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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카페 게재 일자 : 2017년 08월 23일(水)
사실상 高宗이 건립 주도… 主權國 천명한 ‘대한제국의 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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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대문 독립공원에 있는 독립문. 독립문은 원래 현재 위치의 동남쪽 70m 지점에 있었으나 성산대로 공사 때문에 1980년 이곳으로 옮겨져 복원됐다. 안창모 교수 제공

안창모의 도시 건축으로 보는 서울 - ⑥ 독립문의 실체

매년 8월이면 귓전으로 흘려보낼 수 없는 말로 일제강점, 해방, 독립, 광복 등이 있다. 8·15가 있기 때문이다. 8·15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래서 8월이면 더욱 중요하게 다가오는 건축물이 있다. 독립문이다. 그런데 최근 ‘독립문은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문’이라고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필자는 큰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우리의 근대사 교육이 부실했다고 했지만, 독립문에 대한 역사적 진실이 이렇게까지 왜곡될 수 있는 것일까? 때 늦은 감이 있지만 ‘독립문’의 실체를 다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유다.

올해는 대한제국이 출범한 지 120년이 되는 해로 대한제국을 바로 보기 위한 여러 행사가 준비되고 있다. 그러나 지난 100여 년 동안 대한제국은 우리의 역사에서 존재감이 없었다. 나라가 일본에 강점되었을 때 우리는 ‘조선이 망했다’고 말했지 ‘대한제국이 망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는 역사에서 대한제국이 지워져 있었고, 머릿속에는 대한제국이 입력되지 않았거나 잘못 입력되었기 때문이다. 근대는 나라를 잃어버린 시기이기에 우리는 근대를 수치스럽게 생각했고 그래서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우리 근대사의 진실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일본이 심어놓은 그럴 듯하게 왜곡된 역사가 자리 잡게 되었다. 그 중심에 독립문이 있다.

대한제국은 1897년에 출발했지만,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던 시기에 이미 준비되고 있었다. 그 증거의 하나가 독립문의 건설이고, 독립문 아치의 키 스톤(Key Stone, 아치 맨 꼭대기에 이맛돌)에 박힌 대한제국의 상징인 오얏꽃 문양이 구체적인 증거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독립문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우리는 학창시절에 ‘청에 대한 사대의 상징인 영은문을 철거하고, 청의 속박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로 독립문을 세웠다’고 배웠다. 그리고 설립의 주체는 서재필이라고 배웠다. 오랫동안 중국을 사대했던 조선의 역사를 익히 알고 있던 우리는 이러한 독립문에 대한 가르침에 대해 추호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독립문은 ‘굴욕의 영은문 맥을 누르고, 독립 의지를 세운 문’으로 매우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됐고, 근대 건축유산 중 가장 먼저(1963년) 사적 제32호로 지정됐다.

그러나 정작 현실에서 독립문은 이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문화재위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77년 중앙청 앞(현 광화문 앞)에서 사직터널과 금화터널을 거쳐 성산대교로 이어지는 성산대로가 독립문 바로 위에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문화재위원회의 ‘독립문의 원위치 고수’ 의지가 강력하여, 성산대로가 S자형 도로로 수정되기도 했지만, 1980년 3월 결국 서울시의 요구대로 옮겨졌다. 1990년에는 독립신문 창간기념일에 서재필의 동상이 독립문을 바라보는 위치에 세워졌다. 독립신문 창간과 발행의 주역인 서재필의 공을 기린다는 이유에서였다.

간략하게 정리한 독립문의 연혁이지만, 놀랍게도 연혁 중 독립문의 이전 사실 외에는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어왔던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해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다’는 내용이 사실과 다르고 그 주체도 ‘서재필’이 아니라면 진실은 무엇일까?

▲  중국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모화관 앞에 세웠던 영은문.
▲  1895년 철거돼 주초(가운데)만 남은 영은문. 철거 당시에 독립문 건설은 예정에 없었다.


우리는 서재필이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독립문을 지었다고 배웠다. 독립협회는 어떤 단체였을까? 독립협회는 독립문 건립과 독립공원 조성을 목적으로 창설된 단체로 서재필, 안경수, 윤치호, 이상재, 이승만, 박정양 등에 의해 조직된 단체이기에 영향력이 크기는 했지만 성격은 민간단체다. 그런데 민간단체가 아무리 뜻이 좋다고 해도, 정부재산인 영은문을 임의로 철거하고 독립문을 세우는 것이 가능할까?

여기서 영은문이 철거될 수 있는 상황은 2가지로 상정해 볼 수 있다. 국가행정이 엉망이어서 유력 인사나 단체가 마음대로 국가재산에 손을 댈 수 있는 상황이거나, 아니면 정부가 전면에 나서기 곤란할 때 정부를 대신하여 누군가가 독립문의 건설을 추진하도록 용인받은 상황이다. 그렇다면 독립문이 건설되던 1896년 7월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거처하고 있어서 나라 행정의 무질서가 극에 달했던 시기였을까? 그렇지 않다. 당시 정부는 도시개조사업을 계획적으로 추진할 만큼 행정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정력의 부재보다는 정부가 전면에 나서기 곤란해 누군가가 독립문의 건설을 추진하도록 정부가 용인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우리가 알고자 하는 ‘독립문 건설 주체’의 역사적 진실은 ‘실패한 갑신정변으로 미국으로 도망갔던 서재필이 어떻게 10년 만에 귀국할 수 있었을까?’에 대한 합리적 의심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갑신정변의 실패는 정변의 주역이었던 서재필이 역적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갑신정변 실패로 가족은 모두 죽임을 당했고, 역적이 된 서재필이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는데 정권이 바뀌지 않은 1895년에 어떻게 귀국할 수 있었을까? 서재필이 미국에서 의사면허를 취득하고, 미국 시민이 되었지만, 귀국을 위해서는 조선 정부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

