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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Fifty+ 게재 일자 : 2017년 08월 11일(金)
“인생 2막요? 진짜 무대서 제대로 막 올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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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만에 연극 취미 되찾은 설경수 변호사

나이 50에 평생을 함께할 취미를 구한다는 것은 소박한 인생 2막을 꿈꾸는 이들의 자그마한 소망일 게다. 게다가 그 취미가 20대 초반, 가장 풋풋했던 시절 함께 했던 취미라면 금상첨화. 설경수(54) 변호사는 1981년 대학 1학년 때 친구의 권유로 시작해 강제로 징집될 때까지 짧게 경험했던 ‘연극’을 2011년 다시 시작했다. 정확히 30년 만에 다시 만난 ‘연극’은 삶의 활력소가 되고 어느새 놓칠 수 없는 평생의 취미가 됐다. 1년에 한 번 연극을 기획하고 무대에 오르는 순간이 ‘축제’라는 설 변호사는 ‘법조인 극단’을 하나 꾸리는 게 ‘꿈’이 됐다. 목소리부터 남달랐다.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설 변호사의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들리는 목소리는 굵은 음성, 그러나 또렷하게 귀에 꽂히는 발성이다. 동숭동 대학로 소극장에서 들었던 ‘연극배우의 목소리’였다. “타고난 목소리예요. 변성기 이후 같은 목소리, 아버지나 동생도 비슷해요.”

▲  지난해 서울대 개교 70주년 기념 관악극회의 연극 ‘법대로 합시다’에서 재판장 안젤로 역을 맡은 설경수 변호사가 노사빈 역할을 맡은 배우 지주연(서울대 언론정보학과 03학번) 씨와 열연을 펼치고 있다. 설경수 변호사 제공
연극과의 첫 만남부터 물었다.

“서울대 사범대 국어교육과 81학번인데, 그땐 단과대마다 연극반이 있었어요. 근데 우연히 먼저 연극반에 가 있던 친구가 ‘배우 한 명이 모자라는데, 조그만 역할이니 너가 한번 해 줄래’라고 제안해 따라갔어요. 그 뒤로 1학년, 2학년 때 두 번 공연을 했죠. 그리고 3학년 때 서울대 총연극회 부회장을 맡았어요.”

그는 대학교 1학년, 친구 따라 왕의 신하 역할 ‘대타’로 나섰다가 당시 연출자의 결단으로 2주 연습 만에 덜컥 주인공인 ‘왕’으로 무대에 선 뒤 2학년 때도 주연을 맡았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관악경찰서에 끌려가 그날로 강제로 휴학계를 내고 머리를 밀린 뒤에 군대에 갔죠. 이후로는 연극을 못했어요.” 군대를 다녀온 뒤 설 변호사는 짧은 교사·기자 생활을 거쳐 변호사가 됐다. 연극과는 자연스레 멀어졌다.

“30년간 연극을 안 하고 있다가 2011년에 다시 시작했어요. 서울대 연극동문회라는 조직이 만들어진 겁니다. 그리고 동문회 안에 ‘관악극회’라는 부설 극단이 있는 거죠. 그동안 동문회나 극회를 만들려는 시도는 여러 번 있었는데, 잘 안되고 하다가 2011년에 만들어진 뒤에는 해마다 정기공연도 하고 중간중간 워크숍 공연도 하고, 지금은 저변을 넓혀 연극아카데미라고 해서 연극에 관심 있는 사람들과 같이 희곡도 읽고, 연기 기초 수업도 받고, 그런 활동을 합니다.”

설 변호사는 30년 만에 연극을 다시 시작한 뒤 1년에 한 작품씩 꼬박꼬박 참여하고 있다. “무엇보다 제가 좋아하고 흥미를 느끼는 게 가장 큰 이유고요, 사실 시간이 꽤 많이 들어가는 작업이지만, 연극이라는 종합 예술을 하다 보면 작품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도 하게 됩니다. 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줄 것인지 고민도 하게 되고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리프레시’(refresh)가 됩니다.”

