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공간>‘天刑의 아픔’ 보듬어준 땅…‘天上의 詩’가 태어나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한하운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살았던 옛 집터(인천 부평구 십정동 산39번지)는 이제 넓은 평지로 남아 이 지역 주민들의 등산로 쉼터로 사용될 뿐 그 흔한 안내판 하나 없다.

(84) ‘문둥이 시인’ 한하운의 창작산실…인천 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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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겨울, 서울 한복판 명동에 해괴한 소문이 떠돌았다. “명동에서 문둥이가 시를 판다.”

이 월남한 걸인은 다방과 술집들을 돌아다니며 구걸 대신 도화지에 쓴 자작시들을 잔돈푼에 팔았다. 사람들이 동정 삼아 그냥 건넨 술잔은 마다하고 무엇보다 당대 최고의 시인 정지용(鄭芝溶)이 그 시들을 읽고 감동하여 자신이 아끼던 만년필을 대가로 쥐여 주었지만 그는 부끄러워하며 그것을 탁자에 놓고 황황히 달아났다는 일화가 더해지니 ‘시를 파는 문둥이’에 관한 이야기는 점점 더 세상에 퍼지게 된다.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파랑새’ 전문)

바로 ‘문둥이’ 시인 한하운(韓何雲)의 이야기이다. 애초 함경도 함주의 부유한 지방 지주 집안 태생으로 별 어려움 없이 일본과 중국에서 유학까지 했지만 해방 후 소련 군정에 의해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아우와 함께 작은 헌책방을 운영하던 중 1946년 3월 13일 함흥학생사건에 연루돼 수감된다.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나병 치료제를 구하려 월남했다가 다시 북으로 넘어갈 때 체포되었고 1947년 8월 원산 형무소로 이감 중 탈출하여 월남했다. 그는 안주할 곳을 찾아 전국을 떠돌고 병마와 기아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이미 나병의 흉한 상처가 온몸에 퍼져나갔고 결국 걸인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점차 겨울은 다가왔고 동사(凍死)를 면하려고 “쓰레기통과 나란히 앉아서 밤을 새우던”(‘목숨’) 한하운은 동료의 죽음을 목격하고 “며칠을 생각한 나머지 시를 팔아서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괴상한 짓’은 뜻밖에 한몫이 되어 그 겨울을 무사히 넘기게 되었으니 절망 끝에서도 차마 시와 생명은 버릴 수 없던 한하운은 “세상에 태어나서 시(詩)로서 밥을 처음 먹어본 것이다.”(‘황토길’)

‘시를 파는 문둥이’라는 소문은 그 겨울을 지나고도 계속 이어져 마침내 문단에까지 알려지고 1949년 이병철의 추천으로 ‘전라도 길’ ‘별’ ‘목숨’ 등 13편의 시가 ‘나시인(癩詩人) 한하운 시초(詩抄)’라는 제목으로 묶여 ‘신천지(新天地)’ 4월호에 실린다. 그의 시는 곧바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한 달 뒤 그의 시 26편이 실린 첫 시집 ‘한하운시초’가 출판된다. 시인의 극적인 생애와 그 불행 속에서 처절하게 노래한 시들은 단박에 많은 독자에게 공감과 감동을 주었다.

한하운은 시인으로 그 이름이 알려지면서 정부로부터 서울,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의 한센인을 모아 격리 수용하자는 교섭을 받았다. 그는 그 안(案)을 받아들여 1949년 12월 30일 먼저 8개월 전부터 함께 지냈던, 수원 ‘하천부락’의 한센인 70여 명을 이끌고 부평으로 향했다. 이들은 부평 공동묘지 인근 골짜기에 정착한 뒤 자신들을 위한 요양소를 건설하고 ‘성혜원(成蹊院)’이라 이름 지었다.

