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공간>주인공 ‘정희’ 열연 故 김영애… 청순한 첫사랑부터 표독한 팜 파탈까지 변화무쌍 연기 감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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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애(1951∼2017)는 아름다운 선을 가진 연기자다. 청순하거나 요염하거나, 단아하거나 강인하거나, 이렇듯 상반되는 모습들을 다 구현해낸다. 임권택 감독의 수작 ‘왕십리’를 보면 새삼 김영애의 변화무쌍한 연기력과 미모에 감탄하게 된다. 김영애가 연기한 이 영화의 여주인공 정희는 이 작품에서 가장 문제적인 인물일 뿐 아니라 한국영화사에서 기억될 만한 여성 캐릭터다.

1970년대 중반 개발 붐으로 변해 가는 왕십리에서 정희는 변방으로 밀려나는 인물이다. 정희는 1970년대가 요구하는 건실한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인물도 아니고, 남자주인공 준태(신성일)처럼 과거에 얽매여 살아가는 인물도 아니다. 하나의 잣대로 평가하기도 해석하기도 어려운 복잡 미묘한 여성이 정희다.

정희는 아버지가 다른 세 남매를 데리고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는 상황인데도 새로운 남자에게 또다시 의지하고 있다. 14년 만에 재회한 첫사랑 앞에서 돈 때문에 태연하게 거짓 연기를 하는 여자. 연기를 마치자마자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주를 마시고 김치를 우적우적 씹어 먹는 여자. 이 영화를 처음 보는 관객은 태도가 돌변하는 정희의 모습에 깜짝 놀라게 된다. 청순한 첫사랑에서 표독스러운 팜 파탈로, 인생을 후회하고 갈팡질팡하는 여성에서 강인한 엄마로 정희는 종잡을 수 없는 면모를 보인다.

“주어진 생활을 열심히 사는 것 자체가 진실이 아닐까?”라는 정희의 대사는 배우 김영애를 설명하는 문장같이 느껴진다. 1971년 MBC 공채 탤런트로 연기생활을 시작한 김영애는 TV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며 쉼 없이 작품 활동을 했다. ‘애자’(2009년), ‘변호인’(2013년), ‘판도라’(2015년) 등 최근작에서 엄마로 깊은 인상을 줬지만, 젊은 시절 김영애의 주 장르는 멜로 드라마였다. 본인이 꼽는 기억나는 작품도 ‘설국’(1977년), ‘겨울로 가는 마차’(1981년·사진) 등 치명적인 사랑을 그린 멜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