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공간>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꽃그림… 전쟁터같은 세상 밝히는 환한 풍경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황주리, 식물학, 183×228cm, 2015

황주리의 대표작 ‘식물학’

‘식물학’이라는 제목으로 내가 꽃을 그리기 시작한 건 1990년대 중반부터이다. 창밖으로 자유의 여신상이 아침마다 횃불을 들고 맞아주던 곳, 뉴욕 맨해튼 세계무역센터 바로 옆에 있던 25층 작업실에서 나는 매일 하루 열 시간씩 그림을 그렸고 1주일에 한두 번 시내에 나가 영화를 서너 편씩 보았다.

그 시절 매일 다른 영화를 볼 수 있던 뉴욕은 시네마 천국이었다. 삶이란 시간예술이라는 생각이 요즘에 와 절실하게 들지만 매 순간 아이디어를 머릿속으로 수집하던 내게 세상의 모든 장소와 풍경이 다 작업실이었다. 2001년 작업실 옆의 그 거대한 건물이 한 ‘쾌’에 무너진 지도 16년이 지나갔다. 어쩌면 사소한 것들은 매 순간 진화하지만 커다란 것들은 조금도 진화하지 못하나 보다. 세상의 전쟁은 아직도 끝나기는커녕 지구상 모든 곳이 여전히 전쟁터다. 누군가 인간의 감정 중에서 가장 진화되지 않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증오’라던 생각이 난다. 1990년대 중반 샌프란시스코 여행길에 들려온 스콧 매켄지의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머리에 꽃을 꽂는 걸 잊지 마세요~”하는 낯익은 노래에 문득 무언가가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워싱턴에서 펜타곤을 향한 반전행진시위대가 연방군에 포위되었을 때, 배우 조지 해리스는 군인이 들고 있던 총구멍에 꽃을 꽂아 주었고 이 노래는 전쟁을 반대하는 상징적인 주제가가 되었다.

1990년대 중반에 시작된 나의 꽃그림 ‘식물학’은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그런 이미지에서 시작되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 25층 내 작업실의 추억과 지금의 세상 풍경, 내 마음속의 풍경을 더해 이촌동 지금의 작업실에서 2015년에 그린 식물학이다. 색깔은 옛날 그때보다 훨씬 더 환해졌다. 어두운 세상 속의 환한 풍경을 그려보자는 역설적 표현이다.