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공간>쪼그려 앉아 그리던 2평 사랑방… 해맑은 ‘童心’을 만나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경기 용인시 기흥구 마북로에 있는 장욱진 화백의 고택에서 관람객들이 집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 고택에는 ‘장욱진미술문화재단’이 함께 자리를 잡고 있다. 신창섭 기자 bluesky@

(88) 화가 장욱진의 마지막 화실… 용인 고택

올해는 아버지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여서 많은 전시가 열리고 있다. 이 덕분에 나는 아버지 그림을 만날 기회가 많아져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림은 화가의 분신이고 정신이어서 전시장을 찾아가면 아버지를 뵙는 듯 남다른 감동이 밀려온다.

아버지에게 집은 생활공간이면서 작업공간이기에 굉장히 중요했던 것 같다. 실제로 아버지 평생의 그림 여정은 곧 집을 따라 다니면서 이어진다.

아버지 작업 공간의 시작은 어느 시점일까. 유년 시절 학업을 위해 온 식구가 서울로 이주하면서 열심히 공부하기를 바랐던 식구들의 열망을 저버리고 혼자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어린이 장욱진, 그림은 절대로 안 된다는 어른들의 엄한 말씀에도 그림이 좋아 혼자 컴컴한 다락에 숨어서 그림을 그렸다는 어린 장욱진, 그 어두운 다락방이 아마도 장욱진에게 최초의 자기만의 작업 공간이 아니었을까.

한국동란이라는 큰 사건으로 어린 나와 오빠 그리고 아버지만 할머니가 계신 충남 연기군(지금은 세종시)으로 피란을 갔는데 그때 아버지는 마당 건너 사랑채에 늘 계셨다. 그곳이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첫 번째 화실이다. 그곳에서 전쟁 한가운데서 역설적으로 평화로운 모습을 담은 ‘자화상’ 등이 그려진다. 1951년 무렵이다.

환도 후에는 셋방살이를 전전했다. 그중 어둡고 긴 방이 생각난다. 컴컴한 방 한쪽 구석에서 아버지는 항상 무엇을 끼적거리고 매만지고 계셨다. 문 쪽에서는 어머니께서 동생을 돌보셨고 오빠와 나는 이쪽 끝에서 숙제를 했다. 그때의 상황을 우리 막내 외삼촌은 이렇게 말했다. “깜깜함 속에 눈들만 반짝이는 것을 보니… 온 식구 굶어 죽게 생겼더라고.” 그 시절에야 비로소 나는 우리 아버지가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는 것을 막연히 알게 되었다.

그 후 어머니께서 생활 전선에 발 벗고 나섰고 비로소 명륜동에 작은 초가집을 마련했다. 그리고 가족들이 모두 우리의 집을 가졌다고 안도했다. 마당 가운데 있던 장독대 위에 그야말로 한 칸짜리 화실을 만들었다. 그곳이 아버지의 서울대 교수 시절에 서울미대 학생들이 드나들던 장소다. 하도 작아 제자 두어 명만 앉으면 꽉 차는 화실이었다. 그리고 서울대를 그만두신 해 초가가 있던 그 자리에 앙증맞은 작은 양옥 이층집을 지으시고 드디어 이층에 화실다운 화실을 마련하였다.

아버지께서는 새벽에 그림을 그리시는 분이시라 우리 식구 중 아버지의 그림 그리시는 모습을 가장 많이 보신 분은 어머니다. 밤새 그림을 그리시는 날이면 조용조용 올라가서 문을 살짝 열어 보고는 아직 작업 중인 모습을 보고 소리 나지 않게 식구들이 조심했던 기억이 난다. 어찌나 열중하시던지 내가 살짝 보고 나간 것도 모르시고 항상 쪼그리고 앉아 그림을 그리셨다.

이마에 땀을 흘리며 작업에 빠진 그 모습이 하도 진지하시고 또 행복한 모습으로 보여서 나는 지금도 아버지의 그림을 절대 함부로 다루지 않는다. 정성껏 보고 소중히 여기고 조건 없이 좋아한다. 훗날 아버지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내 큰딸은 나는 신용하지 않아도, 내 그림은 신용해요”라고 소개하시곤 했다. 실제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림이 완성되면 나를 불러 먼저 보여 주셨다. 이 모든 특권에 대한 보답으로 지금도 아버지에 관계되는 일은 우선순위 1위다.

그러나 서울대 교수직을 내놓은 후 서울이 번잡해지고 여러 여건이 복잡해지니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 서울을 떠나신다. 그 후 어떤 평론가들은 아버지의 그림을 장소로 구분해 이야기하는 분들도 생겼다.

특히 평론가들은 12년간의 덕소화실을 주목한다. 나는 그 기간을 아버지가 자기 자신을 찾는, 힘든 시기였다고 말하고 싶다. 자신의 실존을 발견하기 위해 캔버스와 싸웠고 드디어 자신의 또 하나의 세계를 구축했다.

