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도 신뢰한 허임 … 朝鮮침술 그의 손에서 더 발전”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손중양 대표는 지난 1일 문화일보 사옥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우리 현대사에서 침구사 제도가 명맥을 잇지 못하면서, 허임을 비롯한 탁월한 명침(名鍼)들도 역사에서 주목받지 못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일대기 ‘명불허전…’ 펴낸 손중양 기념사업회 대표

“침의(針醫)들은 항상 말하기를 ‘반드시 침을 놓아 열기를 해소한 다음에야 통증이 감소된다’고 합니다. 소신은 침놓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마는 그들의 말이 이러하기 때문에 아뢰는 것입니다.”(선조실록 1604년 9월 23일) 실록에 기록된 어의(御醫) 허준의 말이다. 초저녁에 편두통이 생긴 선조가 의관들을 불러 ‘침을 놓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니, 어의 중에도 가장 높은 수의(首醫)인 허준은 이렇게 아뢴 뒤 “허임(許任)도 평소에 말하기를 ‘경맥을 이끌어낸 뒤에 아시혈(阿是穴)에 침을 놓을 수 있다’고 했는데, 이 말이 일리가 있는 듯합니다”라고 덧붙인다. 실록은 이어 “허임이 침을 놓았다”고 적고 있다.

짧은 기록 속에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다. ‘동의보감’을 지은 조선의 의성(醫聖) 허준이 거명하는 허임은 누구일까. 허임의 일대기를 복원한 ‘명불허전! 허임-조선의 침구사’를 최근 펴낸 손중양(59) ㈔허임기념사업회 대표는 지난 1일 문화일보와 만나 “허임은 천민으로 태어나 조선 최고의 ‘침의’로 성장해 선조부터 3대(代) 임금을 모셨고, 나중에는 백성들 가운데 살며 인술을 펼치고 후학을 기르며 ‘신의(神醫)’로 일컬어졌으며, ‘침구경험방’을 저술해 일본과 중국에까지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고 요약했다. ‘시민의 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손 대표는 저명한 침구사 구당 김남수 선생을 인터뷰한 것을 계기로 침뜸에 관심을 갖게 돼 20년 가까이 침뜸살리기 시민운동을 해왔고, 2005년부터 각종 자료 조사와 탐사를 통해 허임의 일대기 복원에 힘써왔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조선 최고의 명의 허준과 침의 허임이 함께 등장하는 선조실록의 부분. 허준이 “소신은 침놓는 법을 모릅니다”(붉은 선)고 선조에게 아뢰고 있다.

독자들은 ‘설마 허준이 침놓는 법을 몰랐을까’라고 의아해할 것 같다. 손 대표는 “허준의 언급을 통해서, 조선 최고의 명의지만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넉넉하고 훌륭한 인품을 엿볼 수 있다”면서도 “하지만 단지 겸양해서 한 말은 아니다”고 말한다. 그는 “이 기록에서, 허준은 평소 침의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있었고, 침의들과의 역할 분담에 대해 익숙한 모습을 볼 수 있다”며 “대략 60대 중반에 이른 허준과 30대의 허임이지만, 허준이 침에 관해 허임의 이론을 존중하고 신뢰를 나타내는 게 이를 뒷받침한다”고 설명했다. 실제 조선은 초기부터 침의(침구의·鍼灸醫)를 분리해 따로 의과고시를 실시했고, 이 제도는 경국대전 등에 성문화돼 있다. 지금처럼 침구사가 의료체계의 아웃사이더가 아니었던 것이다. 손 대표는 “허준이 침을 놓은 기록은 찾지 못했다”고 말한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이후 침의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고 침술이 크게 발전했는데, 허임은 그 시기에 활동한 인물이다. 아버지 허억봉은 관노(官奴) 출신이지만 궁중 장악원(掌樂院)의 악사(樂師)를 지냈고, 어머니는 재상 집의 종이었다. 허억봉은 여러 기록에 언급될 만큼 음악에 타고난 능력을 보였다. 손 대표는 “동양음악에서 오행에 배속된 오음이 인체의 오장에 대응되고, 12율려는 인체의 12경락에 대응된다”며 “‘악학궤범’을 끼고 살다시피 했을 허억봉이 체득한 음악이론이 아들 허임이 의술에 눈을 뜨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기록에 보면, 허임은 부모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의원집에서 일해주며 의술에 눈을 떴고, 뛰어난 침술로 일찍 이름을 알려 임진왜란 중에는 침의로서 광해군을 수행하며 신뢰를 얻어 내의원 침의로 천거됐다. 선조의 편두통을 침술로 치료한 허임은 일약 당상관(堂上官)에 올랐다. 중년이 지나서 공주에 정착해 백성들을 고치고 제자를 길렀다. 그가 늙어서 평생의 의술을 정리한 ‘침구경험방’은 17세기 말 조선에 유학 왔던 일본 의사 야마카와 준안(山川淳菴)이 일본으로 전했는데, 그 서문에 “조선이야말로 침술이 가장 뛰어난 나라이며, 모두 허임의 경험방을 배워서 하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손 대표는 “오늘날로 표현하면 어의 허준이 한의사라면, 침의 허임은 침구사인 셈”이라며 “국내 의료인에서 침구사가 배제돼, 가장 뛰어났던 조선의 침구술이 나날이 발전하는 일본과 중국에 밀리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한편 tvN은 조선과 현대를 오가며 허임의 일생을 다룬 드라마 ‘명불허전’을 오는 12일부터 16부작으로 방송한다.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