발성이나 발음 연습을 하면 법정에서 변론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도 하고 의뢰인을 초청하면 변호사의 색다른 모습을 보여줘 더 신뢰를 얻는 부수입도 챙겼다.

설 변호사에게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물었더니, 대뜸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보여주며 그간 연기했던 배역에 대해 설명한다. 한마디 한마디에 연극에 대한 열정과 배역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관악극회 공연에 대해 믿고 볼 만하고, 배우들 연기력도 날로 좋아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요. 특히 지난해에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마당극 대가인 임진택 감독님이 전통 마당극 형식으로 바꿔서 했는데, 정말 극찬을 받았어요. ‘법대로 합시다’라는 제목인데, 마침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과도 맞아떨어지며 사람들이 곳곳에서 폭소를 터트리며 좋아했죠.”

설 변호사는 이순재·심양홍·정진영·지주연 등 내로라하는 서울대 출신 배우들이 함께 출연한 연극에서 당당히 주인공인 안젤로 역할을 맡았다. 엄격한 법과 질서를 표방하지만 사리사욕을 채우기 바쁜 타락한 판사 역할이다.

“올해는 배우로는 출연하지 않아요. 대신 제작진으로 참여하는데, 말 그대로 재정이나 작품 선정, 연출 위촉까지 전 과정을 책임지고 함께 해요”.

제작진으로서 그는 올해 칠레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의 ‘과부들’이란 작품을 무대에 올린다. 피노체트 독재 치하의 암울한 칠레 상황을 다룬 연극이다. 이어 30년 만에 무대에 다시 돌아와 맡았던, 크지 않은 배역에 대한 설명, 3회 정기 공연인 ‘유민가(流民街)’의 조선인 형사 역할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제가 맡은 배역을 보면 남성성이 강하고 성량이 큰 역할을 자주 해요. 군인이나 사령관, 왕 같은 역할. 사실 이게 배우로선 썩 재미있는 건 아니에요. 완전히 해보지 않은 역할을 맡아서 관객들의 공감을 끌어냈을 때 그게 성취감이거든요. 그동안 안 해본 연기를 해보고 싶어요.”

연극이 가진 장점에 대해 물었다. “연극은 사실 하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장르는 아니에요. 흔히 하는 이야기가 ‘연극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고 하는데, 정말 열정만 있고 약간의 재능만 있으면 누구나 무대에 설 수 있어요. 연극엔 교육적 효과도 커서 프랑스에서는 연극을 필수 교과목으로 해놓고 있어요. 한국에서도 학교생활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아이들을 모아서 연극을 가르쳤더니 굉장히 밝아지고 적응도 잘하게 됐다는 사례도 있어요.”

‘퇴직하면 연극이나 할까’라는 동행한 사진기자의 질문에 설 변호사는 “연극 하는 맛, 한번 무대에 서면 또 하고 싶은 중독성이 있다”며 사회인 연극에 대해 적극적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법정도 하나의 무대라고 볼 수 있지 않나요. 그렇게 보면 변호사와 연극배우는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다’는 어설픈 질문에 설 변호사는 “사실 연극 하며 느끼고 체득한 연극적 기술을 법정에서도 적용하려 하는 편”이라고 답했다. 그는 “사건에 따라서 변론이란 게 결국 판사를 설득하는 건데 이걸 강한 웅변조로 몰아붙일지, 차분하고 낮은말로 설득할지, 그런 걸 나름대로 계산하고 사건과 상황에 맞게 구사하려고 하는 편”이라며 “변론이 정말 잘됐다고 느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방청석에서 따라 나와 명함을 달라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변론에 감동을 받아 나중에 사건을 의뢰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친 것이다.

“한 작품을 놓고 연극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몇 달 동안 수많은 토론을 해요. 이 상황에서 이 캐릭터는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이 사람의 사고방식은 도대체 뭔가 이런 것에 대해 토론하면서 뭔가 철학적인, 인간사·세상사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연극을 만드는 과정은 공연이 끝나는 그날까지 몇 달 동안 작품에 깊이 천착하지 않으면 안 돼요.”

