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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명작의 공간 게재 일자 : 2017년 08월 11일(金)
빛바랜 사진처럼 평온한 곳… 그들의 사랑도 풍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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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왼쪽 사진)의 주인공 남녀가 사랑을 키워가는 공간인 초원사진관은 전북 군산시 버스 차고지에 세트를 지어 만들었다. 촬영 후 철거됐지만 2012년 군산시가 그 자리에 그대로 복원했다. 군산시 제공

(90)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지 전북 군산

비가 보슬보슬 내리던 어느 여름날 오후, 허진호 감독과 허름한 동네 카페에서 만났다. 그와 나는 동갑, 게다가 집도 지척인 이웃이다. 이웃으로서 공유하는 경험도 있다. 2016년 후반 청와대 소유의 작은 공원이 민간에 매각됐다. 그가 늦둥이 아들을 안고 산책을 나오곤 하던 곳이었다.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그 공원을 구하기 위해 나선 사람 중에 그와 나도 있었다. 그날 우리의 대화는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 당시의 에피소드로 시작해 각자 어린 시절을 보낸 동네 이야기를 거쳐 필름과 디지털의 차이에 대한 생각으로 마무리됐다. 유난히 큰 키, 뿔테 안경 뒤에서 깜박깜박하는 두 눈. 그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는 시곗바늘을 멈추게 하는 듯했다. 두 시간이 금방 흘렀다.

“디지털이 처음 나왔을 때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알던 영화는 이제 끝났다는 표현도 썼는데 지금 와서 보면 아니지 뭐.” 건축도 마찬가지여서 우리도 한때 건축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도면을 손으로 그리는 것과 컴퓨터로 그리는 것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 같은 것은 없다. “물론 아쉬움이 많지만 그 시절로 돌아갈 수도 없잖아?” 밖으로 나오니 비가 그쳐 있었다.

어떤 영화에서 공간은 그냥 배경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어떤 영화에서는 주인공 못지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물론 이것은 감독의 의도일 뿐, 영화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은 아니다. 내 기억 속의 ‘8월의 크리스마스’는 후자다. 막연히 적산가옥의 분위기를 풍기는 초원사진관, 정원(한석규)이 사는 단층 개량 기와집, 그리고 고만고만한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 골목길 등은 정원과 다림(심은하) 못지않게 특정한 역할을 연기하는 주인공이다. 그리고 또 다른 주인공, 빛이 있다. 이 영화에서의 빛은 촉촉하다고나 할까, 어딘가 희뿌옇게 초점이 맞지 않는 듯한 느낌이다. 비추는 빛이라기보다는 감싸는 빛이다. 맑은 날 찍은 장면도 왠지 그림자가 선명하지 않다. 어떤 장면을 봐도 구석구석에 빛이 채워져 있다. 이 덕분에 작은 디테일 하나하나가 자기의 몸짓과 질감을 화면에 더한다. 영상이 흘러가는 것 못지않게 정지화면을 곰곰이 들여다보는 것도 재미있다.

시나리오 작업을 마치고 촬영에 들어가면서 감독의 머릿속에는 상당히 구체적인 그림이 있었다. 박광수 감독 연출부 출신인 이 신인 감독은 당대 원로 유영길 촬영감독을 패기 있게 찾아가 촬영 승낙을 받아내기도 했다. 결국 그 노대가의 마지막 작업이 됐고 영화 도입부에 그 사실을 기린다. 그런데 장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알게 된 곳이 군산의 구시가지인 월명동이었다. 나중에 초원사진관이 될 창고와 초등학교, 음식점 등 그야말로 필요한 것들을 다 갖춘 동네 하나가 거기에 온전히 있었다. 그 덕분에 그와 촬영팀은 소위 ‘공무원 촬영’을 할 수 있었다. 그 마을에 머물면서 출퇴근하듯이 영화를 찍었다. 여기저기 걸어서 이동을 했고 촬영 장면을 보던 행인들은 영화의 엑스트라가 됐다. 그 분위기가 그대로 영화의 일부가 됐다.



배우들은 영화에서 배우 자신이 아닌 배역으로 나온다. 공간 또한 그렇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대부분 장면을 군산에서 찍었지만 영화 속에 등장하는 공간적 배경은 서울 성북구다. 주차단속요원 다림은 성북구청 소속 공무원인 것이다. 서울에만 주차단속반이 있고 지방에는 없던 시절이라 그렇게 했다는 것이 허 감독의 설명이다. 1976년 1월 26일 포니1이 출시되면서 본격적인 마이카시대를 열었다면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이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 주차는 이미 사회문제화돼 있었다. 사실 성북구냐, 아니냐가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다. 이 영화에서 공간적 배경의 의미는 한마디로 ‘너무나 평범해서 누구나의 고향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면 진부하게 들리지만 이 영화가 나온 지 이제 20년이 다 돼 간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그렇지 않다. 당시의 개발 열풍은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도시는 갈아엎고 새로 짓는 것이지 보존이나 재생의 대상이 아니었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폭주기관차 같던 한국 사회는 이 영화 개봉을 전후해서 일어난 금융위기로 근대화 이후 처음으로 뼈저린 집단적 좌절을 맛보았다. 이 영화에도 그것을 암시하는 장면이 있다. 정원은 마당이 있는 정감 있는 단층주택에 살고 있지만 이미 그 지붕 너머로 고층 아파트가 시야를 꽉 채우고 있다. 조만간 그 집에 닥칠지도 모르는 운명, 그리고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정원의 앞날이 묘하게 겹친다.