아버지는 한강가에 단층 슬래브집을 직접 지으시고 식사를 홀로 해결하시면서 전기도 없고 물도 길어다 쓰는 집에서 버티셨다. 그때 아버지의 그림에서는 ‘고독’ 냄새가 난다. 또 ‘새벽’ 냄새가 난다. 이 당시의 작품들을 좋아하는 분이 무척 많다. 서울에서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지던 어머니를 그려 바친, 저 유명한 ‘진진묘’(1970) 등이 이때의 대표작이다. 그즈음 서울에서는 아파트 건축 붐이 일고 덕소는 하루 종일 자갈 채취소리로 시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장욱진 화백의 고택 바로 옆 양옥 건물 2층에 있는 작업실. 장 화백의 장녀인 장경수(오른쪽) 경운박물관 관장이 꽃을 바치고 있다. 신창섭 기자

아버지는 다시 서울로 오셔서 명륜동에 자리 잡으셨다. 양옥 뒤편에 한옥을 짓고 문간채에 작은 화실을 마련한 후 서울 생활을 시작하셨다. 화실을 옮길 때 아버지는 꼭 필요한 화구만 챙겨 오셨다. 제일 눈에 익은 것은 정방형 박스에 가로 칸막이를 한 것, 물감 넣어 놓는 둥근 목기, 붓통, 나이프, 테레빈통 약간, 다 늘어놓아야 한 평이 안 됐다. 팔레트도 그냥 유리판을 쓰셨다. 앞판을 다 쓰시면 뒤집어쓰시고… 더 이상 쓸 곳 없이 더러워지면 버리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화실에 들어가 보니 유리판 팔레트가 많이 사용하시지 않은 듯 깨끗해서 얼른 뛰어가 쓰레기통에서 먼저 쓰시던 유리 팔레트를 주워왔었다. 이 화구들을 덕소에서 명륜동, 수안보 그리고 신갈까지 줄곧 갖고 다니셨다. 그림은 작은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쭈그리고 앉아서 그리신다. 마치 그림과 이야기하듯 매만지시면서 채워 가셨다. 그러니 화실이 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서울생활도 그런대로 한동안 이어졌으나 체질적으로 서울이 맞지 않으신 듯하다. 서울에서 생활하실 때는 주로 명륜동 주변이나 인사동 화랑가 등을 돌아다니셨다. 그러면서 늘 “내 라인은 종로”라고 말씀하셨다. 허름한 차림으로 그래도 스스럼없이 다니실 만한 범위를 종로 선까지 잡으신 듯하다.

아버지만큼 자연을 사랑하신 분이 계실까. 화실에 대해 말하면 “이 대자연이 모두 내 화실이지”라고 하셨다. 서울생활을 접고 다시 자연의 품으로, 이번에는 오랫동안 운영해오셨던 서점을 정리하시고 어머니도 함께 서울을 떠나 충북 수안보에 자리를 잡으셨다. 아버지는 좋으셨겠지만 우리로선 어머니마저 외진 곳에 보냈다는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요즈음 같지 않아 가기도 쉽지 않고 두 분만 그곳에 남겨두고 오는 심경은 정말 착잡하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아버지는 어머니더러 이제 자식들을 떨어 버리라고 하셨단다.

수안보 생활은 아버지와 제자와의 대화로 마무리한다. 너무나 어설프고 춥고 허름한 방에 두 노인(아버지와 어머니)이 앉아계시니….

“선생님 어디서 그림 그리세요?”

“여기.”

“그럼 어디서 주무세요?”

“여기.”

“진지는 어디서 잡수세요?”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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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생활공간은 곧 그림 그리는 공간이다. 쪼그리고 앉을 수만 있으면 그만이다. 그곳에서 숱한 작품을 그리셨다.

그즈음 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않으셨다. 식구들은 병원이 가깝고 우리도 자주 갈 수 있는 서울 근교를 찾다가 마지막으로 자리 잡은 화실이 바로 경기 용인이다. 1986년 무렵이다. 용인 화실은 아버지가 일생 중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기시고 화가 일생의 마무리를 그곳에서 지으셨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곳의 2평 남짓한 한옥 사랑방 화실에도 영락없이 그 작은 화구들이 놓여 있었고 아버지는 돗자리 한 장 깔아놓고 쪼그리고 앉아 그 많은 그림을 그리셨다. 돌아가시기 2년 전 설계도도 없는 집을 지어 보겠다고 그림에 그리신 양옥을 한 채 지으시고 그곳에서 화실을 새로 마련하시고 1년 반쯤 계시다 돌아가셨다.

흡사 돌아가실 것을 예상이라도 하신 듯 그림 ‘밤과 노인’(1990) 등을 남겨 놓으시고… . 아버지는 일생을 자신의 말씀처럼 사셨다. “산다는 것은 소모하는 것. 나는 내 몸과 마음과 모든 것을 죽는 날까지 그림을 위해 다 써 버려야겠다. 남는 시간은 술로 휴식하면서.”

지금 아버지의 작업 공간들은 모두 사라졌다. 덕소, 명륜동, 수안보… 단지 그림들이 남아 그 장소와의 연관을 말해 주고 있을 뿐이다. 마지막 집이었고 작업공간이었던 용인 고택만 어머니께서 구심점이 되어 온 가족이 지키고 있다.

장경수 경운박물관 관장

(장욱진 화백 장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