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 Story >“국회의사봉 · 알파고 바둑판도 문화재… 오래된 것 집착 말아야”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건무 전 문화재청장이 서울 동작구 상도4동에 있는 지덕사 내 양녕대군 묘소의 문인석을 어루만지며 문화재와 함께 평생을 보낸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신창섭 기자 bluesky@

이건무 前 문화재청장

“내 나이 이제 70세. 대학 졸업하고 박물관에 들어와 죽 박물관에 있었다. 잠깐 학교에서 강의도 했지만 문화재청장으로 공직생활을 마무리했다. 고고학을 하면서 아주 즐거웠고 중요한 유적도 파봤고, 보람 있는 전시도 했다. 이쪽을 택하지 않았으면 뭘 하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고학자로 꼽히는 이건무(70) 전 문화재청장은 말 그대로 ‘박물관맨’이다. 서울대 고고인류학과를 마친 이 전 청장은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로 시작해 평생을 박물관에 봉직했다. 국립중앙박물관 관장(2003~2006년)에 문화재청장(2008~ 2011년)까지 지내 한국 문화유산계를 대표하는 양대 국가기관 수장을 거친 첫 번째 인물로 기록됐다.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재직 중에는 아시아 국가 가운데 처음으로 ‘세계박물관대회 2004’를 유치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공직에서 은퇴한 후에도 2013년 3월 박물관 후배들과 함께 도광문화포럼을 발족했다. 재능기부 형식으로 지역사회 주민들에게 정기적으로 강의를 하는 포럼이다. 강의는 어느덧 50회를 돌파했다. 고고학·미술사·역사·민속학·인류학 등 각 분야의 쟁쟁한 석학들이 무료 강의로 뜻을 보탰다.

어찌 보면 그가 이처럼 우리 문화유산에 천착해온 것도 집안 내력과 무관하지 않다. 이 전 청장은 전형적인 학자 집안 출신이다. 한국 사학계의 거두인 이병도(1896∼1989)의 손자이자 농화학자 겸 대학 교수였던 이춘녕(1917∼2016)의 아들로, 194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교수와 총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카이스트 이사장인 이장무(72) 씨가 그의 형이다.

본인이 대표로 있는 도광문화포럼이 자리 잡고 있는 서울 상도동 양녕회관 강당에서 이 전 청장을 만났다. 양녕회관 길 건너편에는 양녕대군을 모신 사당인 지덕사가 있다. 도광문화포럼에서 ‘도광’이란 이름은 지덕사의 재실 ‘도광재(韜光齋)’에서 따온 것이다.



“예전부터 문화재 보전은 항상 국민과 함께해야 하는 국가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내가 운영하고 있는 도광문화포럼도 국민에게 문화재의 소중함을 널리 알리자는 취지로 시작했다.”

그는 공직에서 퇴임 후에도 도광문화포럼이란 풀뿌리 문화운동을 통해 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지속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도광문화포럼은 매달 마지막 주 금요일 저녁에 모인다. 벌써 4년여의 세월이 흘러 회차만 50회가 넘는다. 이 전 청장이 이곳 양녕회관 건물에 양녕대군 이씨종친회로부터 전세를 들어 입주했는데, 박물관 후배들이 찾아와 ‘연구모임을 해서 주민들에게 도움을 주자. 한 달에 한 번 강사를 구해서 하자. 안 되면 우리가 재능기부 형식으로 하자’고 제안해 만들어졌다. 이달 마지막 주 금요일(30일)에는 청주박물관 윤종균 학예실장이 ‘김수근의 건축세계’에 대해 강의한다.

사람들은 문화재가 소중하다고 학교에서 배운다. 그러나 이를 절실히 느끼는 이는 많지 않다. 평생을 문화재 연구에 바쳐 온 이는 문화재를 어떻게 생각할까. 지체 없이 대답이 돌아왔다.

“문화재 뿌리 찾기는 정체성을 찾는 문제다. 문화가 우리의 토대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면 한 국가의 구성원으로 역할을 할 수 없다. 그렇기에 어느 나라든 국립박물관에 자국 역사의 흐름을 보여줄 수 있는 문화재를 전시한다. 중국 고궁박물관이나 일본 도쿄(東京)박물관도 그렇다. 그다음에 문화유산은 우리에게 창의성을 제공한다. 일반적으로 문화재를 거론하면 미적 쾌감을 먼저 얘기하는데 당연한 것이다. 또한 그걸 떠나 과거로부터 많은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창의성’과 관련해 그의 보충 설명이 이어졌다.

“요즘 바퀴 공부를 하고 있다. 전공은 고고학이지만 옛날 바퀴를 찾아보면서 많은 걸 알게 됐다. 자료를 비교해 보니 바퀴가 굉장히 오래전에 나왔더라. 바퀴 하면 그냥 자동차 바퀴나 수레바퀴를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가락바퀴가 있다. 방추차, 이게 제일 먼저 출현했다. 실을 만드는 바퀴다. 가락바퀴를 옆으로 눕히면 수레바퀴가 된다. 수레바퀴에 홈을 내면 도르래가 된다. 그런 바퀴에 톱니를 달면 톱니바퀴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수레바퀴를 만들면서 이동하고 교역하고, 모여 도시를 만들고, 문명을 발전시켰다. 현대에는 컴퓨터 마우스에도 바퀴를 사용한다. 바퀴의 변천을 살펴보면 인류에게 어떤 아이디어가 혁신을 가져올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그건 굉장한 것이다. 과거의 문화재라고 해도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요즘에는 문화재를 관광자원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세계 각국이 자국의 문화유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려는 것도 그 같은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이 점에 대해서도 이 전 청장은 분명한 소신을 밝혔다.