21세기를 맞았다. 이제 우리는 미래란 뭔가 번쩍번쩍하는 것이라기보다 워낙 있어 온 것들의 누적일 것이라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오래된 것의 소중함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응답하라’ 시리즈가 공전의 인기를 끈 것도 바로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덕분이다. 과천과 둔촌의 아파트에서 태어나고 자란 젊은이들이 재건축으로 사라질 운명에 처한 자기 ‘고향’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록하고 있는 시대이기도 하다. ‘서울과학사’라는 이름의 독립모형회사는 우리 도시에서 발견되는 소소한 것들을 엄청난 퀄리티의 모형으로 만든다. 호두과자 노점상의 리어카, 길거리의 쓰레기통, 주차단속요원 다림의 시대적 후예일 불법 주정차 무인단속 카메라 폴대 등이 그것이다. 정감 어린 디테일의 펜화로 전국의 오래된 구멍가게를 그려온 이미경 작가는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관심의 대상이 됐다. 20년 전에 시작했던 작업이라고 하니 마침 ‘8월의 크리스마스’가 개봉됐던 무렵이다. 그러니 당시로서는 얼마나 새로운 정서였을까. 어쩌면 이 영화로 인해 우리는 시대의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인생 전반부를 성북구에서 살았던 나로서는 이 영화의 배경이 성북구라는 사실이 조금은 의외다. 성북구에는 이 영화에서와 같은 빛이 없다. 성북이란 ‘성의 북쪽’이란 뜻이다. 여기서 그 성은 한양도성이고 산의 능선에 따라 걸쳐 있다. 그만큼 산이 높고 많아서 아침이나 저녁 햇살 모두가 산에 걸린다. 옆으로 나지막이 비켜 들어오는, 부드럽고 몽환적인 빛이 가능한 조건이 아니다. 그래서 처음에 이 영화를 봤을 때는 신촌이나 수색 같은 서울 서부 지역이 배경이라고 생각했다. 서울의 서쪽은 비교적 산이 낮고 평지가 많다. 이 방향으로 김포공항과 항공대 등 공항이 두 개나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석양도 시내보다는 신촌 쪽이 훨씬 더 아름답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장소에 대해선 이렇다 할 단서를 주지 않는다. 후반부에서 정원이 다림에게 편지를 쓰게 되고 그 겉봉에 성북구청 주소가 잠깐 나온다. 정원은 그 편지를 보내지 않는다. 이렇게 성북구라는 배경은 나 같은 토박이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변수가 되지 않도록 처리됐다. 이 덕분에 초원사진관이 있는 동네는 누구나 ‘언젠가 한 번은 살아봤음 직한 곳’이라는 여운을 남길 수 있었다.

허 감독은 전북 전주 출신이지만 서울 서대문구에 오래 살았다. 그의 부모님은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북가좌동 집터를 여태 지키고 계신다. 대학은 ‘석양이 아름다운’ 신촌에서 다녔고 지금 살고 있는 곳도 강북의 서촌이다. 변화무쌍했던 시대를 살아온 사람치고는 삶의 반경이 넓지 않다. 보나 마나 ‘강북 촌놈’ 소리를 수도 없이 들었을 그가 어딘가에 있을 오래된 동네를 배경으로 한 담담하고 서정적인 영화를 만들었던 것이 우연은 아닌 듯하다.

당시의 그 감성은 이제 시대를 한 바퀴 돌아 우리 도시의 미래를 고민하는 화두의 일부가 됐다. 그야말로 우리 식의 탈근대 정서가 막 개화하려는 참이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모든 것이 넘어가고 있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시간이 다 해결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만큼 훌륭한 이야기꾼은 없다. ‘꽃 피는 산골’ 못지않게 잿빛 콘크리트의 아파트도 세월이 흐르면 가슴 뭉클한 고향이 된다. 아름다운 추억은 앞으로도 계속 만들어질 것이다. 어쩌면 기왕에 있던 것을 더 잘 기록하고 더 소중히 여기게 될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한국 사회에도 조금씩 시간의 두께라는 것이 생겨나고 있다.

허 감독은 활짝 웃고 있는 김광석의 사진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여기서 얻은 영감은 ‘자기 영정 사진을 찍는다’라는 아이디어로 발전했고 바로 이 영화의 줄거리를 이끌어가는 핵심 개념이 됐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한 시대의 영정사진인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게 될 것이라는 암시를 던진다. 조용하고 나지막하게, 새로운 감성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알려준 것이다. 마치 감독 자신의 목소리처럼. 그것도 20년 전에.

황두진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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