설 변호사의 연극 예찬론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배우가 침 튀기는 것까지 보고 숨소리까지 들으며 팽팽한 긴장감을 실시간으로 느끼는 것이 다른 예술 장르가 갖지 못한 연극만의 강점이자 매력이에요. 배우 입장에서는 같은 대본으로 같은 연기를 하지만 매 순간이 달라요. 관객 반응, 상대 배우의 미묘한 반응 차이에 따라 연기가 확 달라지는 건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연극의 매력이에요.”

▲  설경수 변호사가 9일 서울 서초구 자신의 법률사무소에서 30년 만에 무대에 다시 서게 된 이유와 연극의 매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선규 기자 ufokim@

지난해 공연 때는 20일간 24회 공연을 하며 변호사 업무와 병행하다 보니 대상포진까지 걸렸지만 1년에 한 번 연극을 만드는 것은 포기할 수 없단다. “1년에 한 번은 반드시 무대에 서거나 기획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평생의 취미로요. 그렇게 1년에 한 번 나를 재정비하는 의미도 있죠. 내 일에만 몰두해 있고 그러면 시야도 좁아지고 널리 못 보는 면도 있는데 연극을 하게 되면 내 묵은 찌꺼기를 막 털어내는 해방감도 느끼고, 나에게는 일상에서 벗어나 축제 같은 기쁨을 만끽하는 면이 있어요.”

‘연극하는 변호사’인 설 변호사는 상당히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6개월간 국어 교사로 재직한 뒤 2년여 동안 신문기자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는 “대학 다닐 때 시대 상황이 1990년대 들어서며 많이 바뀌었고, 그때 나를 포함해 많은 친구가 진로를 바꾸고 있을 무렵이었다”며 “20대 때 공부를 공부답게 한 기억이 없어 지금이라도 원 없이 공부해 보자고 해서 사시 공부를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고시생 시절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하기도 했다. “36회 사법시험 1차 헌법 과목 문제 오류와 관련해 행정소송과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어요. 행정소송은 대법원까지 가며 길어지는 와중에 이듬해 1차 시험에 합격하자 대법원이 ‘소의 이익이 없다’며 각하 선고를 했고, 이건 행정법 교과서에 다 실려 있어요. 손해배상 소송은 1, 2심에서는 승소 판결을 얻어내기도 했어요. 그러니까 수험생들이 난리가 난 겁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사시·행시는 말할 것도 없고 각종 국가고시 관련 수험생들의 소송이 이어졌고 그 결과 국가시험 제도 자체가 상당 부분 개선됐어요. 그 역할에 대해서는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인터뷰 내내 설 변호사는 연극과 함께하는 삶에 푹 빠져 있는 모습이었다. 자신의 삶뿐 아니라 남의 삶에도 그랬다. “삶 자체가 연극 대본 같아요. 변호사는 의뢰인한테 돈을 받아가며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고, 수많은 인생을 아주 깊이 들여다보게 되고 내가 몰랐던 다른 분야, 직업 세계도 알게 됩니다. 사회와 인간에 대한 공부를 하는 굉장히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는 몇 달간 한 배역에 빠져 사는 연극과 상통하는 면이 있어요.”

그의 연극 사랑은 계속될 것 같았다.

“계속할 겁니다. 연극에 재미를 좀 붙이며 했던 생각이 법조인 극단 내지 변호사 극단을 만들어 운영하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외국에는 법률 사건을 갖고 연극으로 푸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에선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만약 법조인들이 법률 사건을 소재로 연극을 만들어 일반인을 상대로 공연한다면 법률 내용이나 소송 절차, 법조인들의 실상이나 애환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반인과 법조인 사이에 공감하고 소통하는 폭도 더 넓어질 수 있고요. 아직은 아이디어 차원에서 머무르고 있어요.”

재미있는 포부에 자신 없는 목소리, 하지만 30년 만에 되찾은 ‘연극’이라는 취미이자 삶의 동반자에 대한 설 변호사의 애정, 그리고 고시생 시절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낼 정도의 실천력을 감안할 때 조만간 법조인 극단이 현실화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민병기 기자 mingmi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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