 친구로 지내기로 했으나 “두 달도 못 되어 나는 한 남자를 태양으로 삼아 종일 그쪽만 바라보며 사는 해바라기가 되어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어령은 딴 남자를 쳐다볼 여유를 주지 않았다. “재학 중에도 그랬지만 졸업한 후에도 그는 날마다 직장이 끝나자마자 만나서 밤 11시가 되지 않으면 놓아주지 않았다. 외곬으로 모이는 그 집착과 몰입과 열정이 나는 싫지 않았다. 사랑에 대한 확신을 다져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