한하운이 부평(현재는 인천 남동구 간석동)을 정착촌으로 정한 이유는 무엇보다 이곳이 산(만월산과 철마산)으로 둘러싸여 철저히 외부와 차단돼 있기 때문이었다. “우선 부평은 이 지방민의 반대가 없을 것이라 믿고 불모의 산협이지만 우리가 무슨 선택의 자유가 있을까… 우리들의 마지막 안식처로서 택하기로 하였다.”(‘황토길’)

성혜원은 처음에는 간혹 이탈자들도 있었지만 곧 600여 명에 달하는 환자와 그 가족들로 붐비기 시작했고 한하운은 자치 회장에 선임되었다. 수의축산학을 전공했던 한하운은 자신의 지식을 발판 삼아 이곳에서 양돈과 양계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쳤고 점차 미약하나마 성혜원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었다. 한때 인천에서 유통되는 달걀 대부분이 이곳에서 생산되었으니 ‘성혜원’이란 명칭보다 흔히 ‘성계원(成鷄園)’이라 불렸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부평에 정착한 이후에도 사회활동가 이전에 시인이 우선이었고 한순간도 “시를 읊지 않고는 살 수 없다”던 한하운은 꾸준히 창작하였으니 시집 ‘보리피리’(1955)에 수록된 시들과 ‘나의 슬픈 반생기(半生記)’(1958)와 ‘황토길’(1960) 등 그의 대표작들은 바로 이곳에서 쓰였다. “님 오시면 피어라 진달래꽃./ 한식에 소복(素服)이 통곡할 때에// 부평(富平) 성계원에 진달래 피면/ 이 세상 울고 온 문둥이는 목쉬어.”(‘여가’)

성혜원은 1960년 ‘국립부평나병원’으로 개칭됐다가 1968년 정부 정책에 따라 전국에 분산되어 있던 나병원들이 소록도 병원으로 통합하면서 폐원했다. 그러므로 부평, 정확히는 현재 인천 남동구 간석동과 십정동에서 시인 한하운과 성혜원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간신히 ‘부평농장’과 ‘십정-청천농장’ 같은 당시의 이름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부평삼거리에서 인천 가족묘지공원을 지나 간석사거리로 넘어가는 만월로 주변이 예전 성혜원이 있던 자리이다. 현재 인광교회 주변 만월북로에 있는 부평농장 사무소 건물 옆자리가 예전 성혜원의 ‘공회당(公會堂)’ 터이다(간석동 1-188번지). 바로 옆 새마을금고 자리에는 ‘감금원’이 있었으니 당시에는 유랑 나환자들이나 자치 공동체의 규율을 위반하는 사람을 일정 기간 가두었던 장소였다. 그리고 바로 길 건너 ‘시온 경로당’ 자리가 과거 ‘국립부평나병원’ 부지이다. 이 지역은 1986년에 주거지에서 준공업지역으로 변경되었고, 소규모 공장들이 입주해 있다. 그러니 당시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현재 이곳의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농장’이란 단어만이 ‘공단’ 임대 사무소의 명칭에 그저 흔적처럼 남아있을 뿐이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시인 한하운의 묘지.

음성 판정을 받고 치유된 한센병력자들이 1961년부터 자립을 위해 개간해서 일구었던 ‘십정(十井)농장’의 터도 1988년부터 아파트 단지로 변했으니 바로 지금의 동암역과 백운역 사이 신동아 아파트 부지이다. 한하운이 사망할 때까지 살았던 예전 집터(십정동 산39번지)도 동암산 정상 부근에 그저 널따란 평지로 남아 현재는 지역 주민들의 등산로 쉼터 역할을 할 뿐, 그 흔한 안내판 하나 없다.

인천시가 2014년 시인 한하운을 인천의 인물로 선정했다고는 하나, 그 흔한 시비 하나 세워져 있지 않다. 무엇보다 이 병으로 여전히 고통받는 이 지역의 한센병 환자와 병력자들이 공개적으로 ‘시인을 기리는 사업’들을 원치 않기 때문인 듯하다. 다만 부평역사박물관의 전시물과 ‘한하운 온라인 문학관’에 알찬 내용이 있어 그 안타까움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다. 아직 찾지 못한 미국 공보원에서 촬영한 한하운의 전기 영화 ‘황토길’(1962)은 아니지만 또 다른 한센인의 이야기를 다룬 흑백 영화, 홍성기 감독의 ‘열애’(1955)를 찾아볼 수 있다. 원본 자료의 일부분이 훼손되었다고는 하지만 감상에는 별 지장이 없다.