즉 서재필의 귀국은 고종의 허락이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인 것이다. 고종이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면 귀국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고종이 서재필의 귀국을 허락한 것은 서재필에게 맡길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귀국 후 서재필의 활동을 보면 고종이 그에게 맡기고자 했던 일은 독립신문의 발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재필의 영자 독립신문 발행

조선 사람들에게 개화사상과 독립정신 고취를 위해 순 한글 독립신문을 창간했다는 말이 있지만, 순 한글 신문이 목적이었다면 굳이 미국에 있던 서재필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독립신문이 순 한글 신문이었다는 사실에 역사적 가치를 크게 주고 있지만, 독립신문의 진정한 가치는 영어 신문을 동시에 발행했다는 점에 있다. 영어 신문 발행을 위해 서재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종은 왜 영자 신문을 필요로 했을까? 그것은 정부가 서양과 소통하기 위함이었다. 독립신문은 서재필을 발행인으로 했지만, 정부 지원금 4400원으로 발간됐고, 서재필은 정부로부터 월급을 받았다. 이는 독립신문의 발행을 서재필의 의지만으로 보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서재필이 영은문을 헐고, 조선이 독립국임을 증명하는 독립문을 건설하자고 주장했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영은문이 철거된 것은 1895년 2월로 서재필이 귀국(1895년 12월 26일)하기 전에 이미 철거됐기 때문이다. 독립문 없이 영은문의 주초(주춧돌)만 있는 사진이 이를 보여준다.

우리는 독립문을 짓기 위해 영은문을 철거했다고 배웠지만, 영은문이 철거된 것은 1895년 2월이다. 갑오개혁 때 청에 대한 사대를 끝낸다는 의지를 담아 철거한 것은 맞지만, 영은문 철거 당시에 독립문 건설은 예정에 없었다. 독립문 건설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대한제국을 준비하며 시작된 일이며 독립문은 1898년 1월 완공되었다.



#독립문은 자주국의 상징

독립문이 완공될 당시 서재필이 독립신문 영어판에 ‘독립문 건설은 청이나 일본으로부터의 독립뿐 아니라 조선을 두고 각축을 벌이는 세계열강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한다’고 언급한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서재필의 말은 독립문 건설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이해돼야 한다. 조선이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개항한 나라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적어도 아시아에서는 마지막으로 개항한 나라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런데 조선의 개항 환경은 중국이나 일본이 개항하던 때의 국제적 상황과 크게 달랐다. 중국과 일본의 개항은 서양 국가들끼리의 경제적 이익 극대화를 위한 이권 쟁탈전이었지만, 조선이 개항할 당시에는 서구열강 외에 조선에 대해 종주국임을 주장하는 중국과 20여 년 앞서 개항한 실력으로 자신들도 한몫을 차지하려는 일본까지 이권 쟁탈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에서의 마지막 이권쟁탈을 위해 각축을 벌이는 나라들을 향해 조선은 주권국이니 간섭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천명할 필요가 있었고, 파리의 개선문을 닮은 독립문의 건설은 조선이 자주국임을 세계 여러 나라에 선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독립(獨立)’의 의미는?

한편, 독립문과 독립신문에 사용된 ‘독립’의 의미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개항 당시 조선은 식민지가 아니었기에 ‘독립’이 식민지로부터의 독립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은 명확하다. ‘독립’은 오늘날 생각하는 ‘식민지로부터 벗어나는’ 독립과는 달리, ‘자주’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독립문은 우리가 홀로 설 수 있는 나라이니 주권에 간섭하지 말라는 선언이었던 셈이다. 이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석조전 건설이 ‘대한제국이 서양식 근대국가를 지향하며, 근대국가를 운영할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조선 정부의 입장은 대한제국 출범 후 열강의 각축전 사이에서 주권 수호를 위해 중립국화를 추진했다는 사실과도 일치한다. 따라서 독립문의 건설은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이어지는 고종의 주권수호 의지의 발현이고, 이는 곧 독립문이 서재필의 독립문이 아닌 고종의 독립문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정리하면, 독립문 건설과 영은문 철거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없으며, 독립문을 세우기 위해 영은문을 철거한 것이 아니다. 독립문과 독립신문은 서재필이 실무 주역이기는 하지만, 서재필의 독립문이나 독립신문이라기보다는 대한제국이라는 큰 그림 속에 존재하는 고종의 독립문과 독립신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근대사는 일본에 의해 ‘고종=무능한 왕’이라는 프레임을 강화하기 위해 대한제국기의 중요한 개혁이나 정치적 사건은 서재필의 경우처럼 개인의 역할이 강조됐고, 반대로 고종과 대한제국의 역할과 존재감은 소멸되면서 무능한 고종, 무력한 대한제국의 이미지만 강화돼 왔다.

그렇다면 최근 들어 독립문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여 지어진 문’이라는 잘못된 인식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이는 원위치에서 벗어난 독립문이 서대문형무소 영역에 속하게 되고, 서대문형무소와 독립문을 포함하는 서대문 독립공원이 조성되면서 독립운동과 독립문이 동일시된 착시현상의 결과로 판단된다. 근대사 연구와 인식 부족 그리고 근대사 교육의 부재가 낳은 재앙이라고 할 수 있다.(문화일보 8월 2일자 28면 5 회 참조)

안창모 경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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