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속의 풍경 더 운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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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철에도 가볼 만한 곳 4선

비가 모처럼의 여행을 망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때로는 비가 여정을 더욱 운치 있게 만들어준다. 여행 목적지를 잘 선택하면 그렇다. 촉촉하게 젖은 풍경은 여행의 서정을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 장마의 한복판. 비 오는 날의 촉촉한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여행지를 한국관광공사가 ‘7월의 가볼 만한 곳’으로 선정했다. 그중 가장 빼어난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곳, 4곳을 추려봤다.

청량산 줄기가 그린 수묵화
경북 안동 농암종택

# 경북 안동의 농암종택은 조선 연산군 때 사간원 정언을 지냈던 농암(聾巖) 이현보의 종택이다. 본래 종택이 있던 분천마을이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면서 안동 땅 여기저기에 흩어져 옮겨진 종택과 사당을 영천 이씨 문중의 종손이 청량산과 낙동강이 어우러지는 도산면 가송리 지금의 자리에다 10여 년 동안 옮겨 모았다.

농암종택은 비가 오는 날 가면 금상첨화다. 구름이 내려앉은 청량산 줄기가 수묵화를 그려내고, 낙동강 물소리는 더욱 세차다. 종택에서 농암 이현보 선생의 손때가 묻은 별채 긍구당의 정취가 으뜸이다. 긍구당은 고려 때 농암의 고조부가 지은 소박한 건물로 농암이 태어나고 자란 종택의 별채다. 당호는 ‘조상의 유업을 잇다’라는 뜻. 넓은 마루에 앉으면 빗소리, 강물 소리, 새소리로 마음이 촉촉해진다.

낙동강변의 애일당(愛日堂)은 구순이 넘은 부친을 위해 농암이 지은 건물. 부친이 늙어가는 것을 아쉬워하며 ‘하루하루를 사랑한다’는 뜻에서 애일당이라 이름 지었다. 애일당 뒤편의 수성각에 오르면 세찬 물소리와 함께 낙동강과 벽련암이 펼쳐진다. 종택의 강변으로 내려오면 이번에는 퇴계가 청량산을 오갈 때 밟았다는 퇴계오솔길(예던길)과 이어진다. 오솔길이 지나가는 강 건너편에는 단아하게 앉은 정자 고산정이 있다. 퇴계의 제자가 500여 년 전에 지은 정자인데 산줄기, 강물과 어우러진 경관이 더없이 빼어나다. 농암종택 054-843-1202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경북 안동의 농암종택 안쪽 모습. 흰 벽의 건물이 비 내리는 날에 가장 운치 있는 애일당이다.

도심서 만나는 비의 정취
서울 창덕궁 후원

# 도심에서 비의 정취를 만날 수 있는 명소가 바로 서울의 창덕궁이다. 비가 오면 인적 드물어지는 창덕궁에서 차분하게 깊어진 궁궐의 색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창덕궁의 그윽한 매력은 날씨를 가리지 않는다. 궁의 정면 격인 돈화문에 들어서 금천교를 건너면 만나게 되는 인정전과 선정전, 희정당…. 단청하지 않은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낙선재와 그 주변의 아름다움도 빼놓을 수 없다. 창덕궁에서 비 오는 날 가장 뛰어난 풍경을 보여주는 공간은 단연 후원이다. 조선 왕실의 정원인 창덕궁 후원은 조성을 시작한 1406년부터 600년 넘게 전지가위 한 번 대지 않고 나무를 스스로 자라도록 했다. 갈참나무와 때죽나무, 단풍나무, 팥배나무…. 도심에서 300년 넘은 고목이 70그루 이상 늘어선 모습을 여기가 아니면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후원의 중심은 부용지다. 부용정이 물 위에 반쯤 뜬 채로 있고, 맞은편에 주합루가 연못을 지키듯 섰다. 왕의 휴식처이기도 했고 선비들이 과거를 치르기도 했던 이곳은 이제 누구나 쉴 수 있는 공간이 됐다. 존덕정에서 옥류천으로 가는 길 깊숙이 들어선 후원의 마지막 영역인 소요암. 이곳에는 너럭바위에 홈을 파고 물길을 돌려 만들어낸 작은 폭포가 있어 비가 오면 더 운치 있다. 창덕궁 02-3668-2300