한하운은 부평에서 25년 가까운 세월을 살았으니 분명 자신의 두 번째 고향으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죽어서도 부평 땅에 묻히지 못했다. 한하운의 유택은 경기 김포시 장릉 공원묘지(현재는 김포 공원묘지)에 있다. 2015년 지역 문인협회에서 시인의 묘지를 단장하고 그를 알리는 시설물을 설치했다. 지난 6월 3일에도 제7회 한하운 문학제가 개최되었고 장릉에서 시인의 묘소로 가는 ‘승가로 58번길’이 조만간 ‘한하운 시인 길’로 지정될 예정이다.

수원천변에 세워진 ‘보리피리’ 시비는 뜻밖의 반가움이다(세류동의 ‘유천2교’와 ‘버들교’ 사이에 있다). 한하운이 1949년 부평으로 이주하기 직전 수원의 나환자 정착촌인 ‘하천부락’에서 8개월을 머물렀다고는 하지만 수원과의 인연이 깊지는 않다. 수원천 언저리에는 지금도 버드나무가 많고 예전에는 세류동을 ‘버드내’라고 불렀다고 하니 ‘버들피리와 보리피리’를 연계해서 매년 열리는 지역 문화제(‘피리 축제’)의 주제로 삼은 듯하다. 점점 짙어가는 녹음 사이에 놓인 하얀 시비가 곱다. 무엇보다도 이 시비를 지역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세웠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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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죽기 2년 전인 1973년, 전남 고흥군 소록도의 중앙공원에 조성된 한하운의 첫 번째 ‘보리피리’ 시비는 유명하다. 세류동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시비도 와석(臥石)의 형태이다. 한센병 박물관에도 한하운 시인을 기념하는 전시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한하운은 소록도에 적을 두지는 않았지만 그의 시 ‘전라도(全羅道) 길’의 부제가 “소록도(小鹿島)로 가는 길”이며 강제 수용되어 이곳으로 향하던 한센인의 암담한 심정을 노래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千里) 먼 전라도 길.”

‘천형(天刑)의 땅’이라 불리던 소록도가 이제는 과거 인간으로서 가장 소외되었던 한센인들에게 행해졌던 시대의 폭력과 그로 인한 커다란 고통을 접하면서 되려 자신의 작은 상처를 달래려는 ‘내적 치유의 체험장’으로 부상하면서 연간 30만 명의 방문객이 찾는 ‘의미 있는 여행지’가 되었다. 한때 ‘문둥병’ ‘나병’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한센병도 ‘불치의 병’에서 이제는 ‘완치의 병’으로 바뀌었고 무엇보다 조기에 치료를 시작하면 그 모진 후유증이었던 ‘변형에 의한 상흔’조차 거의 남지 않는 ‘과거의 병’이 되었다.

교과서에 실려 있는 몇 편의 시(‘보리피리’ ‘파랑새’와 ‘개구리’)를 제외하면 그의 시작품은 대개가 한센인의 아픔과 슬픔을 직접 쏟아낸 것이다. 그럼에도 한하운의 시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제는 그가 한국 현대 시에서 그 유례를 달리 찾아볼 수 없는 ‘문둥이 시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하운은 인간이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끊임없이 희망을 노래하고 ‘인간다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며 이를 회복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과거 ‘통합’이라는 흔한 말로 오히려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배제되었던, 그래서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인권마저 무시당하며 소외되었던 소수자를 노래함으로써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한 공감과 이해를 구했고 무엇보다 그들을 위해 직접 행동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소리 없이 울부짖고 있는 또 다른 사회적 소수자가 너무나 많다.

글·사진 = 박광수 불문학자·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