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강한지 男들은 모를걸

공연계 ‘큰손’은 2030 여성이지만, 작품 속 여성들은 어쩐지 설 곳이 없다. 왕의 아내, 주인공의 짝사랑 상대 등 그럴듯한 꼬리표는 달고 있지만 실상은 누군가에 기댄 존재들이다. 뮤지컬 ‘나폴레옹’ 속 조세핀이 그랬고, ‘시라노’ 속 록산느가 그랬다. 여느 때보다 풍성한 뮤지컬 라인업과 블랙리스트 사태 후 다시 활기를 찾아가는 연극판에서 여전히 찾아보기 어려운 게 있다면 바로 여성의 목소리. 현실 속 유리천장도 모자라,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불합리와 불평등함에 지친 관객들이라면 이곳에 눈을 돌려볼 만하다. 남성이 만든 세계에 갇혀 있던 여성의 목소리가 모처럼 들리는 연극 두 편이다.

갑질 연출가 무릎 꿇린 女優의 외침 ‘비너스 인 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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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 인 퍼 = 레이스가 달린 검정 캐미솔에, 짧은 핫팬츠 아래 검정 망사스타킹과 하이힐. 언뜻 보면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탄생한 존재 같다. 마조히즘의 모티브가 된 소설을 각색한 연극의 여주인공 역을 맡기 위해 오디션장을 찾은 배우 ‘벤다’다. 그의 연기를 심사하는 것은 여배우들에게 모욕감을 줌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주장하는 연출가 ‘토마스’. 오디션 중 둘은 연극 대본에 따라 자신이 비너스로 여기는 여성에게 복종하길 원하는 쿠？스키와 그에게 명령을 내리는 여주인공 두나예브를 연기한다. 그 과정에서 남성 연출가와 여배우 사이의 권력관계는 어느새 묘하게 뒤틀어지고, 주도권은 벤다에게로 향한다. 결국 토마스는 쿠？스키처럼 대본 속 여주인공으로 완벽하게 변신한 벤다 앞에 무릎 꿇으며 희열을 느낀다.

벤다는 오디션 중에도 위대한 사랑 얘기로 포장됐던 연극 대본이 실상은 토마스의 변태적 욕망이 재현된 것뿐이라고 조롱한다. 대본 속 여주인공이 남성에게 가학적 지시를 내리는 것조차 자신의 의지라기보다 남성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켜 주기 위함이었다는 것. 토마스의 세계를 유쾌하고 섹시하게 걷어차면서 벤다는 묻는다. “남자의 노예이기를 멈출 때, 여자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요. 공평하게 교육받고 일에서도 동등한 파트너일 때, 여자가 자기 자신이 될 때.” 벤다를 연기한 배우 이경미는 “여성이 남성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기 존재를 드러냈을 때, 얼마나 강한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통쾌하게 보여준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덧붙여 벤다가 작품 끝까지 정체를 밝히지 않는 것은 묘한 의구심을 남긴다. 벤다는 결국 토마스가 부정하고자 했던 자기 안의 모순이 아닐까. 오는 27일까지 서울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 111에서 국내 초연된다.

엄마·아내·딸들의 처절한 투쟁기 ‘트로이의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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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의 여인들 = 남자들의 잔혹한 투쟁으로 붕괴한 세계를 온몸으로 받아냈던 엄마와 아내, 딸들의 이야기가 무대 위에 펼쳐졌다.

연극뿐만 아니라 영화, 뮤지컬, 심지어 창극으로도 변주되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고전 ‘트로이의 여인들’이 극단 떼아뜨르 봄날에 의해 재탄생한 것. 좁은 무대를 가득 채우는 13인의 여배우와 3명의 남자배우가 등장하는 작품의 기본 줄거리는 그리스 신화 그대로다. 그리스와의 전쟁에서 패한 트로이, 남자들은 모조리 살해당하고 남은 건 여성과 어린아이들뿐.

어머니는 자식을 죽인 자의 종이 되고, 딸 혹은 며느리는 적군 사령관에게 강간당하거나 죽은 남성을 따라 땅에 묻히고, 아버지를 잃은 아이는 절벽에서 떨어져 죽음을 당한다. 그럼에도 트로이의 왕비 헤카베는 말한다. “운명은 변했다. 견뎌 내는 수밖에.”

작품이 초점을 맞추는 것은 존엄성의 위기를 맞은 여성 특유의 ‘조용하고 내적인 투쟁’이다.

여성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든 남성들을 원망하거나 모욕하지 않는다. 대신 서로 모여 위로하며 비참한 현실을 끝끝내 견디고, 다음을 기약할 힘을 축적한다. 그리고 아내가 트로이로 달아났다는 이유로 전쟁을 벌여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까지 빼앗은 그리스의 왕 등 남성 권력자들을 준엄하게 꾸짖는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며, 과연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되물으면서.

떼아뜨르 봄날의 ‘그리스의 여인들’ 두 번째 시리즈인 이 작품은 예술공간 서울에서 10일부터 20일까지 공연됐다.

인지현 기자 loveofall@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