안개가 숲을 이루는곳
전남 진도 운림산방

# 전남 진도에서 비를 만난다면 운림산방으로 갈 일이다. ‘구름 운(雲)’에 ‘수풀 림(林)’. 구름이 숲을 이룬다는 이름 그대로의 풍경을 만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진도 첨찰산 자락에 들어선 운림산방은 조선 후기 남종화의 거장 소치 허련이 말년을 보낸 집이다. 소치는 20대 후반에 해남 대둔사의 초의선사에게 가르침을 받고 30대 초반에는 한양에 가서 추사 김정희의 제자가 됐다. 당대의 최고 화가로 이름을 떨친 그는 스승 추사가 유배를 거듭하다 세상을 뜨자 고향으로 돌아와 운림산방을 짓고 그곳에 머물며 작품활동에 몰두했다.

최고의 화가였던 그는 운림산방을 훌륭하게 꾸몄다. 소박한 한옥 앞에다 연못을 파고 섬 하나를 띄우고는 배롱나무를 심었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면 배롱나무는 농염한 붉은 꽃을 피운다.

운림산방은 소치의 것이었지만, 여기서 꽃피운 소치의 예술혼은 아들 미산 허형, 손자 남농 허건을 거쳐 증손자 고손자에 이르기까지 5대에 걸쳐 이어진다. 이로써 진도는 남종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는데, 그 한가운데 운림산방이 있는 셈이다.

운림산방 옆에는 소치와 그 필맥을 잇는 후손들의 작품을 전시해놓은 소치기념관이 있다. 그 곁에 진도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진도역사관과 남도전통미술관이 있다. 비를 피해 실내 전시장을 둘러보며 진도의 역사를 짚고, 느긋하게 그림 감상도 할 수 있다. 운림산방 061-543-0088

비 오는 날만 만나는 곳
경기 포천 비둘기낭폭포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경기 포천의 비둘기낭폭포. 제법 큰비가 내려야만 폭포가 기운차게 쏟아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비가 와서 좋은 곳도 있지만, 꼭 비가 내려야만 만날 수 있는 곳도 있다. 경기 포천의 비둘기낭폭포는 비가 내린 직후에만 볼 수 있다. 그것도 가랑비 정도로는 어림도 없고, 폭우가 쏟아진 뒤끝에야 그 장엄한 모습을 보여준다. 현무암 침식으로 형성된 비둘기낭은 평범한 풍경 속에 숨어 있다. 보통 폭포는 산으로 오르면서 만나게 되는데, 비둘기낭은 논둑 너머 땅이 푹 꺼진 자리에 물줄기를 걸고 있다. 화산 분출로 만들어진 수직 절리 현무암이 침식으로 만든 폭포라 그렇다.

비둘기낭이라는 이름은 예부터 비둘기들이 폭포 협곡의 하식 동굴과 수직 절벽에 둥지를 틀어서 붙여졌다는 얘기도 있고, 동굴 지형이 비둘기 둥지처럼 움푹 들어간 주머니 모양이어서 그렇게 부른다는 설도 있다.

비둘기낭폭포가 장엄한 느낌을 주는 건 물길 아래쪽으로 400m가량 연결되는 현무암 협곡의 규모 때문이다. 깎여 나간 주상절리 협곡 높이가 30m가 넘는 곳도 있다. 지형 보존과 안전문제 때문에 비둘기낭폭포 아래로 내려설 수는 없다. 대신 폭포 위쪽에는 협곡과 한탄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가 있다. 토·일요일에는 오전 10시 30분, 오후 1시 30분과 3시에 지질공원 해설사의 해설을 들을 수 있다. 비둘기낭폭포에서 한탄강 지질 지대로 생태 탐방로가 연결돼 있다. 포천시청 관광과 031-538-3370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