“물론이다. 관광자원으로도 소중하다. 종묘는 세계문화유산 아닌가. 세계인들은 종묘 자체의 건축미는 물론 조상에 대한 예의 등 종묘가 지닌 의의에 열광한다. 종묘는 훌륭한 건축물인 동시에 정신적 무형유산이다. 500년 동안 제례를 지속해 왔다는 것, 그런 점이 높이 평가받고 있다. 따라서 관광자원으로 크게 활용할 수 있고, 그런 가치에 대해 국민이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이 전 청장은 문화재 전문가답게 문화유산의 가치는 무궁무진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더 많은 농작물을 수확하기 위해 수로를 많이 팠는데 결국에는 바닷물이 밀려와 염기 때문에 농토가 황폐해져 문명이 멸망했다”며 “문화유산은 직접적 교훈은 주지 않더라도 적어도 ‘반성’의 기회는 제공한다”고 힘줘 말했다.

그에게도 시련이 있었다. 문화재청장 재임 시절 숭례문 화재 등을 수습할 때다. “문화재청은 국립중앙박물관과는 달리 정책을 수립하고 관리하는 행정기관이다. 갑자기 화재가 났다고 가정을 해보자. 완전히 소진돼서 복원이 어려울 수도 있고, 일부 복원할 수도 있다. 도면이 없어서 못 할 수도 있다. 다행히 숭례문은 도면도 잘 남아 있었고, 여러 해 전에 수리 해체하면서 경험이 있어 괜찮았다. 물론 불행한 일이지만 숭례문 화재는 국민이 문화재에 대한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문화재라는 게 매일 무심코 보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소중한 거였구나 하는 느낌을 많은 국민들에게 확실히 심어 줬을 것이다.”

2008년 3월 이명박 정부 출범과 함께 문화재청장에 취임한 이 청장은 그동안 추진해온 4대강 개발 문화재 조사 사업을 놓고 학계·시민단체와 갈등을 빚었고, 광화문 현판 균열 등 문화재 부실 복원 논란이 겹치자 2011년 사의를 표명했다.

그는 요즘도 문화재 답사를 계속한다. 도광문화포럼 회원들과도 정기적으로 답사를 떠난다. 답사 과정에서 고유의 문화유산인데 저평가된 것들도 많이 발견된다고 한다.

“우리는 문화유산 하면 석굴암과 불국사부터 먼저 떠올린다. 외국의 고대문명 유적과 비교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지만 우리 쪽에도 훌륭한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많다. 강화 돈대도 그중 하나다. 돈대는 열강으로부터 국가를 지키기 위해 세운 것이다. 시기적으로 봐도 그렇고 역사적 의미도 크다.”

한편 지난해부터 이우환 화백과 고 천경자 화백 작품의 진위여부를 놓고 위작 논란이 거셌던 것에 대해서도 이 전 청장은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문화재 분야에서도 겸재 정선의 작품 등에 간혹 위작 논란이 이는 경우가 있다. 박물관에 있을 때 그걸 해결해 보려고 팀까지 꾸렸었다. 국가에서 문화재를 가장 많이 소장한 곳이 중앙박물관이다. 겸재 정선이나 추사 김정희 작품 중 누가 봐도 진품이라는 것만 분석하자고 했다. 분석 방법은 붓의 놀림, 천이나 종이의 질감, 안료 분석 등이다.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해 작품에 대한 요소들을 분석한 후 논란이 되는 것을 놓고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비교 분석해 진품을 가리자는 취지였다. 그리고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 보자 했는데 아직까지 안 되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새 정부 출범 후 아직 문화재 등 우리 문화정책에 대한 뚜렷한 윤곽이 나오지 않고 있다. 이 전 청장은 새 정부에 어떤 점을 기대하고 있을까.

“국보, 보물 등이 지정될 때 국가에서 지원되는 부분을 감안해서 그런지 너무 경쟁적이다. 국보나 보물이 무슨 차이가 있겠나. 모두 국가에서 잘 지켜야 할 것들이다. 또 고미술품이나 오래된 것만 문화재라는 편견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국가에서 중요한 사안을 정했던 국회 의사봉 같은 것도 다 지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중에는 확보하기 어렵다. 알파고 바둑판은 벌써 구글로 갔을 것이다. 사회 변혁과 연결된 그런 기념유산은 미리 확보해야 한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문화재에 대해 문화유산이 아니라 문화자원(컬처럴 리소스)이라는 명칭을 쓴다.”

그는 평생을 문화재와 함께 외길을 걸었다. 그의 마지막 바람을 듣고 싶었다.

“전공이 청동기다. 청동기에 관한 책을 써보고 싶다. 청동기는 어느 시대보다 중요한 시대다. 변화가 많았던 시대다. 청동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큰 화학적 변화였다. 그럼에도 종합적으로 당시 사회의 문화를 설명하는 책은 적다. 그런 쪽에 포커스를 맞춰서 써보고 싶다.” 편안하게 말했지만 노학자의 말투에선 날선 결기가 느껴졌다.

인터뷰 = 이경택 부장(문화부) kt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