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言語로 일어섰고 疏通으로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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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인간학 / 김성도 지음 / 21세기북스

내일과 만약(if).

현생 인류 호모 사피엔스가 수적으로나 체력적으로 뛰어난 네안데르탈인을 제치고 지구의 지배자가 된 결정적인 이유다. 때는 7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는 다른 호미닌(Hominin·현생 인류와 그 조상)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상징의 문턱’을 넘어서는 ‘인지혁명(The Cognitive Revolution)’을 일궈낸다. 상징적 사유를 통해 가상적이고 허구적 언어를 만들어내 ‘오늘’에서 벗어나 ‘내일’이라는 단어를 발명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인류는 미래를 예측하고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은 상황을 가정해 의미를 구축하게 된다. 인류 진화와 인류 문명의 결정적 분기점이다. 인류 역사를 언어의 진화, 언어적 본능의 틀로 분석한 김성도 고려대 언어학과 교수의 ‘언어인간학’은 이 분기점에서 출발한다. ‘언어인간학’은 언어학, 인류학, 미술사, 인지과학, 기호학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연구를 통해 인간과 언어, 문명의 관계를 조명하는 연구 분야로, ‘언어 인간학’이라는 이름은 저자가 명명한 것이다.

책의 근본적인 전제는 오늘날 인류를 있게 한 가장 큰 힘은 언어라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이렇게 표현된다. 인류는 소통했기에 살아남았다. 이 소통의 역사를 살펴보면 대략 10만∼5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동물과는 질적으로 다른 의사소통 체계가 출현한다.

10만 년 전 호모사피엔스의 언어는 정교한 음성 언어 시스템에는 이르지 못한 채 위급한 상황을 알리는 일련의 몸짓, 모음과 허밍, 으르렁대는 소리 정도였다. 그러다 10만∼5만 년 전에 이르러 호모 사피엔스는 직각을 이루는 완결된 성대를 갖게 되면서 음성 언어 시스템을 획득한다. 5만∼3만5000년 전, 드디어 몇 개의 간단한 문자들로 사냥한 먹잇감의 특징과 사냥 과정을 명료하게 설명하기에 이른다.

최근 들어 침팬지는 물론 꿀벌 등 많은 동물들도 자기들만의 언어를 갖고 있음이 밝혀졌지만 호모 사피엔스만이 유일하게 언어의 최소 단위인 음소를 결합해 무한한 기호를 구성하는 이중 분절 시스템을 갖고 있다. 이 시스템으로 인해 인간은 사물을 정확하게 지칭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사물을 지칭할 수도 있고, 오지 않은 내일을 상상할 수 있으며, 만약을 말할 수 있게 됐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일러스트=김정훈 기자 kimjh@

이어 책은 이미지를 창조하는 호모 그라피쿠스(Homo Graphicus), 문자를 사용하는 호모 스크립토르(Homo Scriptor), 말하는 인간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와 호모 디지털리스(Homo Digitalis)로 이어나간다. 언어의 범위를 고전 언어학의 대상인 음성 언어에만 국한하지 않고 시각, 문자, 몸짓, 디지털 언어 등을 아우르는 다원주의적 입장이다. 이 ‘호모’들은 인류의 시간순 ‘진화’라기보다는 때로는 중첩돼 발현되는 언어적 본성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림 그리는 인간 ‘호모 그라피쿠스’는 구석기의 동굴 벽화, 중세의 스테인드글라스, 사진술을 거쳐 디지털 영상 세대와 연결된다. 분명한 것은 중심 언어에 따라 인류 역사가 바뀌었다는 점이다. 호모 스크립토르시대, 문자가 발명되고 권력자가 이를 장악하면서 인간 착취의 역사가 시작됐다는 식이다.

저자는 긴 역사를 거쳐 당도한 ‘호모 디지털리스’시대를 이야기하며 ‘기억’과 ‘망각’의 문제를 꺼내 든다. 돌아보면 언어의 역사는 새로운 기억 저장 장치 발명의 역사이기도 했다.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기억력 상실의 역사이기도 했다. 플라톤의 대화 참여자, 석가모니의 제자, 중세 시대 소르본의 대학생들은 수십 년이 흐른 후에도 스승 또는 암송자의 말을 정확하게 복원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저자의 손익계산 표는 ‘이득이 상실을 압도했다’이다. 개인이 기억의 부담을 던 만큼, 다른 지적 활동을 벌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 학자들이 자료 정리의 부담에서 벗어나자 자연 현상 관찰에 몰두함으로써 실험 과학을 탄생시킨 것과 같다. 하지만 호모 디지털리스 시대, 기억과 망각의 문제는 그 정도와 강도가 다르다. 디지털 시대 인류는 개인적·주관적 지능을 상실하고 그 대신 집단적·객관적 기억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기존의 1인칭 단수 시점의 사유,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이제 복수 시점인 ‘우리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수정돼야 한다.

문제는 이 같은 객관적이고 집단적인 기억과 자료의 축적은 망각의 부재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이는 개인이 또 다른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잠재력을 무너뜨리고,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 가면서 인간 존재를 근본적으로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 이에 저자는 호모 디지털리스들은 자신의 디지털 정보를 관리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확보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잊어질 권리’에 대한 이 같은 논의는 그리 새롭진 않지만, 인류 언어 진화의 역사가 망각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점은 흥미롭다. 책은 인문 아카데미 건명원에서 진행한 강연을 묶은 것으로 언어의 본질로 깊이 들어가기보다는 ‘언어 인간’의 전체적인 틀을 쉽게 그리게 한다. 360쪽, 1만8000원.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